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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노이라트라는 인간(3)

“나는 빈의 학구적인 집안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이미 책이 가득 찬 선반과 찬장을 바라보며 자랐고, 거기서 받은 인상은 이후 평생 동안 내 곁에 머물렀다. 우리 집의 현관에는 책과 팸플릿이 꽉 들어차 있고 유리문이 달린 엄청나게 큰 책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천장까지 닿은 책 선반들은 거실과 아버지 서재의 사면 벽을 빼곡히 채웠다. 나중에는 나와 동생 방의 선반도 책으로 채워졌다.
나는 그 서재 안에 있는 책의 권수를 헤아리면서 어림수 구하는 법을 처음 익혔던 것 같다. 나는 선반의 개수와 선반 하나에—대부분 두 줄 깊이로—배열된 책의 권수를 세어, 합계가 총 1만 3천 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책들 전부가 다 내 차지였다. 나는 서재 전체를 마음껏 헤집고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제대로 글을 읽을 수 있게 되기 전에, 나는 그림과 사진이 있는 책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책들을 좋아하게 된 것은 서재의 배치 때문이기도 했다. 주로 그림과 지도가 수록된 커다란 책들은 손이 닿기 쉬운 책장 맨 아래칸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선반에서 그 책들을 꺼내어 펼치고, 아이들이 곧잘 그러듯이 바닥에 엎드려서 그림들을 구경했다.
나는 색채가 선명하고 모호하지 않게 그려진 그림들을 좋아했다. 직공들이 공구를 가지고 일하는 모습을 묘사한 책들이 있었는데, 나는 곧 그 주요 도판 속에 나오는 공구들이 실제 작업장에서 쓰이는 도구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부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거나 아무 것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는 그림들을 마주칠 때면 더더욱 신경이 거슬렸다. 나는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그림책들이 오류투성이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어떤 그림이 특별히 유익하다거나 모호하다거나 짜증난다는 말을 아버지한테 한 기억은 없다. 도판들은 의사소통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미적이거나 역사적인 관점에서만 논의되었다…아마 시각적 디테일에 대해 논하는 전통이 당시에는 부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오로지 책에만 파묻혀 생활했다고 여기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바깥 활동도 많이 했다. 우리 가족은 매년 몇 달씩을 시골에서—때로는 산간 지방에서—보냈기 때문에 나는 나무와 꽃, 나비와 애벌레, 소와 말, 손으로 만드는 갖가지 도구들, 시내와 연못에 익숙해졌다. 나는 작은 물레방아들을 직접 만들어 개울에 놓기도 했고, 한번은 역사책에 실린 그림을 보고 라인 강에 카이사르가 놓았던 것과 똑같은 다리를 짓기도 했다. 이 작은 구조물은 대단히 튼튼해서 (마른 땅 위에 놓은 다리이긴 했지만) 내가 그 위에 올라가도 끄떡없었다. 빈의 박물관들 역시 나의 시각적 성장 환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토 노이라트의 자전적 노트에서 발췌한 그의 어린 시절’, Otto Neurath, Empiricism and Sociology, 1973, 4-5p.)

오토 노이라트의 아버지 빌헬름 노이라트는 당대의 저명한 정치경제학자이자 사회 개혁가였고, 오토는 아버지가 지녔던 백과사전적 박식함과 개혁 의지를 고스란히 물려 받았습니다. 빌헬름 노이라트는 과잉 생산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산업을 (바로 국유화하지 않고) 정부 통제 하에 두거나 오너/경영자의 관리를 노동자 평의회의 관리로 대체한 범기업연합(pan-cartelism)을 제안한 바 있는데, 이는 훗날 그 아들이 구상한 ‘연합 사회주의(associational socialism)’ 모델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노이라트는 빈에서 철학, 수학, 물리학을, 베를린에서 역사학, 경제학, 철학을 공부하고 1906년 베를린에서 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데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키케로의 <의무론>과 고대 이집트의 비화폐 경제에 대한 것이었음을 보면 그의 경제/사회학적 상상력의 뿌리가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현물 경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 사상으로부터 자신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경제 모델을, 이집트의 상형 문자로부터 보편적인 시각 언어를 착안하게 된 것이죠.

