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숨는 곳

옛날에 의뢰받아 작성했지만 출간되지 않은 책의 검토서 하나 더 올립니다.

남자들이 숨는 곳 Where Men Hide

twitchell_where-men-hide지은이: 제임스 트위첼(James B. Twitchell), 켄 로스(Ken Ross, 사진 촬영)
하드커버, 264페이지
출판사: Columbia University Press
출간 연월일: 2006년 2월 24일

목차

1. 사슴 사냥 캠프
2. 권투 링의 치욕과 명예
3. 프리메이슨 지부: 형제단에 입회하다
4. 남자의 취미 공간: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모형 기차
5. 자기만의 방: 남자의 가장 좋은 친구 두 가지(개와 TV, 주로 개)
6. 차고: 자동차와 캘린더 걸
7. 미국의 이발소: “다음 신사분!”
8. 야구장 덕아웃: 씹고 뱉고 싸우자
9. 집 바깥으로: 나의 자동차, 나의 인생
10. 안락의자: 훤히 보이는 곳에 숨기
11. 스트립 클럽: 추파 뒤에 숨기
12. “나는 여기가 좋더라고”: 남자의 식사법
13. 작업장의 해머 타임
14. 일터에서: 사무실에서 숨기
15. 하나님을 위한 남자들의 연대: 초대형 교회와 ‘프라미스 키퍼(아버지 학교)’ 운동

내용 소개 및 의견

이 책은 20세기 미국 문화 속에서 남자들의 공간을 조명한 책이다. 남자 혼자서 틀어박히는 공간(작업장, 차고, 자동차, 취미 공간, 안락의자, 사무 공간)과, 남자 여럿이서 모이는 공간들(사슴 사냥 시즌에 열리는 사슴 캠프, 이발소, 프리메이슨 집회소, 스트립 클럽, 대형 교회)을 문학작품이나 역사적 일화 등 다양한 문화 코드와 이론을 동원하여, 그중에서도 특히 광고나 카탈로그 등 미국의 상업적 물질문화를 통해서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서문과 결론에서 이 책의 제목이 <남자가 숨는 곳(Where Men hide)>이지만 실은 <남자가 숨었던 곳(Where Men hid)>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남자들의 공간’ 중 상당수─이발소, 프리메이슨 집회소, 사슴 사냥 캠프 등─는 미국에서 주로 20세기 초-중반까지 풍미했다가 현재는 거의 과거의 유물로 사라져 가고 있는 공간들이다. 저자는 결론에서 이렇게 ‘남자들만의 분리된 공간’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현상에 대해, 페미니즘의 시각을 채용하여 남녀 및 인종의 차별이 사라져 가는 변화의 부산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 전반에는 성 혁명이 일어난 1960년대 이전 미국의 ‘좋았던 황금기’─안정된 가정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남녀가 유별했으며 ‘우리 아버지 형님들이 핀업 걸을 가슴에 품고 전쟁터에 나갔던 시기’─에 대한 향수가 어쩔 수 없이 뚝뚝 묻어난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을 다시 붙인다면, <남자가 숨는 곳>이 아니라 <미국 남자들이 숨었던 곳을 통해 엿보는 20세기─그중에서도 특히 20세기 초-중반의─미국의 물질문화>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특정 시대 미국의 물질문화(광고 문구, 소비 상품, TV 프로그램, 대중 잡지 등)에 강하게 고착되어 있으며, 그 시대를 직접 살았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공감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문화적 코드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책 자체는 재미있다. 일단 저자가 글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썼으며 흥미로운 일화들(예를 들어 디트로이트의 빅3 자동차 회사에서는 사업상 거래를 우리나라 사람이 룸살롱 가듯 주로 스트립 클럽에서 하며, 세 회사에서 각각 잘 가는 단골 스트립 클럽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등의)도 심심치 않게 소개한다. 또 군데군데 남성들의 문화와 심리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도 엿보인다.

저자인 제임스 트위첼은 플로리다 대학 영문학 및 광고학 교수이다. 낭만주의 문학을 가르쳐 오다 10여 년 전부터 상업문화, 특히 마케팅과 광고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오고 있다. 지은 책으로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 <럭셔리 신드롬> 등이 있다.

발췌 번역

서론

만약 남자들에게 어디에 숨어서 지내느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미친 사람 아니냐는 표정을 지으면서 “뭐, 내가 숨는다고요?” 하고 되물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질문을 여자들에게 던진다면 그들은 바로 그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

내가 애초부터 남자들이 숨는 동굴을 연구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내 주된 본업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낭만주의 시를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업 문화, 그중에서도 광고를 연구하는 것이 내 부업이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이 역설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충분히 말이 된다. 나는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들을 가르치지만, 내가 진짜로 흥미를 느끼는 것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광고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마샬 맥루한이 정신 나간 소리도 많이 했지만, “언젠가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광고야말로 우리 시대 모든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가장 풍부하고도 가장 믿음직하게 반영한 사료임을 발견할 것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정곡을 찔렀다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내가 이 주제로 흘러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1990년대가 끝날 무렵, 광고계에는 작은 공황이 일었다. 젊은 남성들이 별안간 광고를 보지 않게 된 것이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그들은 갑자기 닐슨 리서치[마케팅 조사기관]의 레이더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하워드 스턴[저질스러운 입담으로 유명한 미국의 DJ] 같은 것 말고는 라디오도 듣지 않았으며 <맥심>이나 <디테일스> 같은 남성 잡지를 빼고는 아무 것도 읽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애드버타이징 에이지> 같은 업계 매체만이 아니라 전국 신문과 공중파 TV에서도 머릿기사로 다루어졌다.

남성들은 언제나 광고업자들이 찾아내기가 힘든 소구 대상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수퍼볼에 붙는 광고 단가가 30초당 2백만 달러를 훌쩍 뛰어 넘고, 텔레비전에는 프로레슬링과 배스 낚시 프로그램이 그렇게 넘쳐 나는 것이다. 익스트림 스포츠가 옛날의 게임들을 시야 저편으로 밀어내고, 스노우보드 같은 운동이 올림픽 이벤트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마 그 다음 주자는 페인트볼[서바이벌 게임]이 될 것이다. 그것은 헤비메탈과 랩이 MTV의 주류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면도 크림, 맥주, SUV 따위를 팔아야 하는 입장이라면, 팔기 전에 우선 그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남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 남자들은 찾아내기가 힘들고, 광고를 전하는 동안 한 곳에 붙들어 두기란 더더욱 힘들다. 아들 가진 부모들에게 가서 물어보라.

젊은 남자들이 광고업자의 시야에서는 숨어 버리더라도, 나는 그들을 수업 시간에─적어도 잠시 동안은─확실히 붙잡아 놓을 수 있다. 나는 남학생들에게 수업 시간이 아닐 때는 주로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리고 그중 많은 이들이 고속 인터넷이 설치된 기숙사 방이나 동아리방이나 게임방으로 돌아가서 복잡한 비디오게임을 한다는 것을 알고 흥미가 돋았다. 물론 이 세대는 오락실용 아케이드 게임을 하면서 컸지만, 오늘날의 게임도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으며 또한 전 세계에 게이머들이 있다. 온라인 포커 게임이 젊은 아이들 사이에서 큰 유행이어서 그들은 나보다도 도박 하는 것을 더 잘 안다. 그들은 또 인터넷 속으로도 숨는다. 음악을 다운로드하거나 눈요기꺼리 포르노를 보기도 하고 인터넷 메신저 같은 새로운 방식으로 친구들과 의사소통하기도 한다. 많은 아이들은 휴대 전화를 가지고 다니면서 한쪽은 귀에 꽂고 손가락으로는 항상 문자를 보낸다. 결국 그들은 그곳에 잘 있었다. 다만 1980년대처럼 타임워너와 비아컴과 뉴스 코퍼레이션[셋 다 거대 미디어 그룹임]의 교차 지점에 있지 않을 뿐이다. ESPN, <필드 앤 스트림[Field and Stream, 사냥 및 낚시 잡지]>, ‘아웃도어 라이프 네트워크[Outdoor Life Network, 역시 사냥과 낚시를 주로 다루는 케이블 채널]’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며 다시 데리고 올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했다.

사라지는 남자들의 역사(상업 문화를 이끌어 온 프로그래머들은 남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때가 1960년대부터라고 보고 있다)에 대해서 한창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머리를 자를 일이 생겼다. 내가 간 곳은 집 근처의 작은 대학촌에 자리한 ‘콜린스’라는 유니섹스 미용실이었다. 그 창문에는 ‘남녀 모두를 위한 헤어스타일링’이라는 문구를 써 붙여 놓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너덜너덜해진 <에스콰이어> 1999년 3월호를 집어 들었다. 잡지를 뒤적이는데, 뉴저지의 한 사진작가가 ‘남자들의 방[Men’s Room─남자화장실이라는 뜻도 있음]’이라는 제목으로 찍어 게재한 화보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우리는 어디에 머무는가: 남자들이 여자 없이 서식하는 곳들의 초상”이라는 헤드라인이 붙어 있었다(Montali, 52p.). 나는 그 이미지들과 거기에 붙은 복잡한 설명에 이끌렸다.

나는 그 사진들이 사람을 끌어당긴다는 것을 곧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머리를 자를 때는 안경을 벗기 때문에, 글씨가 잘 안 보여서 잡지를 코앞에까지 끌어당겨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러고 있자니, 항상 내 머리를 잘라 주는 데이빗도 자르던 것을 멈추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도 흥미가 동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우리는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우리 바로 옆 자리에서 한 여자가 머리를 염색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본 것은 아쉽게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수영복 화보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고에서 모형 자동차들이 경주하는 모습, 텅 빈 권투 링, 모형 기차 세트 따위에 불과했지만, 우리 둘은 그러한 이미지가 너무나 익숙했고 기묘하게도 공범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발소 문화는 나의 세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변화를 겼었다. 내가 아직 꼬마였을 때, 버몬트 주 벌링턴 읍내의 뱅크 스트리트 이발소는 항상 잡담 소리로 시끄러웠다. 이발사들은 자기들끼리나 손님들하고나 편안하고도 친숙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발소에서 대기하다가 내 차례가 와도 건너뛰고 제리 머롤라 씨가 일을 다 끝마칠 때까지 기다릴라 치면, 다른 이발사들의 악의 없는 놀림을 감수해야만 한다. 다른 이발사들은 “아 그래, 네 머리는 제리만 잘라 줄 수 있지.” 하고 나를 놀려 먹으면서 모두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예약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이발소에는 집에서는 구경도 못할 잡지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다 1960년대부터 여자들이 이발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어고시[Argosy, 대중소설 잡지, SF작가들의 등단 무대이기도 했음.]>와 <폴리스 가제트[The Police Gazette, 싸구려 소설 잡지로, 속옷 차림을 한 여성들의 그림을 실었는데 이것이 핀업 걸의 원조가 되었다.]>는 자취를 감추었다. 머리를 자르는 것은 사적인 일이 되었다. 가위 대신에 플라스틱 날이 달린 전동 클리퍼가 등장했다. 그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여자가 머리를 잘라 줄 확률이 높아졌으니 잘 된 거 아냐.

그래서, 현대적인 방식에 따라 데이빗과 나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이 사진에서 본 것이 남자들이 가는 곳에 대한, 그리고 그들이 가진 물건들에 대한 일종의 로드맵임을 깨달았다. 이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평화로움을 느꼈다. 나는 이 공간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 자신이 그 일부라고 느꼈다. 나는 궁금했다. 이 이미지들을 면밀히 읽어 냄으로써 남자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이 이미지들 속에서 남성성의 내러티브를 형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텍스트(윽, 이건 영문학 선생 말투인 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또는 요즘 학계의 유행어를 써서, 남성성이 구성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형성하는 것 중 일부를 이 사진들 속에서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사진작가인 켄 로스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남자들의 방’이라고 이름 붙인 남자들의 공간을 찍은 사진들을 좀 더 볼 수 있겠느냐고 부탁하였다. 그는 내게 그중 몇 장을 보내 주고 나중에 다시 몇 장을 더 보내 주었는데, 그것을 보고 나는 그가 많은 물건들을 한데 아우르는 공간의 위상학을 창조해 내었음을 깨달았다. 한 공간에서 보이는 모티프와 상징들이 다른 이미지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냈고, 특정한 종류의 시각적 이미지들이 다양한 내러티브를 관통하며, 말하자면 화성[<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그 화성]을 관통하면서 자리를 바꿔가며 등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를 다 보고 나자, 나는 일종의 황량함을, 어두컴컴하고 심지어는 불길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헤밍웨이와 맥주 광고가 뭐라고 뇌까리건 간에, 남자의 공간은 확실히 해피밀은 아니다. 화성은 정말로 외롭고 기묘하게 삭막한 곳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를 휴식의 순간으로, 남자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기 위해 찾아들어가는 구석으로, 죽치고 앉아 뭘 만지작거리거나 빈둥거리는 장소로, (여자들을 공공연히 적대해서가 아니라 남자들에게는 그저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여자들에게 불친절한 휴게실로 본다면, 그곳은 충분히 즐거운 공간이 된다.

7. 미국의 이발소: “다음 신사분!”

우리 부모님 대에서부터 내려온 이발소 농담이 있는데 이런 것이다. 한 농부가 머리를 자르러 읍내에 나갔다. 그는 참을성 있게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이발사가 “다음 신사분!” 하자, 농부는 펄쩍 뛰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빨리? 내가 다음인 줄 알았는데?”

이 농담을 음미하려면 이발소의 평등주의적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발소는 모든 남자들이─거의 모든 남자라고 하자─동등하게 대우받는 곳이다. 물론 어느 특정한 이발사를 원한다면 차례를 건너뛰고 더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이발소에서 취하는 표준적인 행동은 이렇다(아니 이러했다). 이발소에 간다. 차례를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잡담도 좀 한다. 머리를 자른다. 돈을 내고 나온다. 불평할 일이 없다. 남자들이 숨는 다른 많은 공간들과 마찬가지로, 이발소에도 이 과정을 확립하는 입문 의례가 있다. 소년이 처음으로 머리를 자르는 것은 엄마에게서 분리되는 중요한 순간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중요한 행사이다. 스페인어 문화권에서는 이 행사를 가리키는 숙어─“이발소에서는 울면 안 된다(En la barberia no se llora)”─까지 있다.

요즘에는 이발소에서 보내는 시간이 기다리는 데 15분, 머리 자르는 데 15분 정도면 되지만, 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곳에서 족히 한 시간은 넘게 보냈다. 이발과 면도라는 두 가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면도는 이발소에 가는 중요한 이유였다. 지금은 에이즈라는 유령 때문에 면도가 이발소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이발소라는 공간 전체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것은 (시가 바처럼) 남자들이 방치해서도 아니고 (프리메이슨처럼) 여자들이 개입해서도 아니다. 이발소가 사라진 것은 주로 일회용 면도기 때문이다. 1880년대의 남성 인구가 5천만 명에 이발사의 수는 약 4만 5천 명이었는데, 오늘날에 소비자의 수는 그 6배가 증가한 반면 이발사의 수는 제자리걸음이다. 이러한 쇠퇴는 특히 2차 대전 이후로 더더욱 급격해 졌다. 1950년대에는 총 28만 천 개의 이발소가 있었던 반면, 현재 그 수는 5만 5천 개로 줄었다(Steten, p.42).

옆 페이지의 이미지는 이발소가 역사적으로 쇠락의 일로를 걷고 있는 와중에 찍은 것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흔적과 그것이 현재 쇠퇴하게 된 이유를 둘 다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남자들이 머리를 자르는 장소라는 의미로서 ‘이발소’라고 부르는 것은, 한때는 시가, 위스키, 도색 잡지,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술이 소비되는 시끌벅적한 소굴이었다. 사진 속 정면에 걸린 거울 옆에 이발사가 써 붙여 놓은 메모를 읽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현대성으로의 변화를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업자와 고객 양자는 서비스가 수행되는 동안 흡연이 금지되어 있음.”이라고 쓰여 있다. 간단한 메모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공식적인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이는 이발소들의 과거 모습을 희화화한 것이기도 하다. 남자들은 집에서 시가를 피울 수 없으면(혹은 술을 마실 수 없으면) 그것을 이발소로 들고 왔다.

이발소와 선술집(saloon)의 공통점은 바로 ‘병’이었다. 금주법 시대에 이발소는 가끔씩 무허가 술집 역할도 했다. 그때에는 알코올을 주 원료로 한 모발용 약품을 (이발사 자리 앞쪽 찬장에 쌓아 놓고) 색깔 있는 병에 담아 팔았는데, 규제 대상이었던 에틸알코올을 뒷방에 통으로 쌓아 두고 거기서 병에 덜어다 몰래 팔기도 했다. 실제로 요즘에 애프터 셰이브로 쓰이는 ‘베이 럼’에는 그 시대의 밀주 진과 비슷한 마개가 달려 있는데, 이는 머리에 바르는 토닉과 몸속에 부어 넣는 토닉과의 연관성을 상기시킨다. 금주법 시대는 처방전 없이 매매하는 특허 의약품, 이른바 만병통치약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진통제라는 명목으로 알코올과 아편제를 운반하는 주된 수단이었다. ‘시폼(Sea Foam)’, ‘브릴리언타인(Brilliantine)’, ‘타이거 럽(Tiger Rub)’ 같이 이발사가 조제한 약품들 덕분에 남자들은 알콜 음료의 유통과 판매를 금지한 수정헌법 18조를 교묘히 피해 갈 수 있었다. 실제로 이발소 모발용 토닉의 알코올 도수는 특허 의약품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서 여자들이 ‘부인병에 효험이 있는’ 리디아 E. 핑크햄의 ‘식물 복합제’를 사는 동안에, 남편들은 이발소에서 ‘플로리다 워터’를 보충하고 있었다.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갱단 조직원들이 면도를 하던 도중에 살해당했는지 의문을 품어 보아야 한다. 그건 그곳이 그들의 비즈니스 장소였기 때문이다. 뒷방은 술병 공장이고 앞방은 남자들이 득시글한 이발소라니 이 얼마나 찰떡궁합인가.

