홈페이지로


홈페이지 

루이스 캐럴 

일러스트레이션 

책 속으로 

책 밖에서 

링크와 참고자료 

이 사이트에 대해 

게시판 



이상한 나라로 들어간 캐시 - 존 스타인벡 <에덴의 동쪽> 속의 앨리스


<에덴의 동쪽>에서 주인공 애덤 트래스크의 부인이자 쌍둥이 형제 아론과 칼렙의 어머니인 캐시는 창세기를 모델로 한 이 이야기에서 이브에 해당하는 인물인데, 내면을 지닌 인간이라기보다는 원형적 팜므파탈, 순수한 악마에 가깝게 묘사된다. 그녀는 섹스를 무기로 휘둘러 주위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거나 파멸시키지만, 그녀가 어떤 동기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녀는 과거를 돌아볼 줄도, 고통스러워 할 줄도 모르는 듯 보이며, 심지어 자신의 의지를 명확한 말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단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녀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캐시가 유일하게 자기 의사를 강하게 표시하는 부분이 바로 뜨개바늘로 낙태를 기도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낙태에 실패하여 남편과 쌍둥이 아기를 버리고 도망친 캐시는 매음굴로 들어가 그곳의 주인이 된다. 관절염으로 뒤틀린 몸만이 그녀의 내면(의 고통?)을 대변하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마치 다스베이더의 훼손된 신체처럼?) 그녀의 비인간성을 더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침내 캐시가 스스로 죽음을 택할 때, 작품 전체를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설은 그녀의 시점을 취한다. 이때 그녀는 '작아지는 물약'을 마시고 앨리스와 함께 이상한 나라로 들어간다.

나는 작가인 스타인벡이 끝내 그녀를 이해하지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도 몰랐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케이트에게도 아들의 얼굴처럼 사랑스럽고 순수했던 소녀 시절이 있었다.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이 누구보다 영리하고 예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때때로 외로운 공포감이 엄습하여 마치 높다란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적에게 포위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면 주위의 모든 생각과 말과 형상이 자기를 해치려고 덤벼드는 것 같았다.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자신을 받아줄 은신처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저 엉엉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 한 권을 읽게 되었다. 그녀는 다섯 살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그것은 은박으로 제목이 쓰인 갈색 책이었다. 표지는 찢어졌고 두툼했다. 그 책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케이트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팔로 지탱하여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 책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앨리스였다. 그녀의 삶을 변화시켰던 것은 '나를 마셔요.'라는 글이 적힌 병이었다. 앨리스가 그녀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숲처럼 적들이 그녀를 포위했을 때,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탕물을 담은 병에 '나를 마셔요'라고 적힌 빨간색 라벨을 붙여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 병의 물을 조금 마시면 그녀의 몸이 점점 작아졌다. 그다음 적들에게 자기를 찾아보게 했다. 어린 캐시는 나뭇잎 아래 숨기도 하고 개미굴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키득거리기도 했다. 적은 그녀를 찾아내지 못했다. 문이 닫혀 있건 열려 있건 그녀에겐 상관없었다.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문 밑으로 자유롭게 들락날락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항상 앨리스가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고 믿어 주는 앨리스. 앨리스는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로, 언제나 그녀가 작아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캐시는 이 모든 것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때로는 비참해지는 것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가슴 한구석에 석연찮은 부분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위협인 동시에 안전장치였다. 그 병의 물을 다 마시기만 하면 그녀는 점점 작아져서 눈에 띄지 않게 되고 마침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될 터였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그녀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면 그 흔적조차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는 안전장치였다. 이따금 잠자리에서 '나를 마셔요.'라는 약을 넉넉히 마시면 몸이 모기 새끼만큼 줄어들어 끝내 하나의 점이 되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진 적인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종의 자구책이었다.

케이트는 외부 세계와 단절되었던 어린 소녀 시절을 회상하면서 슬픈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 놀라운 기술을 그동안 어떻게 잊고 지냈는지 의아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그 기술을 통해 온갖 불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클로버 잎사귀를 통해 비쳐 오는 빛은 찬란했다. 캐시와 앨리스는 어깨동무를 하고 무성한 풀숲 사이를 거닐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다. 캐시는 '나를 마셔요.'라는 약을 전부 마실 필요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앨리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케이트는 굽은 두 손 사이에 놓인 장부 위에다 머리를 괴고 있었다. 한없이 춥고 버림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했던 일은 모두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다. 그녀는 좀 특별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쳐들었지만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남들보다 더 영리하고 더 강인했으며,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었다.

한창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 칼의 검은 얼굴이 그녀 눈앞의 허공에 떠올랐다. 입가에는 잔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위에서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에 그녀는 숨을 몰아쉬어야만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자마자 그녀는 준비를 했다. 그리고 준비를 하자마자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니 평생 동안 자신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마음은 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몸뚱이는 어설픈 꼭두각시처럼 보기 흉하게 움직였지만, 자기 일만은 꾸준히 해 나갔다.