1910년경 그는 빈에서 수학자 한스 한, 물리학자 필립 프랑크 등과 함께 에른스트 마흐, 피에르 뒤엠, 앙리 푸앵카레의 과학 사상을 주로 논하는 철학 토론 그룹을 만듭니다. 이 모임은 1929년 정식 출범하게 된 빈 학단(Vienna Circle)의 전신이 되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이 모임을 ‘제1 빈 학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1 빈 학단에 대한 설명은 <과학철학> 13-1호(2010)에 실린 고인석 선생의 논문 ‘빈 학단의 과학 사상’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이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마흐의 과학사상이 지배력을 행사하던 빈 대학에서 공부한 공통의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이들은 유태계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었다…한과 노이라트, 프랑크 등은 빈의 카페하우스에 모여서 학문과 사회를 논했다. 학문적 차원에서는 특히 당시 이론물리학과 수학, 논리학의 새로운 성과들이 이들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요 관심사에 실천적 의미의 사회주의 계몽운동이 있었던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63-64쪽)…제 1 빈 학단의 시기에는 ‘학문의 존재의미는 인간의 생존과 번영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마흐의 관념이 ‘정제된 학문을 통한 계몽, 혹은 사회적 삶의 고양’이라는 실천적 지향성의 원천으로 뚜렷이 남아 있었다.(71-72쪽)”

1910년대 초에 노이라트는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당시 전쟁 중이던 발칸 반도를 여행하며 전시 경제에 대한 여러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또 1차 대전 중에는 빈 중앙정부의 전쟁부 내에 전시경제와 관련된 부서를 만들 것을 건의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고, 이어 라이프치히에서 ‘독일전시경제박물관’의 관장을 지내며 나중에 빈 사회경제박물관에서 완성될 시각화 작업의 초기 단계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전시의 배급 경제에 대한 이런 연구와 경험은 그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대비되는) 사회주의적 ‘관리 경제(Verwaltungswirtschaft)’ 혹은 (화폐 경제와 대비되는) ‘현물 경제(Naturalwirtschaft)’ 모델을 완성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전시 경제를 통해 현물 경제로’라는 제목의 논문집 서문(1919)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글들은 자유 교환 경제의 시대가 끝나고 관리 경제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으며, 화폐 경제는 해체되어 철저히 조직된 현물 경제에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의거하고 있다. 아버지의 지적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나는 위기와 도탄에 빠진 전통적 경제 질서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자라났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듯한 모든 흐름에 주의를 집중했다…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세계 대전이 미래의 관리 경제를 창출할 것이라는 견해로 나를 이끌었다. 여기서는 모든 노동력과 물자가 전쟁 수행을 위해 중앙에서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질서로부터 (정치 권력을 요하는)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모든 인민을 위한 관리 경제에 다다를 수 있을 듯 보인다.” (Otto Neurath, Empiricism and Sociology, 1973, 1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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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 1867-1922)

흥미로운 부분은 그의 이러한 급진적 계획 경제 구상이 아에게(AEG)의 2세 경영자였던 발터 라테나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라테나우는 1차 대전 중 정부 전시물자국의 책임자로서 독일의 전시 경제를 지휘하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의 관리•분배 체계를 확립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라테나우가 지휘했던 전시 경제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유시장가격을 폐지하여 물가를 고정시키고 물자를 분배하는 한편, 합성질소흡착법, 인조견, 합성고무, (달팽이로 만든) 합성수지, (도토리로 만든) 커피 등 혁신적인 대체상품을 개발했습니다. 전시물자국은 원자재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24개 기업을 감독했고, 식량공급을 규제하고 분배하기 위한 특수 행정부서인 전시식량청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1]