 

리처드 호프스태터–미국의 반지성주의

이 책이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오래 전에 제안했다가 빠꾸 먹은 검토서 올립니다. 2009년에 쓴 것입니다.

untitled미국의 반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

지은이: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
출간연도: 1962년
분량: 434쪽
출판사: Vintage Books

목차

1부 서론
    1장 우리 시대의 반지성주의
    2장 지식인을 백안시하는 경향에 대해
2부 가슴의 종교
    3장 복음주의의 기풍
    4장 복음주의와 신앙 부흥 운동
    5장 모더니티에 대한 반감
3부 민주주의의 정치
    6장 젠틀맨 계층의 쇠퇴
    7장 개혁 세력의 운명
    8장 전문가 집단의 부상
4부 실용 중심의 문화
    9장 기업가와 지식인
    10장 자기 계발 및 영성 개발 서적
    11장 반지성주의 테마의 변종들
5부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
    12장 학교와 교사
    13장 ‘생활 적응(Life Adjustment)’ 운동
    14장 어린이와 세계
6부 결론
    15장 소외와 순응의 지식인
감사의 말
찾아보기

내용 요약

이 책에서 말하는 ‘반지성주의’란 지식인과 지적 활동을 백안시·적대시하는 사회적 경향을 말한다. 저자는 먼저 이 주제를 다루게 된 계기인 1950년대의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고, 여러 가지 맥락에서 반지성주의적 태도가 드러난 연설문, 의사록, 인터뷰, 기사 등 1차 자료들을 차례로 소개한다.(1장) 이들 사례를 종합하며 저자는, 미국에는 지식인이 허세에 차 있고 대중을 기만하며 남성적이지 못한데다 속물적이고, 나아가 비도덕적이고 위험하다는 고정관념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고정관념에 따르면 평범한 사람이 살면서 몸으로 체득한 상식과 윤리야말로 전문가나 식자들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즉 분석적이고 보편적인 ‘지성(intellect)’을 배격하고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슬기(intelligence)’를 중시하는 것이 미국의 풍토이다. (이를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이 바로 미국의 영웅으로 받들어진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다.)

미국 건국 초기만 해도 청교도 성직자와 헌법 제정자(Founding Fathers)라는 두 지식인 집단의 연합이 사회적 권력을 행사하며 지적·정치적 전통의 기초를 세웠다. 그러나 1820년대 이후부터 서부 개척, 산업 발전, 평등주의 부상 등의 사회 경제적 변화로 인해 건국 초기의 공화 질서가 해체되었다. 전통적 명문 계층은 세련된 문화를 영위하며 명맥을 유지했지만 그 사회적 영향력은 대폭 축소되었고, 그와 더불어 비판적이거나 창조적인 정신도 잃었다.(15장)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들이 시대를 호령하고 비즈니스 논리가 거침없이 통용된 19세기의 도금 시대(Gilded Age)는 ‘나약한’ 지식인과 ‘쓰잘데기 없는’ 학교 교육에 대한 경멸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사회가 복잡해지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공식 교육을 받은 전문가의 지식을 여러 분야에서 필요로 하게 되자(특히 뉴딜 정책이 시행되면서, 지식인들은 전문가 집단으로서 정부 정책에 참여하여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지식인에 대한 비웃음은 두려움과 분노로 바뀌게 된다. 또 이데올로그로서 지식인의 비판적, 진보적 특성 때문에 우익들은 전통적으로 지식인을 적대시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미국 반지성주의의 깊숙한 곳에는 모더니티 자체에 대한 반동이 숨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5장) 즉 1차대전 이후 미국에 몰아닥친 변화–세계시민주의와 다윈 진화론의 유입, 미국 고립주의의 종말, 전통적 자본주의의 (대공황으로) 붕괴와 중앙 집중화된 복지 국가로의 전환, 막대한 전쟁 부담 등–를 거부하고, 대륙으로 떨어져 고립된 채 촌락 사회가 온존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뒷받침하며 산업 자본주의가 제재 없이 활개 쳤던 19세기의 미국으로 회귀하려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 사회에서 반지성주의의 모태가 되거나 희생양이 된 분야를 하나씩 역사적으로 검토한다. 우선 18세기 중후반~19세기에 미국을 휩쓸었고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은 반지성주의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3-4장) 초창기의 청교도 성직자들은 지식인 계층이었지만, 18세기 중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청교도 시대가 끝나고 복음주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운동을 주도한 전도사들은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았었으며, 기존 성직자들을 ‘교활하고 냉혈한 위선자 집단’으로 매도하고 “성경 외에는 책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호전적인 반지성주의 운동을 벌였다. 문명과 교육에서 소외된 남서부 벽촌의 주민들을 최대한 많이, 빨리 전도하려면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고 요란한 통성기도에 의존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던 것도 있다. 남북전쟁 이후에는 도시 인구가 폭발하면서 드와이트 무디, 빌리 선데이, 빌리 그레이엄 등 대도시를 무대로 전국적 성공을 거둔 스타 전도사들이 출현하는데, 이들은 신문에 광고를 내고 교회가 아닌 대형 강당에서 집회를 여는 식으로 복음주의에 비즈니스 마인드를 결합했고, 서커스에 나오는 거인을 도어맨으로 고용하고 설교 중에 옷을 벗어젖히거나 비속어를 내뱉는 등 쇼와 비슷한 요소를 가미했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에는 앞서 말한 모더니즘 유입의 반작용으로 종교적 근본주의가 오히려 더더욱 전투적이고 완고해지며(1920년대에는 학교에서의 진화론 교육을 반대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진다.), 다양성을 용납지 않고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파악하는 미국 우익 세계관의 기저를 이루게 된다. 개신교 근본주의와 연합하여 모더니티에 반기를 들었다는 면에서 가톨릭도 예외는 아니었다. 복음주의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정신적 전통은, 학습된 인공적 이성보다도 신이 주신 직관적 “지혜”를 선호하는 원시주의(primitivism)다. 이는 애초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련되었지만 타락한’ 유럽 문명과 스스로를 구분하면서 세워졌다는 데서도 기인한다.

복음주의와 원시주의가 미국인의 의식에서 반지성주의의 뿌리를 이룬다면, 반지성주의가 미국인 의식의 전면으로 떠오른 것은 미국이 비즈니스 패권이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9장) 비즈니스와 지식인은 근본적으로 서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을 뿐더러, 개척지에서 맨손으로 사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거칠고 공격적인 남성적 마인드와 과감한 의사결정, 기회를 놓치지 않는 순발력이 미덕이 되고, 지적이고 문화적인 것은 ‘유약하고 여성적’이라고 배척하는 풍토가 심화된 것이다.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문화를 애호하는 부유한 (특히 동부 해안 지역) 상인 계층이 지식인을 후원하는 전통이 이어졌지만, 비즈니스가 서부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새로 유입된 신흥 자본가들은 반지성, 반문화 운동에 가장 큰 동력을 제공한 세력이 되었다. 이들 중 다수는 공식 교육 없이 맨손으로 자수성가하여 성공 신화를 양산한 장본인들이었는데, 이들의 이상을 잘 반영한 문헌이 19세기부터 출현한, 강한 종교색을 띤 자기계발(self-help) 서적들이다.(10장) 원래 비즈니스에 열심히 임하는 것이야말로 신을 섬기는 방법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청교도 논리인데, 19세기 말부터는 미국 중산층 기질의 세속화와 더불어 이 관계가 역전되어 신앙이 세속적 성공의 도구가 된다. 이런 부류의 ‘종교 실용서’에는, 타고난 재능보다 인성을 강조하고, 사업 경영에 쓸모없는 고등 교육보다 현장에서 부딪치며 배우는 경험을 중시하며, “내향적 기질보다는 외향적 기질이, 비판적 지성보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기업가들의 마인드가 담겨 있다. 20세기에 들어 비즈니스 규모가 커지면서 기업도 전문적인 관리·기술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고, 대학도 이에 부응하여 경영대학원(business school)을 설립하는 등 좀 더 실용적인 직업 교육을 도입하게 된다. 하지만 기업 경영 현장의 변화와는 별도로 지성과 재능보다 인성과 순응을 선호하는 기업가들의 마인드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지식인과 그들의 전문 지식을 적대시하는 경향은 비단 기업가들뿐만이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심지어 노동 운동) 사이에서도 보편적이었다.(11장) 미국 농민들은 계급감정과 실용주의의 영향으로 젠틀맨 계층의 부농과 전문가들이 개발한 새로운 농법을 불신하고 이를 받아들이기를 오랫동안 꺼렸다. 또 지식인들은 초창기 노동 운동의 태동과 노동자들의 의식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면서도 이후 노조와 사회주의 정당 내에서 소외되었다. 이는 지식인들이 노동 운동을 통해 사회주의나 개혁 등 더 큰 목표를 추구했던 반면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기업가와 유사한 자수성가형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 서로 지향점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먹물에 찌들지 않은 순수하고 강인한 노동자’의 이상이나 조직 내의 잭슨식 평등주의 이상과 충돌을 빚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잭슨식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로 대표되는, 미국 사회 특유의 평등주의적 풍토는 미국 정치에서 반지성주의를 규정한 주된 힘이었다.(6장) 처음 미국을 건국한 지도자들은 부유한 지식인(젠틀맨) 계층이었지만, 평등주의적 욕구는 아주 초창기부터 지식인 내지 전문 정치인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잭슨식 민주주의’란 1824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앤드류 잭슨(지지자들은 그를 책이 아니라 숲과 들판에서 배운 지혜를 지닌 농부의 아들, 보통 사람들의 영웅으로 찬양했다)으로부터 유래한 정치 이념으로, 중앙 집권과 상류층을 배격하며, 정부 활동은 기본적으로 특별히 교육받은 전문가가 아니라 상식을 지닌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이후로 전통적 젠틀맨 계층은 정치 무대에서 소외되었고, 공직은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하게 되었으며, 의회에서는 위스키와 단검이 난무하게 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젠틀맨 가문의 지식인 개혁가들이 공무원을 시험을 통해 뽑으려는 공직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정치 기득권과 충돌을 빚게 된다(7장). 개혁가들은 기존 정치인들이 무식하고 천박하며 부패했다고 비난한 데 비해, 정치는 남성의 전유물이므로 유약하고 여성적인 지식인들은 거칠고 힘든 정치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기존 정치인들의 주장이었다. 이런 고정관념을 쇄신한 사람이 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그는 부유한 집안 태생에 하버드 출신이었지만 개인적인 남성적 매력과 서부에서의 경험을 내세워 강하고 결단력 있는 인상을 줌으로써 1890년대에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미국은 혁신주의(progressivism) 시대로 들어섰고, 급속한 경제 사회 발전에 부응하여 정부 기능도 복잡해지면서 지식인 전문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8장) 그 최초의 사례가 1892년 위스콘신 대학과 주 정부가 서로 긴밀한 정책 협력 관계를 맺은 ‘위스콘신 모델’이었고, 이 모델은 기득권의 거센 저항을 받았지만 이후 뉴딜 정책을 추진한 두뇌 집단(brain trust)의 원형이 되었다. 지식인이 드디어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서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는 다른 종류의 ‘실용적’ 전문 지식으로 무장한 지식인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대중의 선망과 동시에 경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추세는 전쟁 수행을 위해 고급 두뇌 수요가 더더욱 높아진 2차대전기에 절정에 이르렀다가, 전쟁 이후 대대적인 역풍을 맞게 된다. 지식인들의 유례없는 지지를 한 몸에 받았던 대통령 후보 애들레이 스티븐슨을 대상으로 지식인을 급진주의, 국가 반역, 여성적 유약함 등과 연관시키는 반지성주의적 공격이 행해졌고, 그가 결국 참패한 것이다. 반면 존 F. 케네디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후 최초로, 지성과 문화에 대한 존중을 진취적이고 실용적인 미덕과 결합시키는 데 성공한 대통령이었다.

반지성주의적 신념이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겨진 분야가 바로 미국의 교육이다. 미국 학교 교육의 실패–교사의 저임금과 낮은 사회적 지위, 노후하고 게토화된 학교, 운동선수에 대한 과도한 숭배, 학업 성취도의 전반적 저하, 성적이 뛰어난 학생의 방치–가 대부분 여기에 기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미국에서 교사는 애초부터 존경받는 직업이 못 되었다.(12장) 마을에서는 교사 월급을 충분히 줄 여력이 없었고, 공직자의 봉급이 너무 높으면 안 된다는 평등주의적 의식이 작용해서 대우도 변변치 않았다. 그래서 교사는 다른 (남자다운) 직업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잠시 거쳐 가거나 어쩔 수 없이 눌러앉는 자리로 여겨졌고, 자격 미달인 자들이 교사가 되어 학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여성 교사가 대규모로 충원되면서 이런 악순환은 해결되는 듯했지만, 교직의 여초 현상 때문에 교사의 지위가 더욱 하락하는 부작용이 생겼고 20세기 들어 학교와 학생 수가 크게 증가하면서 인력이 부족해지자 교사의 질을 담보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예로부터도 지식 그 자체의 추구나 지적 능력의 개발은 미국 교육의 목표가 아니었지만, 특히 1870년대 이후 중등 의무 교육이 시행되고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의 자녀들까지 가세해 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공부에 관심 없는 대다수 평균 이하의 학생들에게 고교 교육의 포커스를 맞추어 대학 진학보다는 시민 의식 함양과 실용적 직업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신념이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이 신념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예가 1940-1950년대에 시행된 ‘Life Adjustment’ 운동으로, 이를테면 외국어나 수학, 고전 같은 학구적 과목이 대거 폐지되고 운전이나 가사처럼 학생들의 흥미와 필요에 부응하는 실용적인 과목이 개설되었다.(13장) 이 운동은 너그럽고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이상을 추구했지만, 매스미디어가 부추기는 소비문화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간을 길러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기도 했다. 존 듀이의 교육 철학은 이런 새로운 교육 운동을 떠받친 지적 기둥 중 하나였으나,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듀이의 의도와 달리 단순화되고 왜곡되었다.(14장)

 

발췌 번역

1. 우리 시대의 반지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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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미국 역사에서 좀 더 오래된 과거의 특정 측면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실은 1950년대의 정치적·지적 상황에 대응하여 착상하게 된 것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웬만해서 듣기 힘들었던 ‘반지성주의’라는 말이, 이 시기를 거치면서 비방을 되받아치고 서로를 매도하는 익숙한 단어로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과거에도 미국의 지식인들은 지성을 경시하는 국가적 경향 때문에 좌절과 쓰라림을 감내해야 했지만, 지식인 공동체 외부에서 이런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이 이토록 많았거나, 이런 식의 자기비판이 전국 규모의 운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시기를 상기하기란 힘들다.

이 나라에서 비판적 지성의 가치가 폭락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킨 주범은 대체로 매카시즘이었다. 물론 매카시의 부단한 공격은 지식인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지만–그는 더 큰 사냥감을 쫓고 있었다–지식인들은 그의 총구가 향하는 방향에 서 있었고, 그의 추종자들은 지식인이 쓰러질 때에 더더욱 환호하는 듯했다. 지식인과 대학을 향한 그의 돌격을 본받아, 하급 종교재판관들이 전국에서 비슷한 행태를 벌였다. 이윽고 매카시의 비난 공세로 인해 극심한 악의와 재미없는 머저리짓이 횡행하는 분위기에서 1952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각각 지성과 무지를 대표하는 후보가 서로 극명한 대조를 이룬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한 쪽은 비범한 지성과 스타일을 갖춘 정치인 애들레이 스티븐슨으로, 역사상 지식인에게 그만큼 어필한 사람이 드물었다. 한편 그 반대쪽은 진부한 수준의 지성에 자기 의견이 그다지 분명치 않으며 닉슨이라는 입맛 안 맞는 러닝메이트에게 끌려 다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었다. 그의 선거 운동 분위기는 아이젠하워 자신보다는 그의 러닝메이트와 당 내 매카시 파벌의 손에 좌지우지되었다.

지식인들 자신과 그 비판 세력 모두는, 아이젠하워의 압도적 승리를 미국이 지식인을 거부했다는 지표로서 받아들였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아이젠하워의 승리로 “오랫동안 의심해 왔던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의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 넓고도 불건전한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면서 짐짓 우려하는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서 슐레진저 주니어는 선거 직후 발표한 신랄한 글에서, 지식인이 “지난 한 세대 동안 몰랐던 생소한 상황”에 놓였다고 말했다. 지식인이 대체로 이해와 존경을 누렸던 20년간의 민주당 집권기가 끝나고, 친기업 세력이 권좌로 복귀하면서 “기업 패권의 거의 정해진 수순”으로 “천박화”를 끌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제 ‘달걀머리(egghead)’, 별종으로 취급되어 쫓겨난 지식인들은 자신들을 거의 필요로 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당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고, 소득세부터 진주만 공격에 이르는 모든 문제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기업가들 사이에서 반지성주의는 오래 전부터 반유대주의와 같은 것이었다…오늘날 미국 사회에서….지식인은 쫓겨나고 있다.”고 슐레진저는 말했다.