어느덧 정오였다. 식당에서 여자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게을러터진 그들은 이제야 겨우 일어난 것이다.

케이트는 문 손잡이를 돌리는 데 애를 먹었다. 손잡이를 두 손바닥 사이에 끼고 비틀어 간신히 문을 열었다.

여자들이 깔깔거리다 말고 바짝 긴장하여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요리사도 주방에서 나왔다.

케이트는 핼쑥한 유령처럼 보였다. 뒤틀린 몸이 어딘지 모르게 무시무시했다. 그녀는 벽에 몸을 기대고 여자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그들을 더욱 몸서리치게 했다. 그것이 비명을 대신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는 어디 있지?" 케이트가 물었다.

"나갔는데요."

"내 말 잘 들어, 난 오랫동안 잠 한숨 못 잤어. 지금부터 약을 먹고 잘 거니까 방해하지 말도록 해. 저녁 식사도 필요 없어. 늘어지게 잠만 잘 거야. 그러니 내일 아침까지 아무도 내 방근처에 오지 못하게 하라고 조에게 일러둬. 알겠어?"

"네."

"그럼 모두들 잘 자. 아직 오후이긴 하지만 미리 인사를 해두는 거야."

"안녕히 주무세요. 마담."

그들은 입을 모아 공손하게 인사했다.

케이트는 돌아서서 게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문을 잠그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부터 간단한 절차를 밟으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우선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고통을 참으며 손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내 전 재산을 내 아들 아론 트래스크에게 물려준다."

그녀는 날짜를 적고 서명을 했다.

"캐서린 트래스크."

그녀는 한동안 아픈 손가락을 종이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러고는 유서의 앞면을 똑바로 펼쳐 놓은 채 책상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에서 식은 차를 한 잔 따라 회색 곁방으로 들어가서 독서용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화장대로 가서 머리를 빗고 얼굴에 화장수와 분을 가볍게 바른 후 늘 사용하는 엷은 립스틱을 입술에 발랐다. 마지막으로 손톱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회색의 방으로 통하는 문을 닫자 외부의 빛은 완전히 차단되고 오직 독서용 램프만이 테이블 위를 비쳤다. 그녀는 베개를 가지런히 놓고 톡톡 두드려 정리한 후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마치 실험이라도 하듯이 베개에 머리를 기대어 보았다. 파티에라도 가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윗옷 속에 손을 집어넣어 쇠줄을 밖으로 꺼냈다. 작은 튜브의 뚜껑을 열고 안에 든 캡슐을 손바닥 위에 쏟았다. 그 캡슐을 보고 있자니 미소가 흘러나왔다.

"나를 먹어요."

케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캡슐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런 다음 찻잔을 들었다.

"나를 마셔요."

그녀는 이번에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식어빠진 씁쓸한 차를 삼켰다.

그녀는 앨리스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아주 작은 앨리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 한 구석에서는 다른 여러 사람들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찰스, 애덤, 새뮤얼 해밀턴, 아론, 그리고 자기에게 미소를 던지고 있는 칼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눈빛이 말을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에겐 무언가 결핍된 게 있어요. 다른 사람은 갖고 있지만 당신은 갖고 있지 못한 게 있지요."

그녀는 다시 앨리스를 떠올렸다. 맞은편 회색 벽에 못 구멍 하나가 보였다. 앨리스는 그 안에 있을 것이다. 앨리스는 캐시의 허리에 팔을 감고, 캐시는 앨리스의 허리에 팔을 감고 걸어갈 것이다. 그들은 못대가리처럼 작지만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다.

팔과 다리에 따뜻한 마비 증세가 번지기 시작했다. 손의 통증도 사라져 갔다.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것도 아주 대단히...... 하품이 나왔다.

그녀는 생각했다. 아니, 말했다. 아니, 생각했다.

'앨리스는 몰라. 나는 과거를 향해 똑바로 걸어갈 테야. 똑바로......'

두 눈이 감기면서 현기증과 함께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겁에 질려 주위를 살폈다. 어두워진 회색 방 안에 램프 불빛만이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다시 눈이 감기고 열 손가락이 작은 젖가슴을 움켜쥔 것처럼 뒤틀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장엄하게 고동치고 호흡이 느려지면서 그녀의 몸은 조금씩 줄어들다가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이 세상에 그녀라는 존재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참고자료

존 스타인벡 <에덴의 동쪽 2> (정회성 옮김, 민음사) 542-548쪽

top †










글 목록
+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앨리스1
+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앨리스2

+ 폴 오스터 <뉴욕 삼부작> 속의 앨리스
+ <애니매트릭스> 속의 앨리스 + 존 스타인벡 <에덴의 동쪽> 속의 앨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