사실 라테나우는 단순한 자본가로 치부될 수 없는 개혁적 사상가이자 문필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기에 바이트를 할애하여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제가 보기에는 노이라트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인 것 같습니다).[2] 그는 전시물자의 생산과 분배를 지휘했던 경험을 토대로,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산업의 국유화 대신) 경영주의 참여하에 산업을 국가가 통제하는 ‘산업자치제’를 제안했습니다. 피터 드러커는 라테나우가 1차 대전 초기 국가의 설계자로서 기적적인 일을 해냈다고 평가하면서도 ‘전체주의 경제학을 설교하고 다닌 최초의 인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3] 라테나우가 제안한 ‘산업자치제’는 빌헬름 노이라트가 제안했던 범기업연합과도 일맥상통하며 이 두 가지는 오토 노이라트의 계획 경제 모델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사실 독일은 비스마르크 이래로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정부가 경제에 깊숙이 간섭해 온 유구한 전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산업을 통제하고 물자를 분배하는 이런 식의 계획 경제는 우리도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에 대해 정승일 선생이 쓰신 은혜로운 프레시안 서평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서평은 제가 그때까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노이라트라는 인물의 관점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한국 역시 30년 동안이나 ‘계획-계산 경제’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즉 1962년부터 1992년까지 우리나라는 6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실행했다. 그 계획경제는 광범위한 ‘계산’과 예측을 동반했는데, 그러한 계획경제의 수립 과정에는 수학으로 무장한 경제학자들만이 아니라 중화학공업화의 현장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공과대학 출신의 엔지니어들 역시 테크노크라트로서 다수 참가하였다. 왜냐하면 철강과 자동차, 전자, 화학의 전략 산업 육성에 필요한 대규모 설비투자의 양적•수학적 규모 탐색과 그에 필요한 (경제적) 비용 계산 등을 위해서는 경제학자와 공학자의 양 축이 모두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이라트가 주목하는 점이 바로 이 점이다. 즉 계획경제의 계산 가능성은 교환가치(화폐가치로 측정된)를 단지 노동가치(가상적 화폐(virtual money)로 측정된)로 대체하는 것(랑에와 그 이후 후계자들이 주장한)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며, 실물가치(사용가치) 그 자체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1973년에 시작된 중화학공업화가 노이라트와 비슷한 관점에서, 즉 신고전파 경제학의 시장가격 계산, 화폐적 계산보다는 공학도 출신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주도하는 실물적 계산에 더욱 의존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추진했던 계획 경제는 그가 대동아전쟁기에 경험한 일제의 전시 경제 체제를 모델로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일제와 나치 독일이 채택한 전시 경제의 모델이 된 것은 바로 1928년경부터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경제 계획’이었죠. 또 부하린,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스탈린은 1차대전기 독일의 전시경제—국가자본주의—모델을 분명히 참조했습니다.

당시에도 노이라트가 주변 사람들에게 때로는 ‘사회주의자’로, 때로는 ‘자본가들의 친구’로 불리며 딱히 규정하기 힘든 인물로 평가되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과거의 계획 경제와 전시 경제 경험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새겨져 있는데요. 과연 여기서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실패로 판명 났거나 시대착오적인 전망이 아닐까요? 하지만 노이라트가 생각했던 계획 모델은,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계획을 격렬히 거부하고 모든 사회 단위의 수평적이고 느슨한 연합을 지향했다는 데 결정적 차이점이 있음을 지적해야 합니다(여기에 대해서는 <화폐 없는 사회는 가능하다>의 4장에 나와 있습니다.) 1918년 독일혁명이 터진 뒤, 그는 바이에른 지역에 세워진 혁명 정부에 합류하여 자신의 이런 사회화 구상을 현실에 옮기고자 시도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번 업데이트 때 다루게 될 것입니다.

(다음 업데이트는 아마도 몇 달 뒤가 될 듯합니다.)