새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이 모든 우려는 충분히 이유 있는 것이 되었다. 이미 트루먼 재임기에도 지식인들은 지방 정치인들의 그늘에 가려졌지만, 스티븐슨의 말마따나 카 딜러(Car Dealer)가 뉴딜러(New Dealer)를 몰아냄으로써 지식인과 그들의 가치에 대한 거부에 결정타를 먹인 듯했다. 이제는 순수 학문에 대한 찰스 E. 윌슨의 공격, 아이젠하워의 서부 소설 취향, 지식인은 말 많고 허세 부리는 사람이라는 아이젠하워의 관념 등이 나라를 논하는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에 이런 사회 분위기는 전환점에 이르렀다. 매카시 광풍이 공화당 대통령과 마찰을 빚다가 드디어 수명을 다해 사그라진 것이다.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 매카시는 고립되고 비난받고 결국 쪼그라들었다. 마침내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하면서, 국가 위신을 의식적으로 재검토하는 물결에 주기적으로 휩쓸리는 미국 대중의 경향이 다시금 꿈틀거리기에 이르렀다. 스푸트니크는 미국의 국가적 자부심에 충격 그 이상이었다. 이로써 학교 시스템과 미국 사회 전체에 퍼진 반지성주의의 결과에 엄청난 이목이 쏠리게 되었다. 지식인에 대한 국가적 혐오는 단순한 망신거리가 아니라 졸지에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국가에 불충하는 교사들을 염려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낮은 월급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날로 심해지는 안보 강박관념 때문에 연구 사기가 저하된다고 우려해 온 과학자들의 말에 갑자기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 교육의 느슨함을 질타하는 목소리는 그전까지 소수 교육 비평가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는 텔레비전 대중 잡지, 기업가, 과학자, 정치가, 장성, 대학 총장들까지 나서서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고, 이는 곧 국가적 자성의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물론 이런 소동으로 곧바로 자경단 기질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미국 사회의 한 흐름으로 존재해 온 반지성주의가 말끔히 걷힌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가장 직접적인 영향권인 교육 분야에서도, 사람들의 열정은 좀 더 많은 지식인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스푸트니크를 생산해 내는 쪽으로 주로 쏠리는 듯했고, 우수한 아이들을 냉전의 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식의 수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확연히 변했다. 1952년만 해도 반지성주의라는 유령에게 괴롭힘 당하는 사람은 지식인들뿐이었지만, 1958년에는 이것이 중요하고 심지어 위험한 국가적 약점이라는 인식이 대다수의 생각 있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오늘날[케네디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1962년–옮긴이]에는 1950년대의 정치 문화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매카시즘과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지식인이 공적 영역에서 몰락했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면, 이제 정부가 하버드 교수들과 로즈 장학생 출신 학자들을 다시금 그렇게 적대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식인이 정치나 정부의 성공을 가로막는 장해물이 되었다는 의혹이 있기는 하지만, 새 대통령이 사상에 관심을 갖고 지식인을 존중하며, 국정 운영에서 이런 존중을 의례적 제스처를 통해 드러내고, 지식인을 가까이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듣기를 즐기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 기간 신중히 가려 뽑은 출중한 인재들을 데리고 행정부를 출범시켰기에 이런 의혹은 곧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한편 행정부가 이런 인재를 영입함으로써 국정을 완전히 쇄신할 수 있다는 과도한 자만심에 부풀어 있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현실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현재 우리는 지식인이 과장된 당파주의나 자기 연민 없이 반지성주의를 논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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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교육 논쟁이 정치적으로 끓어오르면서,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는 미국에 대한 자기 평가의 중심을 이루는 어구가 되었다. 이 말은 뚜렷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어느새 우리의 일상 언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고, 달갑잖은 여러 현상을 가리키는 데 흔히 쓰이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말을 듣게 된 사람들은 반지성주의가 삶의 이런 저런 영역에 새롭게 출현한 현상 혹은 최근에 만들어진 환경의 산물일 것이라고 짐작하곤 한다.(이는 미국 지식인들의 역사 관념이 한숨이 나올 정도로 얄팍한 데다, 현대인이 일종의 묵시록의 그늘 밑에서 너무 오래 살아온 탓에 지식인들이 사회 변화의 조그만 소용돌이도 마치 커다란 격동인 양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문헌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1950년대를 강타한 반지성주의라는 흐름은 전혀 새롭지 않고 익히 친숙한 것이었다. 이 나라에서 반지성주의는 1950년대에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의 반지성주의는 우리의 국가 정체성보다도 더 오래되었고, 긴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 배경을 검토해 보면 미국에서 지식인에 대한 인식이 꾸준히 하락한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땅에 떨어진 것도 아니며, 주기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우리 시대 지식인들에게 쏟아진 분노는 지식인의 지위가 낮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현저히 상승한 증거임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체계적으로 알지 못하며, 이 주제에 대해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한 고찰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국의 지식인과 이 나라 사이의 오랜 불화에 대해 많은 문헌이 쓰였지만, 이런 문헌들은 지식인의 눈으로 본 미국에 대해 주로 다루고 있으며 미국의 눈으로 본 지성과 지식인에 대해서는 가끔씩 어렴풋이만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의견

내가 이 책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2003-2004년쯤이었는데, 출판평론가 표정훈의 홈페이지(현재 궁리닷컴 홈페이지)를 통해서였다. 여기서 그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소개했다. “호프스태터의 1963년 저작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 (퓰리쳐상 수상작)는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국 사회, 미국 지성의 풍토, 미국적인 것, 미국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첩경이다. 반지성주의야말로 미국 문화,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지식인에 대한 비합리적일 정도의 경멸과 반감이 미국 사회의 저류에 흐르고 있다.”

마침 부시 행정부에서 한창 흘러나오던 비이성적인 언행에 질리고–저런 웃기지도 않는 사고방식이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 세계 최강대국을 지배하게 된 것인지–의아했던 차라, 이 책이 그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읽어본 다음에는 정말 그 의문이 상당히 풀렸다.)

이 책의 내용은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했고, (지식인을 변호하려다 보니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이 엿보이긴 하지만)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니만큼 가치도 충분히 공인되어 있다.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장밋빛 기대나 비트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이 책이 쓰인 시대를 짐작케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놀랍게도 거의 낡아 보이지 않는다.

시장성에 대해서는 요즘 상황이 어려운 만큼 자신 있게 말하기 힘들다. 조선 왕조 이래로 엘리트 문관이 패권을 쥐어 온 한국 사회에서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는 다소 낯선 것이기도 하다. 부시 행정부 시기에 번역본이 나왔다면 아마 좀 더 시의성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한 마디 보태자면, 비전문가인 독자 입장에서도 생각보다 읽기에 지루하지 않은 책이었다. 미국사에서 우리에게 덜 알려졌던 새롭고 흥미로운 사실과 통찰이 가득 들어있고, 영화나 책에서 단편적으로 봤던 미국 사회 단면(예를 들어 미국 틴에이저 영화 속의 학교에서는 왜 운동선수와 치어걸이 짱이고 우등생이 찐따 취급을 받는지, 왜 배관공 같은 육체노동자들이 심심찮게 섹시 아이콘으로 묘사되는지, ‘라떼 리버럴’이라는 말이 왜 욕이 되는지, 스테로이드를 맞은 조증 환자가 쓴 것 같은 미국산 자기 계발 서적이라든지, 왜 아직까지도 지구가 6천 년 전에 창조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무시 못 할 세력을 떨치고 있는지, 한국 교회 풍경과 겹쳐져 왠지 낯설지 않은 미국의 대형 부흥 집회 장면이라든지)의 배경이 이해되면서 마치 퍼즐을 맞추는 듯한 재미가 있다. 문장은 호흡이 긴 만연체지만 난삽하지 않고 위트와 격조가 있다.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간(3)

“나는 빈의 학구적인 집안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이미 책이 가득 찬 선반과 찬장을 바라보며 자랐고, 거기서 받은 인상은 이후 평생 동안 내 곁에 머물렀다. 우리 집의 현관에는 책과 팸플릿이 꽉 들어차 있고 유리문이 달린 엄청나게 큰 책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천장까지 닿은 책 선반들은 거실과 아버지 서재의 사면 벽을 빼곡히 채웠다. 나중에는 나와 동생 방의 선반도 책으로 채워졌다.
나는 그 서재 안에 있는 책의 권수를 헤아리면서 어림수 구하는 법을 처음 익혔던 것 같다. 나는 선반의 개수와 선반 하나에—대부분 두 줄 깊이로—배열된 책의 권수를 세어, 합계가 총 1만 3천 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책들 전부가 다 내 차지였다. 나는 서재 전체를 마음껏 헤집고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제대로 글을 읽을 수 있게 되기 전에, 나는 그림과 사진이 있는 책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책들을 좋아하게 된 것은 서재의 배치 때문이기도 했다. 주로 그림과 지도가 수록된 커다란 책들은 손이 닿기 쉬운 책장 맨 아래칸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선반에서 그 책들을 꺼내어 펼치고, 아이들이 곧잘 그러듯이 바닥에 엎드려서 그림들을 구경했다.
나는 색채가 선명하고 모호하지 않게 그려진 그림들을 좋아했다. 직공들이 공구를 가지고 일하는 모습을 묘사한 책들이 있었는데, 나는 곧 그 주요 도판 속에 나오는 공구들이 실제 작업장에서 쓰이는 도구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부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거나 아무 것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는 그림들을 마주칠 때면 더더욱 신경이 거슬렸다. 나는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그림책들이 오류투성이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어떤 그림이 특별히 유익하다거나 모호하다거나 짜증난다는 말을 아버지한테 한 기억은 없다. 도판들은 의사소통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미적이거나 역사적인 관점에서만 논의되었다…아마 시각적 디테일에 대해 논하는 전통이 당시에는 부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오로지 책에만 파묻혀 생활했다고 여기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바깥 활동도 많이 했다. 우리 가족은 매년 몇 달씩을 시골에서—때로는 산간 지방에서—보냈기 때문에 나는 나무와 꽃, 나비와 애벌레, 소와 말, 손으로 만드는 갖가지 도구들, 시내와 연못에 익숙해졌다. 나는 작은 물레방아들을 직접 만들어 개울에 놓기도 했고, 한번은 역사책에 실린 그림을 보고 라인 강에 카이사르가 놓았던 것과 똑같은 다리를 짓기도 했다. 이 작은 구조물은 대단히 튼튼해서 (마른 땅 위에 놓은 다리이긴 했지만) 내가 그 위에 올라가도 끄떡없었다. 빈의 박물관들 역시 나의 시각적 성장 환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토 노이라트의 자전적 노트에서 발췌한 그의 어린 시절’, Otto Neurath, Empiricism and Sociology, 1973, 4-5p.)

오토 노이라트의 아버지 빌헬름 노이라트는 당대의 저명한 정치경제학자이자 사회 개혁가였고, 오토는 아버지가 지녔던 백과사전적 박식함과 개혁 의지를 고스란히 물려 받았습니다. 빌헬름 노이라트는 과잉 생산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산업을 (바로 국유화하지 않고) 정부 통제 하에 두거나 오너/경영자의 관리를 노동자 평의회의 관리로 대체한 범기업연합(pan-cartelism)을 제안한 바 있는데, 이는 훗날 그 아들이 구상한 ‘연합 사회주의(associational socialism)’ 모델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노이라트는 빈에서 철학, 수학, 물리학을, 베를린에서 역사학, 경제학, 철학을 공부하고 1906년 베를린에서 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데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키케로의 <의무론>과 고대 이집트의 비화폐 경제에 대한 것이었음을 보면 그의 경제/사회학적 상상력의 뿌리가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현물 경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 사상으로부터 자신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경제 모델을, 이집트의 상형 문자로부터 보편적인 시각 언어를 착안하게 된 것이죠.

1910년경 그는 빈에서 수학자 한스 한, 물리학자 필립 프랑크 등과 함께 에른스트 마흐, 피에르 뒤엠, 앙리 푸앵카레의 과학 사상을 주로 논하는 철학 토론 그룹을 만듭니다. 이 모임은 1929년 정식 출범하게 된 빈 학단(Vienna Circle)의 전신이 되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이 모임을 ‘제1 빈 학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1 빈 학단에 대한 설명은 <과학철학> 13-1호(2010)에 실린 고인석 선생의 논문 ‘빈 학단의 과학 사상’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이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마흐의 과학사상이 지배력을 행사하던 빈 대학에서 공부한 공통의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이들은 유태계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었다…한과 노이라트, 프랑크 등은 빈의 카페하우스에 모여서 학문과 사회를 논했다. 학문적 차원에서는 특히 당시 이론물리학과 수학, 논리학의 새로운 성과들이 이들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요 관심사에 실천적 의미의 사회주의 계몽운동이 있었던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63-64쪽)…제 1 빈 학단의 시기에는 ‘학문의 존재의미는 인간의 생존과 번영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마흐의 관념이 ‘정제된 학문을 통한 계몽, 혹은 사회적 삶의 고양’이라는 실천적 지향성의 원천으로 뚜렷이 남아 있었다.(71-72쪽)”

1910년대 초에 노이라트는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당시 전쟁 중이던 발칸 반도를 여행하며 전시 경제에 대한 여러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또 1차 대전 중에는 빈 중앙정부의 전쟁부 내에 전시경제와 관련된 부서를 만들 것을 건의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고, 이어 라이프치히에서 ‘독일전시경제박물관’의 관장을 지내며 나중에 빈 사회경제박물관에서 완성될 시각화 작업의 초기 단계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전시의 배급 경제에 대한 이런 연구와 경험은 그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대비되는) 사회주의적 ‘관리 경제(Verwaltungswirtschaft)’ 혹은 (화폐 경제와 대비되는) ‘현물 경제(Naturalwirtschaft)’ 모델을 완성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전시 경제를 통해 현물 경제로’라는 제목의 논문집 서문(1919)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글들은 자유 교환 경제의 시대가 끝나고 관리 경제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으며, 화폐 경제는 해체되어 철저히 조직된 현물 경제에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의거하고 있다. 아버지의 지적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나는 위기와 도탄에 빠진 전통적 경제 질서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자라났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듯한 모든 흐름에 주의를 집중했다…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세계 대전이 미래의 관리 경제를 창출할 것이라는 견해로 나를 이끌었다. 여기서는 모든 노동력과 물자가 전쟁 수행을 위해 중앙에서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질서로부터 (정치 권력을 요하는)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모든 인민을 위한 관리 경제에 다다를 수 있을 듯 보인다.” (Otto Neurath, Empiricism and Sociology, 1973, 1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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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 1867-1922)

흥미로운 부분은 그의 이러한 급진적 계획 경제 구상이 아에게(AEG)의 2세 경영자였던 발터 라테나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라테나우는 1차 대전 중 정부 전시물자국의 책임자로서 독일의 전시 경제를 지휘하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의 관리•분배 체계를 확립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라테나우가 지휘했던 전시 경제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유시장가격을 폐지하여 물가를 고정시키고 물자를 분배하는 한편, 합성질소흡착법, 인조견, 합성고무, (달팽이로 만든) 합성수지, (도토리로 만든) 커피 등 혁신적인 대체상품을 개발했습니다. 전시물자국은 원자재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24개 기업을 감독했고, 식량공급을 규제하고 분배하기 위한 특수 행정부서인 전시식량청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1]

사실 라테나우는 단순한 자본가로 치부될 수 없는 개혁적 사상가이자 문필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기에 바이트를 할애하여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제가 보기에는 노이라트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인 것 같습니다).[2] 그는 전시물자의 생산과 분배를 지휘했던 경험을 토대로,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산업의 국유화 대신) 경영주의 참여하에 산업을 국가가 통제하는 ‘산업자치제’를 제안했습니다. 피터 드러커는 라테나우가 1차 대전 초기 국가의 설계자로서 기적적인 일을 해냈다고 평가하면서도 ‘전체주의 경제학을 설교하고 다닌 최초의 인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3] 라테나우가 제안한 ‘산업자치제’는 빌헬름 노이라트가 제안했던 범기업연합과도 일맥상통하며 이 두 가지는 오토 노이라트의 계획 경제 모델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사실 독일은 비스마르크 이래로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정부가 경제에 깊숙이 간섭해 온 유구한 전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산업을 통제하고 물자를 분배하는 이런 식의 계획 경제는 우리도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에 대해 정승일 선생이 쓰신 은혜로운 프레시안 서평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서평은 제가 그때까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노이라트라는 인물의 관점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한국 역시 30년 동안이나 ‘계획-계산 경제’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즉 1962년부터 1992년까지 우리나라는 6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실행했다. 그 계획경제는 광범위한 ‘계산’과 예측을 동반했는데, 그러한 계획경제의 수립 과정에는 수학으로 무장한 경제학자들만이 아니라 중화학공업화의 현장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공과대학 출신의 엔지니어들 역시 테크노크라트로서 다수 참가하였다. 왜냐하면 철강과 자동차, 전자, 화학의 전략 산업 육성에 필요한 대규모 설비투자의 양적•수학적 규모 탐색과 그에 필요한 (경제적) 비용 계산 등을 위해서는 경제학자와 공학자의 양 축이 모두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이라트가 주목하는 점이 바로 이 점이다. 즉 계획경제의 계산 가능성은 교환가치(화폐가치로 측정된)를 단지 노동가치(가상적 화폐(virtual money)로 측정된)로 대체하는 것(랑에와 그 이후 후계자들이 주장한)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며, 실물가치(사용가치) 그 자체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1973년에 시작된 중화학공업화가 노이라트와 비슷한 관점에서, 즉 신고전파 경제학의 시장가격 계산, 화폐적 계산보다는 공학도 출신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주도하는 실물적 계산에 더욱 의존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추진했던 계획 경제는 그가 대동아전쟁기에 경험한 일제의 전시 경제 체제를 모델로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일제와 나치 독일이 채택한 전시 경제의 모델이 된 것은 바로 1928년경부터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경제 계획’이었죠. 또 부하린,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스탈린은 1차대전기 독일의 전시경제—국가자본주의—모델을 분명히 참조했습니다.

당시에도 노이라트가 주변 사람들에게 때로는 ‘사회주의자’로, 때로는 ‘자본가들의 친구’로 불리며 딱히 규정하기 힘든 인물로 평가되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과거의 계획 경제와 전시 경제 경험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새겨져 있는데요. 과연 여기서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실패로 판명 났거나 시대착오적인 전망이 아닐까요? 하지만 노이라트가 생각했던 계획 모델은,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계획을 격렬히 거부하고 모든 사회 단위의 수평적이고 느슨한 연합을 지향했다는 데 결정적 차이점이 있음을 지적해야 합니다(여기에 대해서는 <화폐 없는 사회는 가능하다>의 4장에 나와 있습니다.) 1918년 독일혁명이 터진 뒤, 그는 바이에른 지역에 세워진 혁명 정부에 합류하여 자신의 이런 사회화 구상을 현실에 옮기고자 시도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번 업데이트 때 다루게 될 것입니다.

(다음 업데이트는 아마도 몇 달 뒤가 될 듯합니다.)

 

  1. 이반 버렌드 지음, 이헌대/김흥종 옮김, <20세기 유럽경제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8, 76쪽.
  2. 그는 일명 ‘예술가 기업주’로서 산업 디자인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1907년 당시 “확실히 중앙집중적인 통제 하에 있고 중앙집중적인 조직을 갖고 있는 유럽 최대의 산업단위 결합체”였던 AEG는 디자인 컨설턴트로 페터 베렌스를 고용해서 공장 건물부터 기업 로고, 서식류, 제품, 광고 포스터까지 기업의 모든 활동과 관련된 디자인을 의뢰했고, 미스 반 데어 로에, 발터 그로피우스와도 협업하여 AEG의 디자인 정체성을 수립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라테나우는 외무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1922년 우익 광신자들에게 암살당했고 이는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3. 피터 드러커, <경제인의 종말> 이재규 옮김, 한국경제신문사, 2008, 424쪽.

 

‘번역과 말’: 토머스 드 퀸시와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cc* 워크룸 총서 ‘제안들’ 출간 기념으로 2014년 2월 26일 북소사이어티에서 열린 ‘번역과 말’, 세 번째 행사 때 발표한 원고를 여기 올립니다.

