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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시리즈의 매력


"나는 평원에 있는 한 마을에서 몇 푼의 루피와 성경 한 권을 주고 그것을 얻었지요. 그 사람은 이 책을 읽을 줄 몰랐어요... 그는 말하기를 자신의 책이 '모래의 책'이라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책도 모래도 시작과 끝이 없기 때문이라나요"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모래의 책>



북미 루이스 캐럴 학회지의 편집장이자 평생에 걸친 캐럴리안(루이스 캐럴 애호가)인 마크 버스타인이라는 사람이,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 2부작을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에 비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모래의 책'은 무한한 페이지 수를 가진 책으로, 보르헤스의 동명의 단편 속에 등장한다. 이 책의 첫 페이지와 끝 페이지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한 페이지를 집어도 그 사이에는 다시 무한한 수의 페이지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페이지 번호가 무작위로 붙어 있으므로 한번 열어본 페이지를 다시 찾는다는 것도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책은 사실 무한한 점들로 이루어진 실수 직선의 완벽한 재현이다. 수학자 캐럴이 들었으면 흥미있어 했을 이야기이다.

황당무계한 내용의 짧은 동화 두 편에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 있길래 어린이, 어른, 심지어 점잔빼는 학자들까지 사로잡는 것일까? 아동문학 전문가들은 이 책이 교훈과 무관하게 오로지 순수하게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학자, 철학자, 자연과학자들은 이 동화가 현대적 물리 법칙이나 난해한 철학 논리를 비유적으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 이야기들에는 모두 어느 정도의 진실이 들어있다. 그러나, <모래의 책>이야말로 이 책이 지닌 비밀의 핵심이다. 그리고 내가 앨리스 이야기에 매료된 진짜 이유이다.[주1]

나는 개인적으로 앨리스 책을 '문이 많이 달린 책'이라고 부르곤 한다. 앨리스를 읽는 것은 양쪽으로 문이 끝없이 달린 무한히 긴 복도를 걷는 것과도 같은 경험이다. 각각의 문 뒤에는 서로 전혀 다른 다채로운 세계가 존재하지만,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 열어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초록색의 긴 복도 말이다. 그러나 이 복도가 멋진 것은 이 문들을 모두 다 열어 확인해 본다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중에 고작 몇 개의 문만 열어봤을 뿐인데, 앨리스 책의 매력은 항상 '아직 열어보지 못한 문' 뒤에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있을 뭔가를 기대하는 설레는 마음 속에 있다.[주2]

나는 앨리스 이야기라는 하나의 줄거리 배후에 무한한 이야기의 가지들이 비선형적으로 뻗어있다고 상상한다. 앨리스 이야기는 개연성이 결여된 순수하게 무작위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주3], 마치 평행 우주와도 같이 무작위적인 다른 무한한 수의 이야기들의 존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앨리스 이야기의 현기증 나는 비밀이다. 그 가지들은 또한 서사가 아닌 분석이나 해석으로도 뻗어져 있으며, 이미지나 소리, 심지어는 하나의 숫자나 공식이나 가장 하찮은 쓰레기의 막다른 골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지난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서서히 만들어져 온 이 가지 - 혹은 그물 - 의 구조는 웹의 비선형적인 구조에 잘 들어맞는다.

누구나 앨리스를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한다. 수학자인 마틴 가드너는 심리학이나 정치학 하는 사람들이 앨리스 이야기를 정신분석이나 정치 비평의 이상한 영역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불평했지만, 앨리스 책은 이미 창조자인 루이스 캐럴의 손에서 멀리 떠나버린 뒤였다. 심지어 약 하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마약을 했을 때 눈앞에 보이는 비전을 그대로 묘사했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이런 소란들은 바로 이 책이 이미 걸작이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사이트를 통해서 내가 하려는 일은 앨리스 이야기라는 나무에서 뻗어나간 잔가지들을 탐색하는 일이다. 끝없는 복도에 늘어선 문 뒤를 살짝살짝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이 모험은 우리를 어떤 황당한 장소로 데려다 놓을지 모른다. 앨리스를 읽는 것은 무작위성, 우연성, 애매모호함의 세계 속에서 벌이는 흥미진진한 모험이다.


by Dormouse



참고자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모래의 책> (보르헤스 전집5, 황병하 옮김, 민음사)
"To Catch a Bandersnatch" by Mark Burstein
"Introduction to 'The Annotated Alice'" by Martin Gard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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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목록
+ <앨리스> 시리즈의 매력
+ <앨리스> 시리즈의 언어 유희
+ <가발을 쓴 말벌>

















[주1]모래의 책에 비견될 수 있을 만한 것이 앨리스 책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진정한 걸작들은 '모래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이 대표적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마치 '모래의 책'이 되기 위해 쓰여진 책 같다.



[주2]훌륭한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항상 이러한 "문 뒤의 서스펜스"를 제공해 왔다. 그러한 환상을 가장 먼저 구체적으로 구현해낸 사람은 아마도 우리에게 '초록색 벽문'을 보여준 H. G. 웰즈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다른 세계로 가는 문' 하면 항상 초록색 문을 떠올리곤 한다.

[주3]물론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줄거리는 체스 규칙을 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 논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형식적 규칙일 뿐이다. 형식적 규칙에 현실세계의 어떤 요소라도 '무작위적으로 ' 대입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줄거리는 (체스의 기보가 무한하듯!) 무작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