 

  1. 이반 버렌드 지음, 이헌대/김흥종 옮김, <20세기 유럽경제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8, 76쪽.
  2. 그는 일명 ‘예술가 기업주’로서 산업 디자인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1907년 당시 “확실히 중앙집중적인 통제 하에 있고 중앙집중적인 조직을 갖고 있는 유럽 최대의 산업단위 결합체”였던 AEG는 디자인 컨설턴트로 페터 베렌스를 고용해서 공장 건물부터 기업 로고, 서식류, 제품, 광고 포스터까지 기업의 모든 활동과 관련된 디자인을 의뢰했고, 미스 반 데어 로에, 발터 그로피우스와도 협업하여 AEG의 디자인 정체성을 수립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라테나우는 외무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1922년 우익 광신자들에게 암살당했고 이는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3. 피터 드러커, <경제인의 종말> 이재규 옮김, 한국경제신문사, 2008, 424쪽.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간(2)

“오토 노이라트(1882-1945)는 20세기에 가장 인정을 못 받았던 천재 중 한 명이다. 그를 경탄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업적에 대해 개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많은 영역에서 개혁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통이 크고 쾌활한 성품이었으며 친구와 적을 동등한 정감으로 대한 것으로 유명하다…매우 설득력 있는 연설가이자 지칠 줄 모르는 조직자 노이라트는 특히 다양한 학제, 계층과 민족들 사이에 가교를 놓는 데 헌신했다… “모든 사람이 공동의 문화에 참여할 수 있고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들 사이의 심연에 다리가 놓이는 즉시 인간은 더욱 완전하게 이해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인간 발전기 노이라트처럼 경제 정신의 보급과 경계를 허무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단한 업적들이 인정을 받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에서 기술한 사상가들 중 어느 누구도 다방면에 박학다식한 노이라트만큼 기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없었고, 2차 대전 후 세계를 그렇게 잘 이해한 사람도 없었다. 그가 만약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한 문화의 영웅이 됐을 것이다…그가 관심을 두었던 그 방대한 학문적 영역을 볼 때, 어느 누구도 그가 산 세기에 그를 능가하지 못했다. 누가 과연 물리학, 수학, 논리학, 경제학, 사회학, 고대사, 정치학 이론, 독일문학사, 건축, 응용 그래픽 영역에서 진정한 연구를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헤르츨처럼 노이라트 또한 실천적 유토피아주의자였다. 그러나 그 씨앗의 결실은 다른 사람들이 거두었다. 성인 교육을 위해 그렇게 많이 노력한 그가 잊혀졌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분명 전문화의 희생양이었고 이것이 그의 백과사전주의를 조소하게 만드는 것이다. 빈 학파의 다른 어떤 학자도 그 집단적 업적을 노이라트만큼 훌륭히 해내지 못했다. 또한 어느 누구도 그렇게 당당히 통합적 사고로 오스트리아인의 재능을 구현한 사람은 없었다.”
(윌리엄 존스턴 지음, 김래현 외 옮김,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신사와 문화사의 재발견>, ‘오토 노이라트: 만능 천재의 사라짐’, 317-322쪽.)

“”오토 노이라트처럼 독특하게 대위법적인 저자를 독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그리고 자기가 알아낸 일부분을 전체로 착각함으로써 그를 오독하는 방법 역시 여러 가지다. 그의 다양한 활동 분야 중에서도 특히 경제에 대한 저작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조차, 사람들은 이를—또 그가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 시도한 것을—두고 그에게 서로 모순되는 딱지를 붙이곤 했다. 그는 ‘낭만주의자’이자 ‘광인’이었고, ‘공산주의자’이면서 ‘부르주아’였으며, ‘바보’인 동시에 ‘선지자’였다.”
(Thomas E. Uebel, ‘Introduction: Neurath’s Economics in Critical Context’ in Otto Neurath, Economic Writing Selection 1904-1945 (Springer, 2004), p. 1.)

오늘날 노이라트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조명되고 있습니다.

1. 논리실증주의 과학철학자
2. 아이소타입과 정보 디자인의 창시자
3. 사회주의 경제학자, 정책 기획자.

이 중 과학철학자로서의 노이라트에 대해서는 논리실증주의, 비엔나 서클, 통일과학운동에 대한 책과 글들을 통해 비교적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오늘날 픽토그램의 원형이 된 그림 언어 체계 ‘아이소타입’에 대해서도 디자인 분야에서 많은 책과 글이 나와 있죠.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 이론가/실천가로서 그의 면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부분입니다.