8994207368_1안녕하세요. 토머스 드 퀸시의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을 번역한 유나영입니다. 먼저 바쁘신 중에 귀한 시간 내어, 미세 먼지를 뚫고…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중에는 이 책을 읽으신 분도 있고 아직 못 읽으신 분도 계실 텐데, 편의상 읽지 않으셨다고 가정하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버벅거릴 게 분명해서 원고를 적어왔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 소개를 잠깐 드리면, 저는 원래 사회과학 출판사 편집자 출신으로 정치/사회 분야 책을 주로 번역해 왔습니다. 문학 번역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책을 의뢰 받고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토머스 드 퀸시 전공자도 아니고 또 영문학 전공자도 아니며, 그전까지 제가 드 퀸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보르헤스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19세기 작가죠. 그중에서도 드 퀸시는 당대의 손꼽히는 스타일리스트로 이 사람의 문장은 현란한 장광설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글은 흔히 소용돌이나 미로에 비유되곤 하죠.6744508

그래서 저에게는 뛰어넘어야 할 높은 벽, 큰 도전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작품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번역하는 과정은, 물론 힘들었지만, 일체의 다른 오락거리가 머리에 전혀 안 떠오를 정도로 흥미진진했습니다. 일하다가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솟아서 잠깐 머리 좀 식혀야지 하고 텔레비전 보다가도, ‘아니 내가 재밌는 걸 놔두고 이 지루한 걸 왜 보고 있지?’ 하고 그냥 꺼버리고선 다시 일하고.. 그랬습니다.

토머스 드 퀸시는 19세기 전반기에 영국에서 활동한 작가로, 소설도 몇 편 썼지만 그보다 에세이스트로 유명합니다. 국내에는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혹은 <어느 영국인 아편중독자의 고백>)을 통해서 소개되어 있는데요. 실제로 토머스 드 퀸시가 당대에 문필가로 명성을 얻은 것도 이 <아편쟁이의 고백>을 통해서였고, 영미권에서도 주로 ‘아편쟁이(Opium-eater)’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드 퀸시는 다양한 정기 간행물에 기고하는 필자로서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고—말년에 편집한 저작 선집이 14권짜리였으니까요.—또 대단히 광범위한 소재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아편쟁이의 고백> 같은 자서전적인 글도 많이 썼지만, 아주 많은 정치 평론과 시사 평론을 썼고, 콜리지와 워즈워스에 대한 그의 평론은 영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철학 특히 칸트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역사, 종교, 그리스와 라틴 고전에 대한 해박한 글들도 썼고, 외국 문학 작품의 번역도 했고, 폭력적이고 어두컴컴한 고딕 로맨스 소설도 몇 편 썼고, 심지어 리카도의 가치 이론에 대해 다룬 정치경제학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백과사전적인 방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고요. 이 책만 해도 고전 인용이 굉장히 많이 나오죠.18332180

당대의 살인 사건에 대한 관심은 토머스 드 퀸시의 이런 여러 관심사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이 책의 테마가 된 존 윌리엄스의 연쇄 살인 사건은 드 퀸시가 거의 병적으로 집착했던 소재였습니다. 이는 1811년, 아일랜드인 선원 존 윌리엄스가 런던 이스트엔드의 래트클리프 하이웨이에서 12일 간격으로 두 일가족을 잔혹하게 몰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잭 더 리퍼가 출현하기 이전에 영국에서 일어난 가장 기억할 만한 연쇄 살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피해자가 매춘부나 부랑자가 아니라 평범한 서민이었고, 길거리 뒷골목이 아닌 자기 집안에서 살해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영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영국인의 집은 그의 성이다’라는 격언이 있죠. 이는 그 굳건한 믿음을 완전히 깨부순 사건이었습니다. 살인범인 존 윌리엄스는 범행 현장에 흘리고 달아난 흉기가 증거가 되어 검거되었고, 판결이 나기 전에 감방 안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법에 따라 가슴에 말뚝이 박힌 채 도심의 사거리 밑에 매장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1811년 당시 드 퀸시는 스물 여섯 살 청년이었습니다. 드 퀸시의 글 중에서 윌리엄스 사건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바로 이 책에 첫 번째로 실린 ‘맥베스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이 글이 발표된 때가 윌리엄스 사건이 있은 지 12년이 흐른 1823년, 드 퀸시가 서른 여덟 살 때입니다. 자, 그 다음으로 나오는 글이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이죠. 이 글을 <블랙우즈 매거진>이라는 잡지에 처음 발표한 게 1827년, 드 퀸시가 마흔 두 살 때입니다. 이 글은 살인 사건을 예술적으로 감상하는 이른바 ‘살인 감상 협회’라는 가상의 협회에서 주최한 가상의 강연문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요. 이 강연의 제목이 ‘예술로서의 살인에 대한 윌리엄스 기념 강연’입니다. 하지만 윌리엄스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짤막하게만 들어가고요, 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살인 사건들을 풍자를 섞어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으로 1839년, 드 퀸시가 쉰 네 살 때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에 대한 두 번째 글’을 <블랙우즈 매거진>에 발표합니다. 이 글은 앞 글의 강연자였던 이 ‘살인 감상 협회’의 회장이 <블랙우즈 매거진> 편집장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요. 인도에서 ‘서그 암살단’이라는 대규모 강도 집단이 검거되어서 그 정체를 드러낸 것을 경축하여 ‘살인 감상 협회’에서 열었던 기념 만찬을 회고하는 내용입니다.16038383

자, 그 다음에 나오는 가장 긴 글,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에 대한 후기’, 이것을 쓴 것이 1854년, 드 퀸시가 예순 아홉 살 때입니다. 죽음을 불과 5년 남겨 놓고 있을 때죠. 이때야 비로소 드 퀸시는 윌리엄스 살인 사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깁니다. 이 글에서 그는, 그로부터 43년 전 살인범 윌리엄스가 밟았던 길을 마치 르포 작가처럼, 혹은 스릴러 소설 작가처럼 한 발 한 발 숨가쁘게 뒤쫓아 갑니다. 마지막으로, 생전에 발표되지 않은 세 편의 짧은 수고는, 각각 드 퀸시가 1825년(마흔 살) 1828년(마흔 세 살) 1844년(쉰 아홉 살) 때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드 퀸시가 청년 시절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평생에 걸쳐 써 나간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읽으면, 이 모든 글들이 마치 일주일 간격으로 연재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건 정말 집요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이 잔혹한 살인 사건에 집착했을까요? 우선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들 수 있습니다. 19세기 당시의 영국에는 이미 잔혹한 살인 사건에 열광하는 대중들이 있었고 이들의 수요에 맞춘 옐로 저널리즘과 선정적인 범죄 소설과 연극들이 존재했습니다. 어떤 소설은 시리즈로 매주 연재해 가며 출간되었는데 주마다 4만 부씩이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13607141드 퀸시 자신도 이런 시류에 한몫 했습니다. 드 퀸시는 <웨스트몰랜드 가제트>라는 신문의 편집장을 잠시 지낸 적이 있는데요. 이때 신문 지면을 살인 사건의 재판 보고서, 자살, 강간, 아편, 이상하고 기이한 사건 소식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예를 들면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발표하고 불과 몇 달 뒤에, ‘살인범의 시체를 전기 충격으로 되살리는 실험’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싣기도 했습니다. 한 글에서 드 퀸시는 그것을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살인 사건을 다루는 이유는) 첫 번째는 이것들이 흥미롭기 때문이고, 둘째는 교육받지 못한 계층에게 사회적 의무를 가르치기 위해서이고, 셋째는 이것이 우리 사회의 윤리적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별로 설득력 있는 변명은 아니죠.

드 퀸시의 살인 에세이 또한 고급 문학(high literature)의 탈을 쓰고 있지만 현학적인 고전 인용과 젠체하는 문체를 걷어 내고 보면 당시의 이런 싸구려 범죄 소설이나 선정적 신문 보도와 공통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유행했던 범죄 소설의 조류는 범죄자를 사회 모순의 희생양이자 전복적 영웅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정치적 알레고리를 띠고 있었고, 한 발 더 나아가 사법 개혁을 촉구하기 위해 집필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 퀸시는 살인범의 동기에 대한 합리적 분석이나, 살인범의 개인사와 내면이나, 그를 범죄자로 만든 사회 구조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11369911

그러면 드 퀸시가 관심 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살인 그 자체의 순수한 미적 가치였죠. 드 퀸시가 찬미한 윌리엄스의 예술성은 바로 “과잉과 낭비”에 있었습니다. 또 19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도래한 가차 없는 시간 규율 속에서, 한 순간을 낚아채어 공포의 순간으로 영구히 박제하는 능력에 있었습니다. 한 글에서 드 퀸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 비극을 주재하는 힘은 죽음이다. 위대한 죽음의 한 순간을 그 순간에 영구히 얼어붙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 조각과 그리스 비극의 미학적 특성이다.” 그것을 생생히 보여주는 한 예가 라오콘 상입니다. 아폴로 신전의 사제 라오콘이 커다란 뱀에 물려 죽는 순간을 장엄하게 묘사한 조각이죠. 여기에는 그리스 비극의 미적 이상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 이는 드 퀸시가 심취해 있었던 칸트 철학의 숭고미(sublime) 개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감동받지만 무섭고 두려운 것을 보고도 감동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깎아지른 듯한 절벽, 뜨거운 용암이 분출하는 화산, 바닥이 없을 것 같은 검푸른 바다와 광막한 우주…. 이런 압도적이고 무시무시한 것들에도 우리는 매료됩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 두려운 대상이 우리에게 직접 해를 끼치지 않을 만큼 멀찍이 있어야만 합니다.) 드 퀸시는 살인이라는 무시무시한 행위도 안전한 거리에서 멀찍이 놓고 봤을 때는 우리 마음에 미적 감흥을 일으킨다고 한 것입니다. (자, 폭풍우 치는 밤 난롯가 소파에 푹 파묻혀서 책을 읽는다고 할 때 여러분은 무슨 책을 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오싹한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추리 소설을 읽습니다. 이보다 더 안락하면서 짜릿한 쾌락이 있을까요?)

17974594그럼 그런 미적 감흥을 드 퀸시는 어떻게 글로 재현했는가? 살인의 위협에 압도되어 모든 것이 정지한 공포의 순간과, 그 순간이 끝나고 정지한 모든 것들이 갑자기 움직이며 일상이 되돌아오는 순간을 극적으로 대비시킵니다. 살인범이 집안에서 살인을 막 끝냈을 때 심부름 나간 하녀가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는 순간, 비명 소리를 듣고 계단을 내려온 직공이 일가족을 몰살한 살인범의 뒷모습을 목격하고 몸이 얼어붙는 순간—이 공포의 순간에 모든 사고와 움직임은 정지됩니다. 드 퀸시는 의도적으로 이 시간을 길~게 늘려서 자세히 묘사해 놓았습니다. 그 뒤, 하녀의 절규로 이웃 사람들이 달려옵니다. 직공이 극적으로 탈출하여 위급을 소리쳐 알리자 성난 군중들이 살인범을 잡으러 밀물처럼 몰려옵니다. 공포의 시간이 끝나고 일상의 시간이 역류하는 것입니다. 이 두 상황의 극적 대비가 내는 시적 효과에 대해서는 <맥베스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에 압축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는 드 퀸시의 다른 글(영국의 우편 마차)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나는 모티프입니다. 이는 아편 중독의 부작용으로 극단적 흥분과 극단적 무기력 상태를 오갔던 드 퀸시의 체험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살인범 존 윌리엄스가 실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 그다지 흥미로운 인물은 못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성향이 있는 아일랜드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드 퀸시의 글에서 윌리엄스는 불가해하고 순수한 악마로 묘사됩니다. 그는 오렌지색 머리에 창백한 가면 같은 얼굴을 하고 있고, 인도에서 체류한 경력 탓에 신비하면서도 불길한 동양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습니다. 심지어 드 퀸시는 그를 지진에 빗대며 자연의 힘에 비견하기도 합니다. 그 뒤 살인범은 가슴에 말뚝이 박혀 묻힘으로써 희생 의례의 제물이 됩니다. 공동체는 그를 단죄하고 축출, 희생시킴으로써 단결되고 정화됩니다. 드 퀸시는 범죄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연행되어야 할 의례로서 다루고 있는 것이죠. 이는 문제에 대한 매우 보수주의적인 접근 방식입니다. 드 퀸시는 뿌리 깊은 보수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고 이는 그가 살인을 다루는 방식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3698553

드 퀸시가 편집장을 맡았던 <웨스트몰랜드 가제트>는 보수당의 전신인 토리당 계열의 신문으로 모든 종류의 개혁을 거세게 비판하고 현 상태를 옹호하는 논조를 띠었습니다. 또 드 퀸시가 주로 기고한 문예지 <블랙우즈 매거진>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를 예술적으로는 급진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죠. 이 잡지에는 대단히 공격적이고 방종하기까지 한 풍자글들이 많이 실렸습니다. 이런 태도에는 순수한 미적 쾌락, 자유롭고 무책임한 쾌락의 영역을 일상 정치와 분리된 자율적인 공간으로 보존하고 봉인하려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말이 길어졌는데 다시 드 퀸시가 죽음과 살인에 집착하게 된 배경으로 돌아와서…. 이번에는 드 퀸시의 자전적 배경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드 퀸시는 7살 때 당시 9살이던 친한 누이를 병으로 잃었고 또 10살 때는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특히 누이의 죽음은 드 퀸시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드 퀸시는 이때의 충격으로 평생 동안 죽음에 집착하게 되었고, 기괴한 환영을 보기 시작했고,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아편을 복용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성공한 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고, 교육도 잘 받았고 우등생으로 옥스퍼드까지 진학했지만 어려서 죽어 버린 누이 외에는 그 어떤 가족과도 마음을 나눌 수 없었기에 외롭고 조숙한 어린 시절을 보냈죠. 아버지는 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데다 일찍 세상을 떴고, 그의 어머니는 대단히 완고한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로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하고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드 퀸시는 다른 글에서 자기가 어머니와의 소통이 불가능했으며, 어머니 앞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이 절망적인 무력감을 느꼈다고 쓰고 있습니다. <아편쟁이의 고백>에도 나오지만 드 퀸시는 청소년기에 어머니와 후견인들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학교를 때려치우고 집을 뛰쳐나와 런던을 방황하며 굶주려 죽을 뻔합니다.

15778846여기까지 말하면 짐작하시겠지만 드 퀸시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아편 중독자였고, 살인과 죽음에 병적으로 집착했고, 외국인과 하층 계급에 대한 편견에 가득 찬 완고한 보수주의자였고, 무엇 하나 제대로 끝을 맺질 못했고—대학도 중도에 뛰쳐나왔고, 심지어 기고하는 연재물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했죠—금전 관리에는 완전히 빵점이라 평생을 빚쟁이한테서 도망다녔죠. 기벽도 많았는데요. 일례로 아주 작은 메모 조각 하나까지 버리지 못하고, 정리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책상, 의자, 침대, 바닥까지 책과 종이로 꽉 차서 운신을 못할 정도가 되면, 그 집의 문을 그냥 잠가 버리고 다른 숙소를 구해 나가는 식으로 숙소를 전전했죠. 드 퀸시가 죽고 난 뒤 최소한 여섯 군데의 숙소가 이런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벽, 개인적 트라우마, 빈곤, 중독 성향, 지극히 예민한 성정과 번득이는 두뇌,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 받지 못한 괴팍한 천재’의 이미지는 그를 대단히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에드거 앨런 포가 드 퀸시를 동경하고 그를 모델로 최초의 탐정 오귀스트 뒤팽을 창조한 것도 무리가 아니죠.[1] 그의 이러한 개성은 오귀스트 뒤팽과 셜록 홈즈에게로 이어지는 고전적 탐정 캐릭터의 원형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또 살인 사건을 그 사회적/윤리적 맥락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서 순수한 미적 구조물 혹은 지적 구조물로 취급하는 태도는 모든 추리소설의 전제가 된다는 면에서, 그의 글은 현대적 추리소설이 탄생할 기본 조건을 마련해 주었습니다.8206501

수많은 후대 작가들이 그의 글과 캐릭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드 퀸시의 글에서 직접 영향을 받은 유명 작가들의 목록은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 찰스 디킨스, 코난 도일, G.K. 체스터턴, 버지니아 울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보르헤스, 영화작가로는 앨프리드 히치콕, 나아가 연쇄 살인마와 범죄가 등장하는 오늘날의 모든 소설과 영상 작품에까지 이어집니다.

에드거 앨런 포와 조지 오웰이 드 퀸시의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을 오마주해서 쓴 짤막한 글이 있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가 쓴 것은 <정밀 과학의 한 분과로서의 사기치기(Diddling Considered as one of the exact Sciences)>라는 건데, 사기를 치기 위해 갖춰야 할 미덕을 열거하고 사기 치는 수법을 종류별로 정밀하게 분류하는 내용이고요, 조지 오웰의 글은 <영국 살인의 쇠락(Decline of the English Murder)>이라는 건데 당시 그러니까 1940년대 영국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들이 별로 볼 만한 게 없다고 불평하는 내용입니다. 둘 다 풍자적이고 익살이 섞인 글입니다. 편집자님이 평범한 번역 후기는 안 된다고 하셔서 고민하다가, 이 책에서 드 퀸시도 발랄하게 갔으니 후기도 발랄하게 가 보자, 해서 이 두 글을 번역해서 그냥 후기로 대신하면 어떨까요 하고 나름 꼼수를 써봤는데요, 편집자님께서 말씀하시길,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그 두 편의 글에 덧붙여, 에드거 앨런 포와 조지 오웰이 했듯이 드 퀸시의 <살인> 에세이를 오마주한 글을 한 편 더 써 주시면 어떨까요’ 하시는 바람에 그만 독박을 뒤집어 쓰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여기 실린 후기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드 퀸시의 화법을 패러디한 히치콕의 짧은 연설문을 찾아서, 포와 오웰의 글은 따로 안 실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책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독자 질문]
1. 특정 장르/분야의 글을 번역할 때 그 장르 언어에 익숙하기 위해 따로 뭔가를 하시는지요?
: 그 분야의 언어에 익숙해지려면 일단 번역을 시작하기 전에 책을 완독하여 그 책의 전체 맥락과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일이 필수입니다. 작업하는 도중에 배경 지식을 얻기 위한 독서를 병행하는 일도 많습니다. 저자의 다른 책들도 찾아서 읽고, 특히 번역서에 인용된 책들을 찾아 앞뒤 맥락을 확인하는 일은 반드시 합니다. <007 제임스 본드의 과학>이라는 책을 번역할 때는 그때까지 나온 모든 제임스 본드 영화들을 보았습니다. 이건 그 책을 번역하는 데 필수였습니다.

97649012. 책을 번역할 때 가장 곤란했던 점과 가장 신경을 썼던 점은? 저자 특유의 문장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떤 점에 주의했고 어떤 점이 특히 어려웠는지 궁금합니다.
: 곤란했던 점은 역시 드 퀸시 특유의 길고 난한 문장들이었죠. 단어들도 요즘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 문어투나 고어체 용법으로 쓰인 것들이 많고요… 만약 적당한 풀이를 영한사전에서 찾을 수 없을 때는 OED(Oxford English Dictionary)를 뒤졌습니다. OED는 그 영어 단어가 처음 문헌에 등장한 시기부터의 의미 변천사를 다 볼 수 있게 해 놓았죠. 영어사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OED의 예문 검색창에서 저자 이름 ‘Thomas de Quincey’를 치면 예문이 1천 개가 넘게 나옵니다. 그걸 다시 연도순으로 정렬하면 지금 내가 번역하는 바로 그 글에 수록된 예문들을 최소한 수십 개는 건질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드 퀸시 자신이 만들어낸 단어, 혹은 최초로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 단어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드 퀸시는 ‘subconscious’ 즉 ‘잠재의식’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나오기 반세기 이전에 말이죠. 또 ‘clue’라는 단어를 현대 추리소설에서 쓰는 대로 미스터리를 푸는 ‘단서’라는 의미로 사용한 최초의 범죄 소설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선대와 동시대의 여러 편집자들이 달아놓은 상세한 주석도 있고, 또 일역본과 불역본도 나와 있어서 이것들을 참고하여 대부분의 난관을 헤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3. 드 퀸시의 책은 국내에서 2번 번역되어 나왔는데요, 이번 번역에서 중점을 둔 부분 혹은 차별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6940803
: 드 퀸시의 대표작이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시공사)과 <어느 영국인 아편중독자의 고백>(펭귄북스)의 두 가지 번역본으로 나와 있죠. 이것과 특별히 차별점을 둬야겠다고 의식하고 작업하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이 <살인>과 <고백>은 서로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저는 <살인> 번역을 시작하기 전에 <고백>을 읽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약간 지루했습니다. 젊은 시절 런던에서 떠돌며 메리와 만나는 부분이나 뒤에 가서 기괴한 환상이 펼쳐지는 부분은 좋은데, 아편에 대해 이야기한 모든 부분들, 아편을 몇 온스 먹었고 끊으려고 뭘 했고… 자기가 왜 아편을 복용했는지 구구절절 변명하는 부분이 제겐 좀 구차하게 들렸어요… 드 퀸시의 캐릭터와 문체에 익숙해진 지금 다시 읽으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살인>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작업 시작할 때부터 완전 신나고 재밌었어요. 작업 기간이 얼마나 걸리나 재보려고 첫 글 <맥베스>를 시험 삼아 해봤는데 그때부터 벌써 머릿속에서 둥! 하고 종이 울리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작업 끝날 때까지 그렇게 하이한 상태로 쭉 갔습니다. 아마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소재에 드 퀸시 특유의 장광설과 비틀린 유머 감각이 결합해서, 또 그것이 저 자신의 취향과 궁합이 잘 맞아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4. 번역 작업을 할 때 출발어에 대한 ‘충실함’과 도착어의 창조적 독립 사이에서 많이 갈등하는 편인지, 그렇다면/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1583083: 여기서 ‘충실함’의 정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것 같은데요. 여기서 단어 하나하나를 품사 그대로 옮기고 문장 구조와 어순을 보존하는 것이 ‘충실한’ 번역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음… 번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거칠게 말해, 저는 한 문장 단위에서 저자가 전달하려는 의미가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오롯이 옮겨졌다면 충실한 번역이라고 봅니다. (생각은 이렇게 하지만, 제가 번역할 때 정말로 문장을 막 해체해서 재조립하는 일은 드뭅니다. 사실 그건 굉장히 품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또 이번 드 퀸시 책처럼 문학 작품의 경우는 문체가 주는 느낌까지—물론 100퍼센트 전달은 힘들겠지만–전달해 주어야겠죠. 그런 의미의 충실함을 전제한다면, 저는 창조적 독립보다는 충실함 쪽으로 확실히 더 기웁니다. 이건 전적으로 번역자 개인의 성향에 따라 갈리는 문젠데요. 제 경우는 아직 저 자신에게 번역’가’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낯간지럽습니다. 진짜 번역가는 배수아, 성귀수 선생님 같은 분들이죠. 그분들은 번역가이기 이전에 이미 작가, 즉 창작자셨으니까요. 저는 애초에 편집자로 출발했기 때문에 아직도 편집자로서의 마인드가 기본으로 장착돼 있고, ‘나는 편집자와 협업하여 책을 만드는 스태프의 일원으로서의 번역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번역도 제 개성을 최소한으로 드러내고 저자의 개성을 최대한 살려 주는 쪽으로 작업하려고 노력합니다.

끝으로, 저는 특히 범죄-추리-스릴러 장르 독자분들이 이 책을 많이 읽어 주시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읽으시다가 오역이나 표기 오류 등을 발견하신 독자분은, 제 홈페이지에 정오표 란을 마련해 놓았으니 댓글로 신고해 주시면 추첨을 통해 사은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제 홈페이지 주소는 역자 소개글 맨 뒤에 쓰여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 드 퀸시의 캐릭터와 뒤팽의 공통점: “저명한 집안 출신이지만 잇따른 불운으로 가난하게” 됨. “책이 그의 유일한 사치품”이며 “광범위한 독서가”로 대단히 박식하고, “공상벽”과 몽상가 기질이 있음. 밤마다 나와서 거리를 산책하는 습관이 있음. 논리적이지만 직관이 뛰어남. 살인과 죽음에 대해 비상한 흥미를 품고 있음. 프로를 능가하는 아마추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변덕과 기벽의 소유자. 어떤 평자는 포의 <도둑맞은 편지>가, 드 퀸시가 콜리지의 표절 혐의를 조사하여 폭로한 일화와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함. 실제로 드 퀸시는 당시 신문에 보도된 살인 사건들의 기사를 보고 추리하여 범인을 찾아내는 게임을 즐겼고, 때로는 경찰보다 먼저 범인을 맞추기도 했음.

 

1811년 래트클리프 하이웨이 연쇄 살인 사건

Post_Mortem_sketch_of_John_Williams

용의자 존 윌리엄스의 스케치

토머스 드 퀸시의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은 1811년 런던에서 일어난 실제 연쇄 살인 사건을 테마로 하여 드 퀸시가 쓴 글들을 묶은 것입니다. 이 해 12월, 아일랜드인 선원 존 윌리엄스가 런던 이스트엔드의 래트클리프 하이웨이에서 12일 간격으로 두 일가족을 잔혹하게 몰살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영국 전역에 큰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전국의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습니다.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에는 당시 신문에 게재된 삽화들이 도판으로 실려 있는데, 여기에 그 삽화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 사건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Ratcliff_Highway_Murders_-_newspaper_sketch_of_the_Marr_mercer_shop_and_residence

첫 번째 희생자인 포목상 티모시 마(Timothy Marr) 일가족의 상점 겸 살림집 전경. 1811년 12월 7일, 존 윌리엄스는 이 집에 침입해 티모시 마와 그의 부인과 갓난아기, 도제 소년을 살해하고 달아났습니다. 하녀 한 명은 심부름을 나가 있어 참사를 면했습니다. 이 삽화는 <런던 크로니클>에 실렸습니다.

Ratcliffe_Highway_Murders,_Seaman's_Maul_used_in_the_first_murders

존 윌리엄스가 범행 현장에 흘리고 달아난 살인 흉기인 나무 망치의 실측도. 이 나무 망치에 새겨진 머리글자 J.P.는 그를 검거한 결정적 증거가 되었습니다. J.P.는 존 윌리엄스와 같은 숙소에 묵고 있던 함부르크 출신 선원 욘 페테르센의 머릿글자였습니다. 존 윌리엄스는 욘 페테르센이 잠시 고국에 돌아가 있는 사이 그의 공구 상자에서 이 나무 망치를 훔쳐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여기서 삽화가는 J.P.를 I.P.로 착각한 듯합니다.)

Ratcliffe_Highway_Murders_Reward_poster

마 가족 살인 사건의 범인을 수배한 현상금 포스터. 50파운드의 현상금이 내걸렸습니다.

Ratcliffe_Highway_murders_-_funeral_of_the_Marr_family

살해된 마 씨 일가족의 장례식 광경입니다. 드 퀸시에 따르면 이 장례식에는 3만 명의 노동자가 참석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관에는 마가, 두 번째 관에는 아기를 품에 안은 마 부인이, 세 번째 관에는 도제 소년이 안치되었다. 그들은 관을 나란히 하여 함께 묻혔다. 3만 명의 노동자들이 공포와 슬픔이 서린 표정으로 장례 행렬을 뒤따랐다.” 이 삽화는 1811년 12월 24일 <런던 크로니클>에 실렸습니다.

Ratcliffe_Highway_Murders,_escape_of_John_Turner

마 가족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12일이 경과한 1811년 12월 19일, 마의 상점에서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킹스 암스’ 선술집에서 선술집 주인 존 윌리엄슨과 그의 부인과 하녀가 살해됩니다. 위의 삽화는 역시 <런던 크로니클>에 실린 것으로, 이 선술집의 고정 하숙객이었던 젊은 직공 존 터너가 2층 자기 방에서 침대 시트를 묶어 극적으로 탈출하는 광경입니다.

존 윌리엄스는 그가 묵고 있던 숙소 주인과 동료 투숙객들의 신고로 1811년 12월 24일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12월 28일, 감방 안에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법의학 기술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을 때라 수사가 전적으로 증언에 의존했기에, 그의 진범 여부와 공범의 존재 여부에 대한 의견은 아직까지도 분분합니다. 현대의 한 평자는 그가 진범이 아니었으며,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었고 오히려 진범에 의해 살해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Ratcliffe_Highway_Murders_-_Procession_to_interment_of_the_supposed_murderer_John_William

그의 시체는 당시의 법에 따라 가슴에 말뚝이 박힌 채 마차가 지나가는 도심의 사거리 밑에 매장되었습니다. 위의 삽화는 두 번째 범행 현장인 존 윌리엄슨 씨의 선술집 앞에 그의 매장 행렬이 멈춰선 광경입니다. 수레 위에는 존 윌리엄스의 시체와 그가 사용한 살인 흉기들이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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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가 매장되기 직전의 광경을 묘사한 또다른 삽화.

Sketch_of_John_Williams'_corpse_on_the_death_cart,_published_4_years_after_the_event

이는 존 윌리엄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4년 뒤인 1815년 <런던 크로니클>에 실린 삽화로, 존 윌리엄스의 시체가 살인 무기와 함께 수레에 실린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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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의 시체는 그로부터 75년이 흐른 뒤에 다시 햇볕을 보게 됩니다. 1886년, 가스 공사를 하려고 사거리를 파헤치던 인부들이 몸에 말뚝이 박힌 한 남자의 해골을 발견한 것입니다. 파헤쳐진 그의 두개골은 이 사거리 앞 술집의 눈에 잘띄는 공간에 한동안 전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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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가 묻혔던 네거리의 현재 모습. 예전의 술집은 훗날 주거용 건물로 바뀌었습니다. 존 윌리엄스의 해골은 현재 분실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ratcliff3래트클리프 하이웨이 살인 사건 지도.

1. 첫 번째 마 가족 살인 사건이 벌어진 래트클리프 하이웨이 29번지  2. 마 가족의 시신이 매장된 세인트 조지 인 디 이스트 교회  3. 두 번째 살인 사건이 벌어진 킹스 암스 선술집  4. 두 번째 희생자인 윌리엄슨 가족이 묻힌 세인트폴 교회  5. 존 윌리엄스가 묵었던 올드페어 여관의 대략적 위치  6. 살인범 존 윌리엄스가 매장된 구덩이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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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제안들 3) | 토머스 드 퀸시 | 워크룸프레스 | 2014년

 

* 이하는 3쇄에서 수정된 부분입니다.

7쪽 주석 삽입: 문법학교*[grammar school,  영국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에서 그리스어나 라틴어의 문법 또는 문학을 가르치던 교육 기관. 19세기 이후 중등학교로 발전하였다.] (트위터에서 @amil_shed 님이 지적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1쪽: 에우파에미스모스 → 에우미스모스

22쪽: 취향을 만족시키려는 요구(voluptas)가, 내팽개친 죄의식에 버금가게 되었다.취향(voluptas)에 대한 요구가 파렴치한 범죄에 대한 요구와 같아지게 되었다. (락탄티우스 인용 부분의 수정은 @patheimathos__님께서 보내주신 라틴어 원문 번역을 참고로 한 것입니다. 감사드립니다.)

22-23쪽: 유혈을 묵인하는 그 사람 자신도 핏자국 없이 깨끗할 수 없다. → 피를 쏟는 데 동의한 자가 유혈로부터 깨끗할 수 없다.

28쪽: 클렙타엔 텔레이온 → 클레프텐 텔레이온

29쪽: 에이르사이 → 에이르사이

72쪽 7번 주석: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무시무시하고도 더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을 생략했는데 1845년 판본에서는 삽입했다. ‘볼룹타스(voluptas)’는 ‘쾌락’, ‘기쁨’이라는 뜻이다.  → (“살인만큼 끔찍하고 진저리나는 일이 무엇이겠는가?”)을 생략하고(1845년 판본에서는 삽입했다) ‘쾌락’, ‘즐거움’이라는 뜻의 ‘볼룹타스(voluptas)’를 ‘취향(tastes)’으로 번역했다.

76쪽 37번 주석: 그는 공범과 함께 웨어의 목을 주머니칼로 절단한 후 → 그는 공범과 함께 웨어의 목을 주머니칼로

113쪽: 텔라모스 → 텔라모

114쪽: 에피무테온 → 에피뮈티

(그리스어의 표기 오류들은 트위터에서 @patheimathos__님이 지적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117쪽 9번 주석: 이는 소시지에 반죽을 입혀 튀긴 영국의 전통 음식 이름이기도 하다. → 이는 요크셔 푸딩 반죽에 소시지를 넣어 구운 영국의 전통 음식 이름이기도 하다.  (트위터에서 @wdfrog님이 지적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138쪽: 그 토요일 날 마는 16시간 동안이나 카운터를 지키며 힘들게 일했기 때문에, 빨리 쉴 수만 있다면 휴일이 좀 짧아지더라도 만족했을 것이다.그 토요일 밤, 마는 그 밤이 좀 더 짧아져서 빨리 지나가길 바랐을 것이다. 그날 마는 16시간 동안이나 카운터를 지키며 힘들게 일했기 때문이다.

164쪽: 에일과 포터 등을 따라 팔고 → 에일과 포터 등을 따라 팔고

171쪽: 걱정해야 일은 → 걱정해야 일은

253-254쪽: 단락 전체를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 댓글로 도움 주신 원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사적이고 축자적인 이중의 의미에서) 살인자들의 살인자 필딩–이는 지금껏 알려진 가장 무서운 계시다. 강도단이 12명의 살인자를 끌어 모은다면 이들은 무작위로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처음과 끝(der erste der letzte) 모두가 살인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여기 모인 자들은 강도단의 단원들이 이례적으로 찾아 낸 살인자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선원으로 고용된 자들–1,2,3,4,5,6–존스, 헤슬턴, 존스턴, 앤더슨, 카, 걸로웨이, 부름 받은 이 최초의 여섯 명은 (여기까지는 일부 관찰자들이 동의한 것처럼 무작위가 아니지만) 모두 준비를 갖추었다. 필딩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 줄 준비를 갖추었다. […]
(수사적이고 축자적인 이중의 의미에서) 살인자들의 살인자 필딩–이는 지금껏 알려진 바를 통틀어 가장 무시무시한 발견이다. 만약 강도단이 12명의 살인자를 끌어 모은다면 이는 무작위로 골라잡은 것이 아니다. 이들은 첫번부터 끝번까지(der erste der letzte) 전부가 다 살인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거기 모인 자들은 강도단이 살인자 중에서 선별하여(or 엄선하여) 발굴해 낸 이들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 처음 모인 여섯 명–1,2,3,4,5,6–존스, 헤슬턴, 존스턴, 앤더슨, 카, 걸로웨이–은 선원으로 고용되었음에도(이들도 무작위로 모인 것은 아니라는 데 일부 관찰자들의 의견이 일치하긴 하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필딩을 위해서라면 그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일도 자행할 준비를 갖추었다. […].

263쪽 6번 주석: 서로 너무나 맹렬히 싸워서 나머지 몸은 다 뜯어 먹히고 → 서로 너무나 맹렬히 싸운 나머지 몸은 다 뜯어 먹히고

278쪽 1803년: 어머니와 후원자들과 화해함. → 어머니와 후견인들과 화해함.

 

* 2쇄에서 수정된 부분입니다.

282쪽 연보 맨 아래: “클로스터하임, 혹은 가면극” → “클로스터하임, 혹은 마스크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정체불명의 연쇄 살인마이며 ‘마스크(The Masque)’는 주인공의 별명입니다. ‘마스크’를 잡기 위해 가면무도회(Masque)를 여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클로스터하임은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지명.)

232쪽에서 ‘탈러’에 대한 주석이 다음과 같이 추가되었습니다.
: 유럽에서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통용된 은화. 드 퀸시는 이 화폐 단위 ‘탈러(Taler)’를 영어식으로 ‘달러(dollar)’로 표기했는데, 미국 달러와 혼동될 여지가 있어 여기서는 ‘탈러’로 표기했다.

 

* 다음 부분은 원 님의 도움을 받아 수정했습니다.(댓글 참조) 기록을 위해 남겨 둡니다.

이 책에서 제가 끝내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옮긴 부분이 한 군데 있어 여기에 올립니다. ‘부록 C.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에 대한 새로운 글’, 254페이지 맨 윗부분(붉은색)입니다.

(수사적이고 축자적인 이중의 의미에서) 살인자들의 살인자 필딩–이는 지금껏 알려진 가장 무서운 계시다. 강도단이 12명의 살인자를 끌어 모은다면 이들은 무작위로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처음과 끝(der erste der letzte) 모두가 살인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여기 모인 자들은 강도단의 단원들이 이례적으로 찾아 낸 살인자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선원으로 고용된 자들–1,2,3,4,5,6–존스, 헤슬턴, 존스턴, 앤더슨, 카, 걸로웨이, 부름 받은 이 최초의 여섯 명은 (여기까지는 일부 관찰자들이 동의한 것처럼 무작위가 아니지만) 모두 준비를 갖추었다. 필딩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 줄 준비를 갖추었다. […]

Fielding the Murderer of Murderers (in a double sense rhetorical and literal)–This is the most terrific revelation yet known. If a gang of robbers draws 12 murderers together it is not the men at random–der erste der letzte are all ready for murder: those who come are the murderers by exception whom to form as a gang has found out. But here men hired as sailors–1–2–3–4–5–6–viz. Jones, Heselton, Johnstone, Anderson, Carr, Gulloway, the 1st 6 asked (tho’ so far not at random that some observation had concurred) are all ready; more ready to grant than Fielding to ask. […]

저는 여기서 드 퀸시가 무슨 말을 하려 한 건지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이 글은 드 퀸시의 모든 출판본을 통틀어 오로지 2006년도 옥스퍼드 클래식판에만 실려 있는 원고로, 이 판본의 편집자인 로버트 모리슨이 드 퀸시의 수고 더미에서 직접 발굴해 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대조해 볼 다른 번역본이 없으며, 앞뒤 맥락이 잘라진 채 발췌된 쪽글이고, 미완성 글입니다. 로버트 모리슨 선생한테 이메일을 보내 문의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습니다. 도움을 주실 만한 독자분이 나타나길 기대해 봅니다.