난점은, 그의 어느 한 측면만을 조명하면 그 한 가지 측면마저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는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소타입’은 그가 참여한 ‘붉은 빈’의 사회주의 실험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었으며, 언어의 통일을 통한 지식의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통일과학운동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 다층적인 면모를 한 사람의 저자가 종합적 시각으로 아울러 조망한 평전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과학철학 분야와 디자인 분야에 국한된 책들을 제외하면, 현재 그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책은 Vienna Circle Collection 시리즈에 포함된 (눈물 나게 비싼 T_T) 그의 저작집들입니다. 또 Vienna Circle Institute Yearbook의 한 권으로 각 분야의 여러 저자가 참여하여 펴낸 책이 하나 있는데, 리뷰를 보면 글들의 수준이 들쭉날쭉한 것 같습니다. 영어권에서 노이라트는 잊혀진 사상가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책을 (구글 번역기를 돌려 가며 독일 아마존을 수색한 결과에 따르면) 독일어권에서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혹시 제가 찾지 못한 그의 독일어 평전이 있다면 부디 알려 주십시오. 찾아도 읽지는 못할 테지만요.)

웹상에서 제가 찾은 자료 중 그의 사상 전반에 대해 가장 잘 정리된 글은 스탠포드 대학에서 만든 철학 사전의 ‘오토 노이라트’ 항목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가 올리는 글들은, 노이라트가 직접 쓴 글들과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의 존 오닐이 쓴 논문들을 제외하면 이 페이지의 정보에 크게 의존할 것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간(1)

<화폐 없는 세lifewithout계는 가능하다>는 여러 저자의 글들을 모은 책인데, 애석하게도 주요 편저자인 애니트라 넬슨의 글(1장과 11장)이 제일 딱딱하고 난해한 축에 속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들은 3장 해리 클리버의 글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원래 해리 클리버의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입말에서 탄생한 글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고, 그가 육성으로 토로하는 열정이 느껴집니다. (제가 느꼈다는 말이고, 그게 번역본에도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3장의 모태가 된 1993년의 인터뷰 원고는 그 번역본이 일찌감치 국내 인터넷에 돌아다녔고, 2002년 <자율평론>에도 소개된 바 있습니다.) 트윈 오크스 공동체와 스페인 스쿼터들의 사례를 소개한 9장과 10장도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글이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번역하는 과정에서 제게 가장 큰 자극을 주었던 글은, 바로 존 오닐이 쓴 4장이었습니다.

사실 이 글은 낯선 개념과 낯선 고유명사로 가득차 있어서 번역하기가 제일 골치 아팠습니다. (심지어 ‘화폐, 시장, 생태학’이라는 제목도 지루합니다. 실은 제목을 좀 더 재미있게 바꾸고 싶었지만 끝내 좋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편집자님도 뾰족한 대안이 없으셨던 듯.) 그런데도 이 글에 흥미를 느낀 것은 오로지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게 노이라트는, 20년 전 과학철학 수업 시간에–그러니까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칼 포퍼에 의해 반박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논리실증주의를 공부하면서 약 0.1초 동안 귓가에 머물고 간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 소개된 노이라트는 영판 다른 사람이더군요. 사회주의 계산 논쟁에 참여하고, 화폐 없는 현물 경제를 주장한 급진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데다, 실제로 사회주의 혁명에 참여하여 정책을 추진한 경력도 있더군요. 이거 금시초문이네. ‘실천적 맑시스트 과학철학자’라니 좀 섹시한데…그런데 이분께서 말씀하시는 ‘현물 경제’라는 게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생전 그런 걸 경험해 봤어야지 젠장… 하며 끙끙대고  있는데, 뒤에서 지나가던 배우자분께서 불쑥 물으셨습니다. ‘무슨 책을 하고 있길래 오토 노이라트가 나와?’

남편은 디자인 전문 편집자고, 저는 사회과학 출판사에서 일했던 연줄로 주로 정치/사회 쪽 책을 번역해 왔기 때문에 서로의 분야가 겹치는 일은 바람직하게도 전무합니다. 또 우리는 상대가 만드는 책에 대해 거의 소 닭 보듯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정말 희귀하죠.