정지된 생명: 중세 문화의 고통, 쾌락, 형벌(3)

2장 살가죽 벗기기

[도판 1] ‘시삼네스의 체포’, 헤라르트 다비트(Gerard David), 의 왼쪽 패널, 1498년, 나무 패널에 유채. 흐루닝에 미술관, 브뤼헤.

[도판 1] ‘시삼네스의 체포’, 헤라르트 다비트, <캄뷔세스의 재판>의 왼쪽 패널, 1498년, 나무 패널에 유채. 흐루닝에 미술관, 브뤼헤.

‘시삼네스의 처형’, 헤라르트 다비트, 의 오른쪽 패널.

[도판 2] ‘시삼네스의 처형’, 헤라르트 다비트, <캄뷔세스의 재판>의 오른쪽 패널, 1498년, 나무 패널에 유채. 흐루닝에 미술관, 브뤼헤.

1498년 브뤼헤 시청의 ‘정의의 홀’에 설치된 헤라르트 다비트(Gerard David)의 <캄뷔세스 왕의 재판>(도판 1, 2)은, 이제껏 가장 주목을 끌면서도 아마도 가장 이해받지 못한 이미지―중세 후기로부터 이어 내려온 형벌의 잔재―를 담고 있다. 이 그림은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ae)>에 처음 기록된 고대 페르시아의 전설로서, 캄뷔세스 왕의 명으로 부패한 판사인 시삼네스의 살가죽을 벗기는 모습을 두 개의 패널에 묘사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중세 판본은 오리엔트를 비롯한 각지의 전설 및 고전 우화 모음집인 <게스타 로마노룸(Gesta Romanorum, ‘로마인의 업적’)>에 실렸는데, … <게스타>의 29장에는 어떤 판사가 거액의 뇌물을 받고 부정 판결을 내린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러한 편파적인 법 집행을 너그러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황제는 판사의 가죽을 산 채로 벗기라는 명을 내렸다.

그 판결은 즉시 집행되었고, 혐의자의 살가죽은 비슷한 죄를 저지르지 말라는 무시무시한 경고의 의미로서 재판관의 의자 위에 깔리게 되었다. 그 후 황제는 죽은 판사의 아들에게 같은 직위를 수여하고 재판관에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의를 집행하기 위해, 그대는 범법을 저지른 그대의 아비의 살가죽 위에 앉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대를 악한 길로 인도하는 자는 그의 운명을 기억해야 하리라. 그대 아비의 살가죽을 내려다보면서 아비의 운명이 그대에게 떨어지지 않도록 명심하여라.’

다비트의 두폭화(diptych)는 이 전설에서 네 개의 에피소드를 뽑아 재현하고 있다. 좌측 패널의 뒷배경에는 부패한 판사가 뇌물을 수수하는 장면이(도판 3), 전면에는 그가 캄뷔세스 왕에 의해 극적으로 체포되는 장면이(도판 1) 담겨 있다. 우측 패널에서 우리는 시삼네스의 살갗을 벗기는 소름끼치는 공개 처형 장면(도판 2)과 마주하며, 우측 위편 구석에서 이 이야기의 교훈―판사의 아들인 오타네스가 자기 아버지의 살가죽을 덮은 의자에 앉아 법을 집행하는 장면―을(도판 4) 엿볼 수 있다.

[도판 3] 도판 1의 세부. 뇌물을 수수하는 시삼네스.

[도판 3] 도판 1의 세부. 뇌물을 수수하는 시삼네스.

[도판 4] 도판 2의 세부. 법을 집행하는 시삼네스의 아들 오타네스.

[도판 4] 도판 2의 세부. 법을 집행하는 시삼네스의 아들 오타네스.

…다비트가 이 주제를 다룬 방식의 인상적이고도 독특한 점은, 오타네스가 자기 아버지의 살가죽으로 덮인 의자에 앉는 마지막 에피소드에 집중한 그 이후의 재현물과는 달리, 이 브뤼헤 패널화가 화폭 대부분을 시삼네스 자신의 체포와 처형 장면에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중세 후기 네덜란드 회화의 독특한 특성을 단순히 사실 그대로를 모방하는 미학으로 치부해 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앞으로도 보겠지만, 소위 다비트의 회화의 리얼리즘은 물질적 현실을 객관적으로 구체화한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의심의 여지없이 강력하다. 내가 이 두폭화에 대해 대중 앞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을 때 그 두 번째 패널을 학생들에게 보여 주면, 무서워서 반쯤 눈을 가리는 사람들이 최소한 몇 명씩은 있다.

… 현대 관람객들의 눈은 대부분 오른편 패널에 있는 사형수의 절개된 육체에 매료되는 동시에 혐오감을 느낀다. 이 작품이 현재 전시된 브뤼헤의 갤러리 안에 서서 관광객들이 줄 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공포스런 매혹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못 박혀 있거나, 충격을 받고 당황해서 슬그머니 지나쳐 버리거나 둘 중 하나이다(그들은 예쁜 그림을 보면서 한가한 오후를 보내려고 온 것이다). 현대의 감상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살가죽을 벗기는 장면이 그림에서 가장 심기가 불편한 부분인 것 같다. 이 작품에 대한 미술사학자들의 논의에서도 (비록 무시되긴 하지만) 은연중에 비슷한 반응이 엿보인다. 미술사 논저에서 이 그림은 칼라로 실리는 일이 드물고, 비체적 공포의 체현물로보다는 15세기 후반 회화의 보편적인 양식과 구성의 발전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지표로서 다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W. H. 제임스 윌(W. H. James Weale)이 다비트의 작품에 대해 쓴 최초의 연구 논문에서도 “사람의 피부를 발라내는 것은 당연히 보기 즐거운 일이 아니지만, 화가 자신이 이 주제를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강조하는 등 비슷한 불안감이 엿보인다.[1]

… 다비트의 <캄뷔세스 왕의 재판>을 수용해 온 역사를 보면 그런 식의 방어적 반응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사형수의 육체를 보는 것에 대해 끈질긴 거부 반응이 있는 것 같다. 주변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육체란 근본적으로 두려운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는 그렇게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사료와는 친숙해지기가 힘들다…그럼에도 유독 시삼네스의 육체로 눈길을 돌림으로써, 게다가 그것이 중세의 관람객들에게 미친 상상적·상징적 반향을 분석의 뼈대로 삼아, 나는 이 그림의 충격적이고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을 숙고하고자 한다…

피부의 의미

<캄뷔세스>의 이미지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적 내용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피부를 제거하는 형벌 그 자체의 성격이다. 피부는 신체가 점하는 공간적 범위의 한계선이자, 내부 장기를 감싸고 이것들을 충격에서 보호하는 표면이다. 동시에 특정한 의미를 띤 흔적을 새겨 넣을 수 있는 표면이자, 외부 세계와 내부의 감각을 중재하는 감각적 문지방이다.

… 중세의 종교적 텍스트에서 피부는 옷이라는 은유를 통해 구성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시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부를 ‘입었다’고 상상했다… 보다 세속적인 맥락에서 나온 문학 작품으로 눈길을 돌려도 피부는 역시 강한 헌신의 대상이다. 중세의 연애 서사에서 여성의 신체에 대한 묘사에는 매혹적인 피부에 대한 언급이 상투적으로 들어 있다. 반대로 병에 걸리거나 훼손된 피부는 혐오, 구토, 반발과 공포의 대상이다. 특히 나병으로 인한 피부병은 도덕적 결함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세의 나병 환자들은 시신을 매장하는 의례와 유사한 분리 의례를 거쳐야 했다. 훼손되지 않은 신체 표면이야말로 이승에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중세의 처형 절차에도 죄수의 사회적 죽음을 상징하여 희생자의 의복을 벗기는 과정이 있었는데 이는 전도(轉倒)의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체를 감싼 의복의 한계치인 피부 자체를 제거해 버리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을까? 피부는 곧 기억이라는 중세의 관념에 따르면, 산 채로 살갗을 벗기는 행위는 일시적 기억과 정체성이 쓰여진 신체의 표면을 떼어 없애고 그 자리(죽은 피부)에 ‘영구적인’ 교훈이 새겨진 양피지를 바르는 것이다.

[도판 5]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의 공방, , 1540년경, 패널에 유채, 베를린 국립박물관(회화 갤러리).

[도판 5]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의 공방, <캄뷔세스의 재판>, 1540년경, 패널에 유채, 베를린 국립박물관(회화 갤러리).

따라서 다비트의 그림은 고통 받는 신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객체가 되는 과정을 잔인할 정도로 똑똑히 드러내고 있다. 시삼네스의 처형을 목격하는 이들은 살갗을 벗기는 행위가 비체성(脾體性)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그 결과 생명 없는 물체에 교훈이 담기게 된다는 양 극단의 모순을 중재해야 한다…시삼네스의 살가죽이 법 집행의 물리적인 지지대로 활용되는 캄뷔세스 신화의 마지막 에피소드 또한 비슷한 효과를 낸다. 여기서 경계[피부―옮긴이]는 문자 그대로 하나의 객체가 된다…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의 1540년경 패널화에서는 살갗을 벗기는 장면이 원경으로 처리되고 살가죽이 오타네스의 머리 위에 위협적으로 걸려 있다(도판 5)…이러한 이미지에서 시삼네스의 살가죽에는 눈구멍이나 손가락, 발가락, 머리카락, 귓바퀴 등 예전에 달려 있었던 신체 일부분의 흔적이─마치 파괴된 줄 알았던 정체성을 외부로 표현하듯이─남아 있다. 시삼네스가 뇌물을 수수함으로써 정치체의 경계선을 범한 것처럼, 그 자신의 신체의 경계를 거스름으로서 위반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 다비트는 벗겨진 피부를 단순명료한 표면으로 묘사하였다(도판 4). 피부는 차라리 양피지를 만드는 데 쓰려고 매끈하게 다듬은 가죽에 가깝고, 인간의 신체임을 연상시키는 세부 묘사는 거의 없다. 따라서 다비트의 그림에서 피부의 위상은 비체성과 추상성 사이에서 동요한다. … 시삼네스의 운명은 신체 절단에 대한 중세의 뿌리 깊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동시에 그의 분리된 신체가 기억과 교훈적 진실을 뒷받침하는 힘을 지녔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공민적’ 미학

이러한 추론으로 살갗을 벗기는 모티프의 상징적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다비트의 작품을 그토록 공포스럽게 만드는 특정한 심미적 자질을 설명해 낼 수는 없다. 그러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차단하는 시각적 전략은 무엇인가?

[도판 6] 도판 2의 세부, 껍질이 벗겨지는 시삼네스의 팔.

[도판 6] 도판 2의 세부, 껍질이 벗겨지는 시삼네스의 팔.

[도판 7] 도판 2의 세부, 시삼네스의 찡그린 얼굴.

[도판 7] 도판 2의 세부, 시삼네스의 찡그린 얼굴.

…시삼네스의 신체를 연출한 방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가 신체의 세부를 놀랍도록, 거의 현학적일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희생자의 몸에 나 있는 모든 털들은─다리털, 음모, 심지어 젖꼭지와 겨드랑이 주변의 몇 가닥 털까지─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시삼네스의 팔에는 정맥이 뚜렷이 드러나 있고, 손목 주위의 살가죽은 밧줄로 단단히 묶여 밀려 있다.(도판 6) 그의 얼굴은 주름이 잡히고 목의 혈관은 도드라져 있다.(도판 7) 그렇다고 이 이미지가 ‘사실주의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 그림의 논리는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강한 심미적 요소가 들어있거나 혹은 상징적 덧칠이 되어 있다. … 다비트의 <캄뷔세스>의 우측 패널이 내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시삼네스의 몸을 묘사한 자연주의가 아니라, 이 그림이 취한 구성의 엄격성이 나 자신의 유동적이고 진행 중인 신체 경험에 들이대는 공격적 느낌이다. 그로 인해 나는 신체적 경험의 경계선, 죽음의 한계와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도판 8] 도판 2의 세부, 껍질이 벗겨지는 시삼네스의 다리.

[도판 8] 도판 2의 세부, 껍질이 벗겨지는 시삼네스의 다리.

그림 속의 형리들이 마치 필경사처럼 정확하게 각자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그런 느낌을 요한다. 그들이 마치 팽팽한 무명천 같은 판사의 피부를 째는 광경을 바라보자면 내 뱃속에서는 욕지기나는 느낌이 올라온다. 시삼네스의 왼쪽 다리에서 얇게 저며 낸 피부는 발꿈치까지 완벽한 직선으로 당겨져 있고 그 가장자리 부분에 자연광이 닿아 희게 빛나는데, 자연스런 곡선을 이루려는 인체의 성질을 거스르는 이러한 표현 방식은 보는 사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다리에서 벗겨 낸 살가죽은 팽팽히 당겨져 마치 접힌 부채처럼 곧은 주름이 서너 개 뭉쳐 있다.(도판 8)

의미심장하게도, 이런 식의 표현은 15~16세기 외과학 참고서의 삽화를 연상시킨다. 여기에 보면 외과 수술용 칼로 ‘살가죽 옷’을 깔끔하게 잘라 내거나, 살갗을 발라낸 신체가 한 손에 칼을 들고 한 손엔 자신의 벗겨낸 가죽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도판 9)─이러한 이미지는 다비트의 회화와 충격적인 상호텍스트를 이룬다. 이 패널은 또한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산 채로 해부하는 장면을 묘사한 동시대의 이미지─<장미 이야기(roman de la rose)>의 네덜란드 필사본 중에 들어 있는 에피소드를 묘사한 세밀화(도판 10)─와도 비교된다.

[도판 9] ‘피부를 벗긴 인물’, 후안 발베르데 데 하무스코(Juan Valverde de Hamusco), (로마: Antonio Salamanca and Antonio Lafresii, 1556) 중 목판화.

[도판 9] ‘피부를 벗긴 인물’, 후안 발베르데 데 하무스코, <인간 신체 구조의 역사>(로마, 1556) 중 목판화.

[도판 10] ‘아그리피나의 해부를 지켜보는 네로’, 의 세밀화, 1500년경, 네덜란드. 영국국립도서관, 런던.

[도판 10] ‘아그리피나의 해부를 지켜보는 네로’, <장미 이야기(Roman de la Rose)>의 세밀화, 1500년경, 네덜란드. 영국국립도서관, 런던.

… <캄뷔세스>에서 가장 심란한 측면은 형리들의 매우 진지한 태도로서, 이는 다시금 해부학 삽화와 병치된다. 예를 들어 <아그리피나> 세밀화에서 해부를 집행하는 우두머리는 소매를 걷어 붙이고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옆에서는 그 조수가 조심스레 칼을 쥐고 있다. 마찬가지로 다비트의 <캄뷔세스>의 형리들도 초연하고 사무적인 태도를 보인다. 신체 표면에 주의 깊게 선을 긋고 있는 이 전문가들은 오로지 자기가 맡은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다만 그림 오른편에 시삼네스의 팔을 받치고 있는 어린 조수만이 예외로, 산란한 듯이 관람객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림 속 인물의 눈길이 관람객의 시선과 마주치는 모티프는 성인 성녀의 순교 장면에서도 가끔씩 나타나는데(5장을 보라), 이것은 그림을 (1장에서 논의한) 일시적 정지의 이미지와 연결하는 테크닉이다. 그림 속의 장면에 관람객이 통합됨으로써 … 현대의 관람객들 역시 이미지를 눈으로 ‘접촉하고’ 안으로부터 경험하면서 이 그림과의 정서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서론에서 논의한 브로츠와프 십자가상이 분명히 보여 주듯이, 중세 후기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감정 이입하는 관계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다비트의 형벌 패널화에는 피가 거의 완벽하게 부재한 것이 인상적이다. 죄수의 몸에서 찾아볼 수 있는 피의 흔적이라고는 흉골과 허벅지를 따라 흘러내리는 몇 방울의 피와, 치아에 조그맣게 맺힌 피 한 방울(혹은 그냥 치아 하나가 빠진 구멍일 수도 있다)뿐이다. 형리 한 사람의 손가락 끝에서도 피가 조금씩 바닥으로 흘러 떨어진다. 어쩌면 수난 도상에서 피가 성체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피를 시삼네스의 몸과 연관 짓게 되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미지에서 피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극적인 서스펜스를 높이기 위해 작가가 취한 전략일 수도 있다. 어느 시점부터 진짜로 피가 흐르기 시작할 것인가…죄수는 언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피부가 완전히 벗겨졌을 때 사체는 어떤 모습이 될까? 작가는 이렇게 생명(움직임)이 정지한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일종의 ‘롤러코스터’의 미학─쾌락의 원천(서스펜스는 현대 공포 영화를 즐기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이자 불안의 원천이 되는 극적인 일시성─을 창출하고 있다.

[도판 11] 도판 2의 세부, 시삼네스의 처형을 구경하는 사람들.

[도판 11] 도판 2의 세부, 시삼네스의 처형을 구경하는 사람들.


…감상자의 반응에는 시삼네스의 몸 주변에 모여든 구경꾼들의 표정도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도판 11) 처형 집행인들과 매한가지인 그들의 금욕적인 몸짓은, 모든 본능적인 반응을 프레임 바깥의 관람객들을 향해 몰아내고 있다. 이는 이미지와의 정서적인 관계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테크닉이다. 앞에서 언급한 네덜란드 필사본의 해부 묘사에서는 자기 어머니의 살이 절개되는 장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네로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는데(도판 10), 이와 달리 이 그림에서 처형을 목격하는 시민들의 시선은 희생자의 몸을 무심히 지나치거나 아예 딴 곳을 쳐다보거나 혹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도판 12] 도판 2의 세부, 작업 중인 형리들.

[도판 12] 도판 2의 세부, 작업 중인 형리들.

마찬가지로 형리들도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할당된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이는 신체를 그 구성 부분으로 조각조각 쪼개어 바라보는 태도이다.(도판 12) 앞서 언급했듯이 신체 절단을 바라보는 중세의 태도는 양가적이었다. 그리스도의 매장이나 성인의 순교라는 맥락에서는 이러한 관습에 열광했지만, 그 외 다른 맥락에서 절단된 신체와 마주치면 공포를 드러냈다. 마찬가지로 다비트의 그림에서 구경꾼들의 태도는 이 그림이 지닌 비체성과 숭고성의 양 극단을 내비치고 있다. 그들의 초연한 태도는 희생자를 비인간화하고, 아직은 살아 있는 통일체로서의 몸을 향한 자연스런 반응을 억누른다. 시삼네스 개인의 정체성이 새겨져 있던 표면이 제거됨으로써, 그의 몸은 정치적 삶이 박탈되고 적나라한 목숨으로 전락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 그러나 구경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이 전하는 정의의 교훈을 숙고하는 것뿐이다. …

하지만 우리가 무리를 해서라도 (그럴 수 있다면) 살갗이 벗겨지는 육체 그 자체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여전히 의미를 담지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림 속의 구경꾼들의 시각에 저항하여 그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려면, 관점의 미세한 변화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시민들의 공허하고 무감동한 표정과 달리 고통으로 주름진 시삼네스의 얼굴을 관찰할 수 있다.(도판 7) 그의 일그러진 입에는 악문 이빨이 드러나 있고 긴장된 목에는 힘줄이 튀어 나와 있다(왼쪽 각막에 흰 점은 눈에 물기가 약간 비친 것 같다)…첫 번째 패널에서도 정의의 옥좌에서 끌어내려지는 시삼네스의 얼굴에는 불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난다. 이처럼 시각을 조금 이동하여 한 걸음만 비껴서 보아도 희생자인 시삼네스 자신은 관람자들의 신체에 공포의 반응을 아로새기며, 우리는 죄수의 공포를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의 맥락에서 다비트의 그림은 희생자와 동일시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니다. 이 그림의 목적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그림 속의 시민들(원래 이 사건을 목격한 관중들)과 동일시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 패널화를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다비트는 구경꾼들의 얼굴 중 상당수를 다시 그려 넣거나 수정하였다. 아마 이 그림이 완성되던 당시에 재직 중이던 시의회 의원과 닮은 얼굴을 재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신 유행에 맞추기 위해 꽃 장식, 아기 조각상, 고전풍의 원형 양각 부조 등의 모티프를 새로 추가하였다. 이런 변경된 요소들을 보면, 화가는 희생자와의 동일시보다는 구경꾼과의 동일시를─구경꾼 사이에 당시 실제 인물의 초상을 포함시킬 정도로─한층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화가가 감상자를 그림 속의 구경꾼들과 동일선상에 놓으려 했음을 되새긴다면, 그림에 대한 반응의 계급적 성격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그림은 15세기 후반 브뤼헤의 중산층 공민 계급이라는 매우 한정된 사회 집단을 염두에 두고 주문된 것이다. 초연함과 도덕적 우월성의 렌즈를 통해 작품을 보는 전통적 미술 비평과 유사하게, 이 그림은 ‘공민적 미학(burgerlijk aesthetic)’이라 할 만한 것을 체현하고 있다. ‘공민적 미학’이란 말하자면 엄정하고 무감동한 표현 모티프에 의한 재현 방식으로서, 본능적, 신체적 반응을 억제한다. 여기서 네덜란드 말인 ‘공민(公民, burgerlijk)’은 이 그림에 대한 반응의 계급적 성격─이 그림을 브뤼헤 시민들이 주문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또 이 단어는─이 말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도 그렇지만─여기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부르주아(Bourgeois)’보다도 교화되고 예의 바른 느낌을 전달한다…공민적 미학은 또한…보다 차갑고 소원하고 미학적인 감정을 수반한다. 이는 추하거나 조야한 것에 대해 방어적이며 결벽하다. 결벽성(fastidiousness)은 <캄뷔세스 왕의 재판>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처참한 육체에 참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고 배우라는’) 교훈적 진실에 대한 숙고를 환기시킴으로써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도판 13] ‘성 바르톨로메오의 순교’, 슈테판 로흐너,  중 한 패널, 1435년경, 목판에 혼합 재료. 슈테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도판 13] ‘성 바르톨로메오의 순교’, 슈테판 로흐너, <사도들의 순교(Martyrdom of the Apostles)> 중 한 패널, 1435년경, 목판에 혼합 재료. 슈테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동시에─중세의 공민들을 포함한─일부 감상자들이, 교화적이고 초연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요구에 저항하면서, 근대 비평가들이 지금껏 끈질기게 무시해 온 ‘고통 받는 육체’에 바로 초점을 맞추어 이 그림을 다른 방식으로 볼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예컨대 최소한 13세기 이후 종교 문헌의 필사본이나 패널화에는, 성 바르톨로메오가 살가죽이 벗겨져 순교하는 장면을 재현하는 뿌리 깊은 전통이 있어 왔다. 그 가장 인상적인 예는 15세기 슈테판 로흐너(Stefan Lochner)가 그린 <사도들의 순교> 제단화 중의 패널화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바르톨로메오는 완전히 알몸이 된 채 한쪽 팔의 살가죽이 너덜하게 반쯤 벗겨져 있다. 눈에 잘 띄게 채색된 핏방울이 그의 등을 타고 흘러내린다.(도판13)…. 성인을 본받자는 교훈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바르톨로메오의 이미지는 현저히 ‘희생자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띤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로흐너의 패널화에서 바르톨로메오는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종교 문필가들은 그들이 신앙하는 ‘고문 받고 고통 중에 있는 육체’가 되기를 갈망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이미타시오 크리스티(imitatio Christi)’라는 급진적 관습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다비트가 이 작품을 제작하던 당시 기독교 신앙의 맥락에서는, 고통 받는 몸을 바라보고 그와 동일시하는 유서 깊은 전통이 존재하고 있었다.

… 고통 받는 육체를 바라보고 거기에 대해 감정 이입하며 참여하는 행위는, 이 육체가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매개체로 변형되는 데 대한 저항으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고통 받는 몸의 이미지에 반응하는 관람객들은 역사의 요구에 저항한다. … 동시에 시삼네스의 신체적 고통과 관람객의 신체 사이에는 여전히 단절이 남아 있다. 이는 희생자의 고통 받는 신체가 실제로 우리의 신체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가가 죄수의 육체로부터 시민 정신과 법의 집행에 관한 교훈적 메시지(이는 관람객들을 과거 중세의 특정 시점으로 돌려놓는다)로 주의를 돌리기 위해 시각적 전략을 활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감정을 이입하는, ‘초역사적’ 반응을 몰아내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관람객들을 끌어들이려 시도한다. 우리가 보는 방식을 달리하여 이 그림의 중심에 있는 처참한 육체에 참여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우리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공포에 근접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내 견해로는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확립하고자 하는 것은 결벽증적이고, 육체로부터 분리되고, 자기로부터 거리를 두고, 초연한, 한마디로 말해 ‘공민적’ 반응이다.

 

  1. 예를 들어 Pa+cht, Early Netherlandish Painting, p.247에서는 시삼네스의 형벌에 대해 단순히 ‘메스꺼운 일’이라고만 언급하고 거기에 대해 보다 면밀히 질문하지 않은 채, 그의 분석을 형식적인 고찰에만 한정한다(‘인물 군상의 머리가 고전 부조 양식처럼 완벽히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는 둥, 살가죽이 벗겨진 몸이 ‘사선으로 후퇴한 공간’에 놓여 있다는 둥)….이는 그림이 그려진 표면과 그것이 감상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으로부터 딴 곳으로 주의를 돌리는 방법론이다.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간(2)

“오토 노이라트(1882-1945)는 20세기에 가장 인정을 못 받았던 천재 중 한 명이다. 그를 경탄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업적에 대해 개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많은 영역에서 개혁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통이 크고 쾌활한 성품이었으며 친구와 적을 동등한 정감으로 대한 것으로 유명하다…매우 설득력 있는 연설가이자 지칠 줄 모르는 조직자 노이라트는 특히 다양한 학제, 계층과 민족들 사이에 가교를 놓는 데 헌신했다… “모든 사람이 공동의 문화에 참여할 수 있고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들 사이의 심연에 다리가 놓이는 즉시 인간은 더욱 완전하게 이해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인간 발전기 노이라트처럼 경제 정신의 보급과 경계를 허무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단한 업적들이 인정을 받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에서 기술한 사상가들 중 어느 누구도 다방면에 박학다식한 노이라트만큼 기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없었고, 2차 대전 후 세계를 그렇게 잘 이해한 사람도 없었다. 그가 만약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한 문화의 영웅이 됐을 것이다…그가 관심을 두었던 그 방대한 학문적 영역을 볼 때, 어느 누구도 그가 산 세기에 그를 능가하지 못했다. 누가 과연 물리학, 수학, 논리학, 경제학, 사회학, 고대사, 정치학 이론, 독일문학사, 건축, 응용 그래픽 영역에서 진정한 연구를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헤르츨처럼 노이라트 또한 실천적 유토피아주의자였다. 그러나 그 씨앗의 결실은 다른 사람들이 거두었다. 성인 교육을 위해 그렇게 많이 노력한 그가 잊혀졌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분명 전문화의 희생양이었고 이것이 그의 백과사전주의를 조소하게 만드는 것이다. 빈 학파의 다른 어떤 학자도 그 집단적 업적을 노이라트만큼 훌륭히 해내지 못했다. 또한 어느 누구도 그렇게 당당히 통합적 사고로 오스트리아인의 재능을 구현한 사람은 없었다.”
(윌리엄 존스턴 지음, 김래현 외 옮김,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신사와 문화사의 재발견>, ‘오토 노이라트: 만능 천재의 사라짐’, 317-322쪽.)

“”오토 노이라트처럼 독특하게 대위법적인 저자를 독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그리고 자기가 알아낸 일부분을 전체로 착각함으로써 그를 오독하는 방법 역시 여러 가지다. 그의 다양한 활동 분야 중에서도 특히 경제에 대한 저작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조차, 사람들은 이를—또 그가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 시도한 것을—두고 그에게 서로 모순되는 딱지를 붙이곤 했다. 그는 ‘낭만주의자’이자 ‘광인’이었고, ‘공산주의자’이면서 ‘부르주아’였으며, ‘바보’인 동시에 ‘선지자’였다.”
(Thomas E. Uebel, ‘Introduction: Neurath’s Economics in Critical Context’ in Otto Neurath, Economic Writing Selection 1904-1945 (Springer, 2004), p. 1.)

오늘날 노이라트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조명되고 있습니다.

1. 논리실증주의 과학철학자
2. 아이소타입과 정보 디자인의 창시자
3. 사회주의 경제학자, 정책 기획자.

이 중 과학철학자로서의 노이라트에 대해서는 논리실증주의, 비엔나 서클, 통일과학운동에 대한 책과 글들을 통해 비교적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오늘날 픽토그램의 원형이 된 그림 언어 체계 ‘아이소타입’에 대해서도 디자인 분야에서 많은 책과 글이 나와 있죠.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 이론가/실천가로서 그의 면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부분입니다.

난점은, 그의 어느 한 측면만을 조명하면 그 한 가지 측면마저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는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소타입’은 그가 참여한 ‘붉은 빈’의 사회주의 실험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었으며, 언어의 통일을 통한 지식의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통일과학운동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 다층적인 면모를 한 사람의 저자가 종합적 시각으로 아울러 조망한 평전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과학철학 분야와 디자인 분야에 국한된 책들을 제외하면, 현재 그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책은 Vienna Circle Collection 시리즈에 포함된 (눈물 나게 비싼 T_T) 그의 저작집들입니다. 또 Vienna Circle Institute Yearbook의 한 권으로 각 분야의 여러 저자가 참여하여 펴낸 책이 하나 있는데, 리뷰를 보면 글들의 수준이 들쭉날쭉한 것 같습니다. 영어권에서 노이라트는 잊혀진 사상가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책을 (구글 번역기를 돌려 가며 독일 아마존을 수색한 결과에 따르면) 독일어권에서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혹시 제가 찾지 못한 그의 독일어 평전이 있다면 부디 알려 주십시오. 찾아도 읽지는 못할 테지만요.)

웹상에서 제가 찾은 자료 중 그의 사상 전반에 대해 가장 잘 정리된 글은 스탠포드 대학에서 만든 철학 사전의 ‘오토 노이라트’ 항목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가 올리는 글들은, 노이라트가 직접 쓴 글들과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의 존 오닐이 쓴 논문들을 제외하면 이 페이지의 정보에 크게 의존할 것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간(1)

<화폐 없는 세lifewithout계는 가능하다>는 여러 저자의 글들을 모은 책인데, 애석하게도 주요 편저자인 애니트라 넬슨의 글(1장과 11장)이 제일 딱딱하고 난해한 축에 속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들은 3장 해리 클리버의 글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원래 해리 클리버의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입말에서 탄생한 글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고, 그가 육성으로 토로하는 열정이 느껴집니다. (제가 느꼈다는 말이고, 그게 번역본에도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3장의 모태가 된 1993년의 인터뷰 원고는 그 번역본이 일찌감치 국내 인터넷에 돌아다녔고, 2002년 <자율평론>에도 소개된 바 있습니다.) 트윈 오크스 공동체와 스페인 스쿼터들의 사례를 소개한 9장과 10장도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글이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번역하는 과정에서 제게 가장 큰 자극을 주었던 글은, 바로 존 오닐이 쓴 4장이었습니다.

사실 이 글은 낯선 개념과 낯선 고유명사로 가득차 있어서 번역하기가 제일 골치 아팠습니다. (심지어 ‘화폐, 시장, 생태학’이라는 제목도 지루합니다. 실은 제목을 좀 더 재미있게 바꾸고 싶었지만 끝내 좋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편집자님도 뾰족한 대안이 없으셨던 듯.) 그런데도 이 글에 흥미를 느낀 것은 오로지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게 노이라트는, 20년 전 과학철학 수업 시간에–그러니까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칼 포퍼에 의해 반박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논리실증주의를 공부하면서 약 0.1초 동안 귓가에 머물고 간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 소개된 노이라트는 영판 다른 사람이더군요. 사회주의 계산 논쟁에 참여하고, 화폐 없는 현물 경제를 주장한 급진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데다, 실제로 사회주의 혁명에 참여하여 정책을 추진한 경력도 있더군요. 이거 금시초문이네. ‘실천적 맑시스트 과학철학자’라니 좀 섹시한데…그런데 이분께서 말씀하시는 ‘현물 경제’라는 게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생전 그런 걸 경험해 봤어야지 젠장… 하며 끙끙대고  있는데, 뒤에서 지나가던 배우자분께서 불쑥 물으셨습니다. ‘무슨 책을 하고 있길래 오토 노이라트가 나와?’

남편은 디자인 전문 편집자고, 저는 사회과학 출판사에서 일했던 연줄로 주로 정치/사회 쪽 책을 번역해 왔기 때문에 서로의 분야가 겹치는 일은 바람직하게도 전무합니다. 또 우리는 상대가 만드는 책에 대해 거의 소 닭 보듯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정말 희귀하죠.

들어본즉슨, 그 당시 배우자분은 오토 노이라트의 (세 번째) 부인 마리 노이라트가 쓴, ‘아이소타입’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분의 설명에 따르면, 디자인사에서 노이라트는 매우 중요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책은 이렇게 이쁘게 나왔고 transformer

(제목도 무려 ‘트랜스포머’. 이런 메카닉한 제목이라니.)

오토 노이라트가 마리 노이라트와 게르트 아른츠와의 협업으로 만들어 낸, 이렇게 아름다운 도표들이 실렸습니다.

transformer1

neurath_kraftwagen

이쯤 되자 저는 거의 성적인(…) 매력을 느꼈고, 이렇게 섹시한 두뇌의 소유자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사진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결과는…

 

 

 

 

 

 

 

neurath-otto

(묵념)

 

혹자는 제가 이 지점에서 퀘스트를 종료했으리라 추측할지도 모르나… 만약 그랬다면 그런 불찰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거구의 대머리 아저씨에 대해 파기 시작하자, 호박이 넝쿨채로 주렁주렁 끝도 없이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딸려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정지된 생명: 중세 문화의 고통, 쾌락, 형벌(2)

[도판 1] ‘매달린 사람’, 비스콘티-스포르자(Visconti-Sforza) 타로키(타로) 카드, 1445년경. 뉴욕 피어몬트 모건 도서관.

[도판 1] ‘매달린 사람’, 비스콘티-스포르자(Visconti-Sforza) 타로키(타로) 카드, 1445년경. 뉴욕 피어몬트 모건 도서관.

1장 하늘과 땅 사이에

적을 매다는 세련된 기술

사람을 매다는 이미지를 묘사한 또 다른 형벌 도상 장르의 주제는 바로 조롱이었다. ‘피투레 인파만티(Pitture infamanti)’라고 하는 이것은 남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그린 초상화로서, 로마법의 ‘파마(fama)’와 ‘인파마(infama)’의 고대 교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그림들은 13~16세기 북이탈리아 도시의 주요 재판소 벽에 흔히 그려져 있었으며 그 주된 기능은 법정을 모독한 배신자나 채무자를 겨냥해 일종의 연행적인 모욕을 주는 것이었다. ‘피투레 인파만티’의 희생자들을 그림 속에서 죽이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신에 다양한 모욕적인 자세─주로 한쪽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린 자세─를 취한 모습으로 그리곤 했다. 이탈리아의 비방용 초상화는 문헌 기록과 스케치로만 전해지며, 공개적으로 제작된 그림이 현재까지 남아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는 타로 카드 안에 있는 ‘매달린 사람’의 아이콘과 비교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타로 카드는 1440년경 북이탈리아에서 제작되었는데, 이것이 아마도 당시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비방용 초상화를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최고(最古)의 유물일 것이다(도판 1).

‘피투레 인파만티’의 제작과 감상에 중요한 역할을 한 요소는 주로 계급 구분이었다. 여기에 그려진 대상은 주로 상류층 남성들로서(여성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손상될 것을 염려할 만한 명예를 갖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모욕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참수형을 받을 특권이 허락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교수형이라는 모욕적인 처벌 방식과 연관시킴으로써 유효해지는 것이었다. 교수형과 성인(聖人)이 연관된 유일한 사례는 성 히에로니무스가 억울한 판결로 교수대에 매달린 사람을 구해 준 기적 이야기(도판 2) 하나뿐이며, 그나마 성인 자신이 목 매달린 모습을 재현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 종교적인 맥락에서 교수형은 가장 치욕스런 죽음, 즉 유다의 자살과 결부되어 있었다. 따라서 ‘피투레 인파만티’는 유복한 희생자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교수형과 치욕과 사회적 망신이 연관되어 있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작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의 이면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그중에서도 거꾸로 매달린다는 모티프의 의미는 무엇일까?