들어본즉슨, 그 당시 배우자분은 오토 노이라트의 (세 번째) 부인 마리 노이라트가 쓴, ‘아이소타입’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분의 설명에 따르면, 디자인사에서 노이라트는 매우 중요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책은 이렇게 이쁘게 나왔고 transformer

(제목도 무려 ‘트랜스포머’. 이런 메카닉한 제목이라니.)

오토 노이라트가 마리 노이라트와 게르트 아른츠와의 협업으로 만들어 낸, 이렇게 아름다운 도표들이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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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자 저는 거의 성적인(…) 매력을 느꼈고, 이렇게 섹시한 두뇌의 소유자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사진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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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념)

 

혹자는 제가 이 지점에서 퀘스트를 종료했으리라 추측할지도 모르나… 만약 그랬다면 그런 불찰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거구의 대머리 아저씨에 대해 파기 시작하자, 호박이 넝쿨채로 주렁주렁 끝도 없이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딸려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lifewithout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 만들기 | 애니트라 넬슨, 프란스 티머만 (엮음) | 서해문집 | 2013년

4쪽 둘째 문단: 우리는 활동가와 학자들에게 흥미와 통찰을 주는 읽기 쉬운 책을 만들기로 했다. → 우리는 활동가와 학자들에게 흥미와 통찰을 주는 읽을 만한(readable) 책을 만들기로 했다.
(차마 ‘읽기 쉽다’고는 말할 수 없군요. 이 단어에서 배신감을 느끼신 독자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62쪽 역자 주: 마르크스의 가치 법칙은 자본주의 시장 생산과 교환을 지배하는 가장 기본적인 경제 원리로, 자본주의하에서 사용 가치가 ‘사회적 필요 노동’, 즉 사회 전체에서 어떤 상품을 집합적·평균적으로 생산하는 데 드는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법칙이다. → … 자본주의하에서 상품 가치가 ‘사회적 필요 노동’, 즉 사회 전체에서 어떤 상품을 집합적·평균적으로 생산하는 데 드는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법칙이다.

66쪽 인용문: 중앙집중적 계획은 사회주의 사회의 존재 방식이고 그 결정적 특징이며, 인간 의식이 마침내 경제를 그 목표–공산주의 사회 틀 안에서 인간의 완전한 해방–를 향해 경제를 종합하고 인도하는 데 마침내 성공하는 지점이다.

77쪽 둘째 문단: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관계의 국제적 확대’가 절대다수인 상황에서는 생활조건을 개선하기보다 오히려 비참해졌다고 맹비난해왔다. →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관계의 국제적 확대’가 세계인들 절대다수의 입장에서 볼 때 생활조건을 개선하기보다 오히려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맹비난해왔다.

111-112쪽: 생태적 전통에 반대하는 미제스와 하이에크 주장의 약점은 좀 더 보편적으로 사회주의와 관련이 있다. → 생태적 전통에 반대하는 미제스와 하이에크 주장의 약점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더 보편적인 유효성을 띤다.

112쪽:
빈 학의 핵심 중 한 명인 오토 노이라트다. → 빈 학의 핵심 중 한 명인 오토 노이라트다.

이 논쟁에는 흔히 상정되는 것보다 더 많은 모순이 존재한다. → 이 논쟁 흔히 상정되는 것처럼 그렇게 연속적이지 않다.

113쪽:
두 번째 논쟁은 경제 내 서로 다른 행위자들 가운데 지식이 산된 상태에서 계획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 두 번째 논쟁은 경제 내 서로 다른 행위자들 가운데 지식이 산된 상태에서 계획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고차적(higher order)’ 생산재와 관련된 합리적인 경제적 의사결정은, → 단순히 개인적 차원을 초월한 ‘고차적’ 생산재와 관련된 합리적인 경제적 의사결정은,

120쪽: 데카르트적 합리주의는 사회 내 지식의 분업, 숙련에 내재된 실용적 지식의 확산, 특히 국지적 시공간에 맞는 노하우를 인식하지 못한다. → 데카르트적 합리주의는, 사회 내의 지식이 분산되어 있으며 특히 국지적 시공간에 적용되는 실용적 지식이 숙련과 노하우에 내재된 채로 흩어져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121쪽: 물론 이 논쟁에서 사회주의 측에 대한 시각을 공유하는 이는 노이라트뿐만이 아니었다. → 물론 이 논쟁에서 사회주의 측에 대한 이런 시각을 공유하는 이는 노이라트뿐만이 아니었다.