[도판 2]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 15세기 후반, 제단 패널에 채색,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판 2]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성 히에로니무스가 두 교수형당한 사람을 구하다>, 15세기 후반, 제단 패널에 채색,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판 3] ‘여우 레이너드를 목 매다는 거위들’, 15세기, 장의자 옆면 조각, 성 미카엘 교회, 브렌트 놀, 섬머셋.

[도판 3] ‘여우 레이너드를 목 매다는 거위들’, 15세기, 장의자 옆면 조각, 성 미카엘 교회, 브렌트 놀, 섬머셋.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거꾸로 매달린 모습의 재현은 ‘문두스 인베르수스(mundus inversus, 거꾸로 뒤집힌 세상)라는 개념을 전달한다. 그리고 상징적 전도(顚倒)의 모티프는 코미디의 주된 원리 중 하나다. 인류학자들은 전도를 ‘안전밸브(Ventilsitten)’, 즉 ‘김을 빼서 위험성을 중화하는’ 수단으로 이해하곤 한다. 즉 상징적 전도는 우리를 가역적인 과정에 참여시킴으로써 근원적 형태의 놀이를 이끌어 내며,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역할을 간접적으로 실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도판 3)은 15세기 후반~16세기 초반 영국 서머셋의 브렌트 놀(Breant Knoll)에 있는 한 교회의 장의자 옆면에 조각된 작품으로, 한 무리의 거위들이 여우 레이너드를 교수대에 매달아 끌어올리는 우화 속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자연 질서의 일시적 전복에 근거한 장난스럽고 희극적인 측면을 환기하고 있다. 이 우화 속에서 여우 레이너드는 강간, 살인 등의 죄목으로 왕 앞에 불려가 재판을 받고 법정에서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원래의 텍스트에서 여우는 성지순례를 떠난다는 조건으로 결국 풀려나게 되지만, 의자 측면에 조각된 이미지에서는 끈에 목이 졸려 매달려 있다.

[…] 뒤죽박죽으로 본말이 전도된 세계의 은유는 북유럽에서 이탈리아의 비방 회화와 가장 유사한 장르인 독일의 ‘샨트빌더[Schandbilder, 망신을 주는 그림이라는 뜻─옮긴이]’에서도 중요하다. 이러한 이미지는 묘사된 사람을 망신 주기 위해, 종이 또는 양피지에 그려서 조롱하는 글귀를 덧붙여(이럴 경우에는 셸트브리페[Scheltbriefe, 비난하는 편지라는 뜻─옮긴이]라고 한다) 피해자의 집 대문이나 공공장소에 게시했다. ‘샨트빌더’는 국가 기관이 아니라 개인들 사이에서 사적으로 널리 행해졌다는 점에서 ‘피투레 인파만티’와 다르다(이탈리아에서는 비방 회화를 개인적으로 그려서 게시하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긴 해도 그것이 기능한 방식은 아주 비슷했다. 비행을 저지른 범법자─주로 채무자─를 모욕적인 자세로 그려 게시함으로써, ‘법정 바깥의’ 처벌 효과를 노리고 상대로 하여금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일찍이 오토 후프(Otto Hupp)는 이 장르에 대해 상세히 연구하여, 1379~1593년 사이에 제작된 총 39점의 ‘샨트빌더’와 ‘셸트브리페’의 목록을 작성하였다(이 중 1500년 이전에 제작된 것은 15점이다). 최근에는 연구가 더욱 진척되어 당시 독일 북부를 중심으로 제작된 비방 회화가 100여 점까지 발견되었다. 가장 흔한 비방 양식은, 범법자가 암퇘지나 암나귀나 암캐의 항문에 자기 가문의 인장을 찍고 있는─그래서 결국 가문에 똥칠을 하게 되는─광경을 재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리가 밧줄에 묶인 채 거꾸로 매달린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흔했다. 1438년 뢰벤슈타인의 요한이 헤세의 루드비히 백작을 대상으로 제작한 ‘셸트브리페‘(도판4)에서, 채무자는 멋진 예복을 입은 채 거꾸로 매달려 까마귀가 발을 쪼아 먹고 있고(관습상으로는…눈을 쪼아 먹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는 상징적 전도를 드러낸다), 그 옆에는 그의 문장(紋章)이 역시 거꾸로 매달려 있다. 그림 위에 덧붙인 문장에 보면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경위─백작의 성에서 수프 한 사발을 놓고 싸움 끝에 충동질되었다는─를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유다를 지저분하게 빗대어, 불만의 원인이 돈과 관련한 분쟁임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이 글에서 요한은, “유다가 스스로 목매달았을 때 불었던 바람이 그의 눈과 귀에 불어 닥쳐서 그는 앞으로 다시는 명예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리라”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실용적인 목적은 분명하다.

[도판 4] 뢰벤슈타인의 요한(Johann of Lo+wenstein)이 헤센의 루드비히(Ludwig of Hesse)에 대해 쓴 셸트브리페(‘비방문’), 1438년 11월 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시사(市史)연구소.

[도판 4] 뢰벤슈타인의 요한이 헤센의 루드비히에 대해 쓴 셸트브리페(‘비방문’), 1438년 11월 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시사(市史)연구소.

…이상이 우리가 그의 모욕적인 그림을 그의 문장과 함께 걸어 두는 이유이다. 우리는 그와 그의 가족이 앞서 기술한 식으로 자행한 부당한 행위에 대해서 존경할 만한 이들이 인정할 만큼 베상할 때까지 이 그림을 계속 걸어 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매달린 그림을 보고 자비심을 구하는 자들에게 이 그림에 손대지 말 것을 청하는 바이다.

1490년 레겐스부르크의 두 유대인인 사이드로와 아이작 스트라우빈저가 한스 주드만을 상대로 제작한 ‘샨트빌더’에서도 희생자는 마찬가지로 기사 제복을 입은 채로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려, 악마가 그의 머리 주위를 몽둥이로 때리고 있다.(도판 5)

[도판 5] 사이드로와 아이작 스트라우빈저(Say+dro and Isaac Straubinger)가 한스 주드만(Hans Judmann)을 상대로 그린 샨트빌더(Schandbilder ‘비방화’), 1490년, 독일. 17세기에 제작된 사본. 바이에른 주립문서보관소, 뮌헨.

[도판 5] 사이드로와 아이작 스트라우빈저가 한스 주드만을 상대로 그린 샨트빌더(‘비방화’), 1490년, 독일. 17세기에 제작된 사본. 바이에른 주립문서보관소, 뮌헨.

이들 대부분의 사례는 […] 직접적 사형 행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독일의 ‘샨트빌더’에서는 이따금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목이 매달리거나, 수레바퀴에 묶여 사지가 부러지거나 심지어는 기둥에 못 박힌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이 거꾸로 매달린 이미지는 통상적인 교수형의 관습을 연상시키고자 의도한 것은 아니다. 이는 그보다는 당시에 실제로 가끔 시행되었던 유사한 형벌─소위 ‘유대식 처형(Jewish execution)’이라고 하는 것으로, 여기서 유대인 범죄자는 사나운 개들과 나란히 산 채로 거꾸로(어떤 경우는 한 발로) 매달린다─과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처형 의식은 중세 독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멀리는 스페인에도 기록된 사례가 있지만, 이 관습을 수록한 현존하는 법령집은 중세 거의 끝 무렵 혹은 그 이후에 쓰인 것이다. 유대식 처형에 대한 최초의 정의는 16세기 초 울리히 탱글러의 <일반인의 귀감>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유대교의 이단’을 완강하게 고집하는 자에게 부과되는 속죄 행위라고 해설하고 있다. 한편 이 형벌에 대한 가장 상세한 묘사는 17세기 후반 또는 18세기 초반 스위스 글라루스 주(州)의 법령집에 기록되어 있다(여기서 제시하는 견해도 앞의 문헌과 일치한다). 이 법령집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그는 절도범으로서 밧줄이나 사슬로 발을 묶어서 특별히 세운 교수대에 매달되, 그 양 옆에 사납고 으르렁거리는 개를 함께 매달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풀이나 목초가 그 아래에서 자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높이 매달아, 그는 땅에서 멀리 떨어져 개들과 새들과 허공에 내맡겨질 것이다. 그리고 판사와 군중과 경비병은 교수대 주위에 모여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것을 지켜볼 것이다.

이 인용문은 […] 사람을 매다는 상징의 중요한 측면, 즉 정지(매달림)─지연된 죽음─의 모티프를 전하고 있다. 형벌 받는 유대인의 운명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있다.

베네치아에서 바젤로 파견된 사절인 파두아의 안드레아 가타로가 쓴 일기는 이 관습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이다. 이 일기에는 1434년 두 독일계 유대인이 절도범으로 체포되어,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고문당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결국 둘 중 하나는 개종하여 참수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개와 함께 거꾸로 매달리는 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밧줄로 교수대 위에 끌어올려져 거기 한동안 매달려 있다가 ‘그의 예언자들이 자신을 구원해 주지 않음을’ 깨닫고 마침내 동정녀 마리아를 외치며 도움을 청했다. 그 순간 개 짖는 소리가 누그러졌고 죄수는 밑에 서 있는 수도사를 향해 “기독교도가 되겠소!” 하고 절규했다. 비방용 도상과 유사하게, 여기서 묘사한 의식에도 상징적 전도가 들어 있다. 즉 거꾸로 매달리는 것은 유대인의 명예에 대한 모욕을 나타낸다. 동시에, 유대인의 개종을 재현한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이 이야기 또한 유대인의 완고함에 대한 반유대적 판타지를 지속시킨다. 즉 범법자에게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운명에 대해 숙고할 시간이 주어지지만 그는 개종하지 않는다. (방금 소개한 사례에서, 매달린 유대인은 결국 사면되었다.) 교수대 위의 전도를 통해서 이 유대인이 인간과 짐승 사이의 분리라는 또 다른 형태의 상징적 전도와 융합되었다는 것 역시 의미심장하다. 에스더 코헨에 따르면, 거꾸로 매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해친 짐승, 그중에서도 특히 돼지에게 행한 형벌이었다고 한다(유대인은 돼지고기를 금지하는 레위기의 구절을 통해서 돼지와 결부된다). 그래서 방금 인용한 사례에서 절도범들은 ‘짐승처럼 죽지 않으려면 기독교도로 개종하라고 계속해서 강요당했던’ 것이다. 그 유대인 희생자는 유다처럼 기독교도로서 합당한 사회적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비천하고 짐승 같은 종말을 맞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문지방 위의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도판 6] ‘유대식 처형’, (스트라스부르크: Matthias Hupfuff, 1512-15년경).

[도판 6] ‘유대식 처형’, <유대인에 의한 성모 성화의 모독 및 수치>(스트라스부르크: Matthias Hupfuff, 1512-15년경).

유대식 처형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예는 매우 드문데, 그중 하나가 14세기 초 에노(Hainaut, 지금의 벨기에) 지방 캠브론의 시토 수도원에서 동정녀의 이미지를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유대인들이 처형된 사건을 재현한 대형 팸플릿이다. 16세기 초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인쇄된 이 팸플릿에는 그중 주모자였던 윌리엄이 받은 일련의 시죄(試罪) 광경이 목판화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문과 결투 재판을 거친 끝에, 결국 교수대와 끌려와 거꾸로 매단 채 그 밑에 불을 지피고 양 옆에 개를 매다는 형벌을 받았다(도판 6). 거기에 앞서 등장하는 이미지에는 윌리엄이 칼을 꽂은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피를 흘리는 기적이 묘사되어 있다. 몽(Mons) 시 부근의 한 교회에 있는, 역시 성상을 훼손해 처벌 받는 유대인을 그린 그림도 이 목판화와 놀랄 만큼 유사하다. (지옥불 또는 교회법에 따른 가장 가혹한 형벌 방식을 가리키는) 불의 모티프는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천벌 사이에 매달려 정지한 유대인의 상황을 전달한다. ‘샨트빌더’처럼 이 목판화에서도 희생자의 전도된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 시체를 쪼려고 달려드는 까마귀의 도상을 이용하고 있다. ‘사이에 있음’의 모티프는 앞서 인용한 대로 유대식 형벌에 대한 후대의 법적 정의에도 들어가 있지만, 이 이미지에 덧붙여진 텍스트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이 유대인은 ‘두 커다란 개를 양 옆에 두고, 거꾸로 매달린 채 땅에서 유리되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이 글은 계속해서 이 형벌이 ‘날이면 날마다 혐오스러운 범죄를 저르고 우리의 종교를 욕되게 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처벌하는’ 본보기이자 ‘속죄’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판 4, 5의 ‘샨트빌더’와 유대식 처형의 도상 사이에는 분명한 유사점이 있다. ‘샨트빌더’의 목적은 자살자에게 가해지는 사후 처벌과 유사하게, 현실의 법정에서 실망스럽게도 형벌이 유보된 자를 대상으로 모욕을 주려는 것이다. 유대인 범죄자의 처형처럼, 거꾸로 매다는 형벌은 사회적 지위와 운명이 말 그대로 공중에 높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물론 ‘샨트빌더’는 재현물을 통해 가상의 처벌을 내리는 것이고, 유대식 처형은 실제로 집행된 증거가 있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둘 다 불안정한 정지(매달림)의 논리에 기대고 있다는 점은, ‘샨트빌더’와 반유대주의의 틀이 어떤 차원에서 상호 교감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예컨대 비방 회화를 제작한 사람들이 비유대인을 모욕하기 위한 재현물을 만들면서 사람을 짐승과 동일시하는 반유대주의의 언어를 직접적으로 갖다 썼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유대식 처형이 비방 회화의 도상적 ‘전거’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있지만 그렇게 분명한 계보를 확립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최소한 유대식 처형·짐승 처형의 시각적 재현과 실제 집행은 독일의 ‘샨트빌더’를 해석하는 적절한 틀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즉 유대인이라는 모욕과 거꾸로 매달리는 형벌을 결부시켜 그림에 묘사된 사람의 굴욕을 배가하는 효과를 노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중세 독일에서 거꾸로 매달린 사람의 이미지가 불러일으켰던 심상은 어떤 면에서는 ‘피투레 인파만티’에서 연상된 것과는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 나는 독일의 ‘샨트빌더’를 보았던 사람들이 처벌 받는 유대인의 원형적 이미지를 통해 이 도상을 이해했다고 제시하고자 한다.

[도판 7] 브루더 글라드벡(Bru+der Gladbeck)이 프리드리히 폰 니어하우젠(Friedrich von Niehausen)과 그의 보증인에게 보낸 슈만브리페(Schma+nbrief, ‘비방문’), 1525-6, 독일. 헤센 주립문서보관소, 마르부르크.

[도판 7] 브루더 글라드벡이 프리드리히 폰 니어하우젠과 그의 보증인에게 보낸 슈만브리페(‘비방문’), 1525-6, 독일. 헤센 주립문서보관소, 마르부르크.

‘샨트빌더’의 반유대적 배경은 또한 채무자가 자신의 인장을 암컷 짐승의 항문에 찍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셸트브리페‘(도판 7)와, 유대인이 암퇘지의 젖을 빨고 그 배설물을 먹는 광경을 재현한 그림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후자는 13세기부터 독일어 사용권에서 유행한 것으로서, ‘유덴자우[Judensau, ‘유대 암퇘지’라는 뜻─옮긴이]’라는 도상 장르를 구축하고 있다(도판 8). 희생자를 짖어 대는 두 마리 개와 나란히 매달아 놓는 유대식 처형과 유사하게, ‘유덴자우’에서도 유대인은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라 젖 먹는 새끼 돼지처럼 이질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즉 사람을 짐승과 동일시하고 배설물로 더럽히는 언어를 통해 한편으로는 신분이 높은 비유대인의 명예를 더럽히고, 한편으로는 유대인을 가장 혐오스런 짐승과 결부시키려(도판 7의 ‘유덴자우’ 이미지에 쓰인 글귀 중 하나는 “그래서 우리는 구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의도했음을 알 수 있다.

[도판 8] , 15세기 독일의 판목으로 1700년경 제작된 목판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역사박물관.

[도판 8] <유덴사우(Judensau)>, 15세기 독일의 판목으로 1700년경 제작된 목판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역사박물관.

따라서 똑같은 비방용 도상처럼 보이는 것들도 전달하는 메시지는 서로 다르며, 시대적·지역적 특성에 따라 내러티브가 다르게 착색된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비방 초상 간의 가장 명백한 차이는 그 제도적 위상에 있다. 이탈리아에서 ‘피투레 인파만티’는 일반적으로 공권력의 도구였다. 묘사된 개인은 거의 예외 없이 부유한 귀족이었고 그 초상화는 지위나 혈통과 관계된 이슈와 결부되어 있었다. 독일의 ‘샨트빌더’의 ‘희생자’들도 비슷하게 유복한 계층이지만 이탈리아의 경우와 달리 사적 개인과의 분쟁에 휘말린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중세 독일에서 금전적 부채로 야기된 사회적 긴장이 일부분 반유대적 분위기를 띤 불명예스러운 이미지를 통해 표현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유대식 처형을 묘사한 이미지(도판 19)와 비방 초상화 사이의 유사성이 ‘피투레 인파만티’를 보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유효한 해석틀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의 맥락에서 비방 회화는 상류 계층에서 유행한 특정 초상화 장르(‘우오미니 파모시’)의 전도를 암시함으로써 잠재적 효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독일어권의 비방 회화는, 인간성을 박탈하는 반유대적 정서(명예가 훼손된 개인이 유대인들처럼 수성[獸性]을 띠게 된다는 생각)를 불러일으킴으로써 그 효력이 작용하였다. 물론, 독일의 비방 회화 중에서도 그림을 교사한 사람 자신이 유대인인 경우가─한스 주드만을 그린 샨트빌더(도판 5)─하나 있기는 하다. 아마도 이 경우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기독교도가 유대인에게 가하는 모욕을 거꾸로 기독교도에게 되돌려 주는 공격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형세의 이러한 역전은 실로 전복적인 암시를 띠지만, 이러한 전략이 행해진 보다 큰 맥락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전도의 은유는 유대식 처형의 상징적 언어에서 큰 몫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중세 후기의 수많은 신성 모독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요소였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유대인들은 성체를 훼손하면서 성찬식의 관습을 뒤집고 흉내 낸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유대인들을 향한 실제 폭력의 광풍을 선동하기도 했음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중세 유럽이 사람을 매다는 도상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을 매다는 하나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여러 특수한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중세의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 반유대주의의 언어와 모욕의 언어 사이의 상호작용은, 불명예와 유대인의 정체성과 동물성을 서로 결부시켜서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편견의 악순환을 창출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