123쪽: 노이라트의 모델에서 중요한 부분은 이 모델이 연합의 융성과 교환 관계의 융성 사이에 뚜렷한 구분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 노이라트의 모델에서 중요한 부분은 이 모델이 연합의 융성과 교환 관계의 융성 사이에 뚜렷한 구분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연합체란 가족, 지역 사회, 일터, 정당, 교회, 국제 사회와 국가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며, 개인은 복수의 연합체에 동시에 소속된다. 노이라트가 옹호하는 계획 경제에서는 계획 기능과 권력이 국가에 집중되지 않고 이런 복수의 중첩된 연합체들 사이에 분산된다. 저자는 오늘날 통용되는 ‘시민 사회’라는 말이 이런 연합체들과 민간의 시장 질서를 흐릿하게 통칭하는 개념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옮긴이]

124쪽 아래 인용문: 맨체스터 자유주의는… 공동체와 길드 운동을 백안시했다. → 맨체스터 자유주의[19세기 영국 맨체스터 학파가 주장한 극단적 자유방임주의–옮긴이]는… 공동체와 길드 운동을 백안시했다.

4장 전체: 사회주의화사회화
4장에서, 노이라트가 바이에른에서 추진한 socialisation의 번역을 놓고 ‘사회주의화’와 ‘사회화’ 사이를 한 일곱 번 정도 오가다가 결국 ‘사회주의화’로 했습니다만, 영 개운치 않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면 ‘사회화’는 ‘1)인간의 상호 작용 과정, 2)인간이 사회의 한 성원으로 생활하도록 기성세대에 동화함. 3) 사적인 존재나 소유를 공적인 존재나 소유로 바꾸어 감.’이라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사회화’는 세 번째 뜻인데, ‘사회주의화’로 번역한 것은 1) ‘사회화’의 여러가지 뜻이 혼동될 여지가 있고 2) 특히 이 글에서 ‘사회화’가 무엇의 사회화인지(예를 들어 ‘생산의 사회화’, ‘가사 노동의 사회화’ 등) 뚜렷이 명시되지 않은 채 범용적인 단어로 쓰여 더더욱 혼동의 여지가 있으며 3) 노이라트가 바이에른에서 ‘사회화’ 계획을 통해 사회주의를 수립하려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회화’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는 생각 쪽으로 기웁니다. 특히 126쪽 인용문과 그 아랫부분에서, ‘사회주의화 프로그램은 사회주의, 연대주의, 공산주의를 동시에 실현하려고 한다’는 내용을 보면 ‘socialisation’이 더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의미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0쪽: 쿤의 과학사회학 → 쿤의 이론으로 촉발된 과학사회학

131쪽: 이 문제에 대한 노이라트의 대응은 과학 언어를 (특히 물리학의 언어로) 통일하자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 이 문제에 대한 노이라트의 대응은 과학 언어의 통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물리주의(physicalism)를 옹호한 것이었다.
참고로, 존 오닐은 다른 글(‘Socialism, associations and the market’ 140쪽 주석1번)에서 이런 노이라트의 접근 방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민주화나 학제적 문제 해결은) 용어를 바꾸어서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과학을 민주화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보다도 이것은 과학자들의 주장을 시민들이 신뢰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을 유지하는 문제다. 그리고 과학자들 사이의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물리주의적 보편 언어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과학의 조율이란 특정한 사회 제도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성취다. 노이라트가 옹호하는 식의 과학 언어의 통일은 유효하지 않다. 그러나, 과학과 국제 과학 공동체 조직의 사회적 성취는 시장과 계획에 대한 논쟁의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과학 공동체는) 기존 시장 사회 내에서 지식과 활동을 비시장적으로 조정하는 여러 사례 중 하나를 제시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