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노이라트라는 인간(3)

“나는 빈의 학구적인 집안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이미 책이 가득 찬 선반과 찬장을 바라보며 자랐고, 거기서 받은 인상은 이후 평생 동안 내 곁에 머물렀다. 우리 집의 현관에는 책과 팸플릿이 꽉 들어차 있고 유리문이 달린 엄청나게 큰 책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천장까지 닿은 책 선반들은 거실과 아버지 서재의 사면 벽을 빼곡히 채웠다. 나중에는 나와 동생 방의 선반도 책으로 채워졌다.
나는 그 서재 안에 있는 책의 권수를 헤아리면서 어림수 구하는 법을 처음 익혔던 것 같다. 나는 선반의 개수와 선반 하나에—대부분 두 줄 깊이로—배열된 책의 권수를 세어, 합계가 총 1만 3천 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책들 전부가 다 내 차지였다. 나는 서재 전체를 마음껏 헤집고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제대로 글을 읽을 수 있게 되기 전에, 나는 그림과 사진이 있는 책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책들을 좋아하게 된 것은 서재의 배치 때문이기도 했다. 주로 그림과 지도가 수록된 커다란 책들은 손이 닿기 쉬운 책장 맨 아래칸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선반에서 그 책들을 꺼내어 펼치고, 아이들이 곧잘 그러듯이 바닥에 엎드려서 그림들을 구경했다.
나는 색채가 선명하고 모호하지 않게 그려진 그림들을 좋아했다. 직공들이 공구를 가지고 일하는 모습을 묘사한 책들이 있었는데, 나는 곧 그 주요 도판 속에 나오는 공구들이 실제 작업장에서 쓰이는 도구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부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거나 아무 것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는 그림들을 마주칠 때면 더더욱 신경이 거슬렸다. 나는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그림책들이 오류투성이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어떤 그림이 특별히 유익하다거나 모호하다거나 짜증난다는 말을 아버지한테 한 기억은 없다. 도판들은 의사소통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미적이거나 역사적인 관점에서만 논의되었다…아마 시각적 디테일에 대해 논하는 전통이 당시에는 부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오로지 책에만 파묻혀 생활했다고 여기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바깥 활동도 많이 했다. 우리 가족은 매년 몇 달씩을 시골에서—때로는 산간 지방에서—보냈기 때문에 나는 나무와 꽃, 나비와 애벌레, 소와 말, 손으로 만드는 갖가지 도구들, 시내와 연못에 익숙해졌다. 나는 작은 물레방아들을 직접 만들어 개울에 놓기도 했고, 한번은 역사책에 실린 그림을 보고 라인 강에 카이사르가 놓았던 것과 똑같은 다리를 짓기도 했다. 이 작은 구조물은 대단히 튼튼해서 (마른 땅 위에 놓은 다리이긴 했지만) 내가 그 위에 올라가도 끄떡없었다. 빈의 박물관들 역시 나의 시각적 성장 환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토 노이라트의 자전적 노트에서 발췌한 그의 어린 시절’, Otto Neurath, Empiricism and Sociology, 1973, 4-5p.)

오토 노이라트의 아버지 빌헬름 노이라트는 당대의 저명한 정치경제학자이자 사회 개혁가였고, 오토는 아버지가 지녔던 백과사전적 박식함과 개혁 의지를 고스란히 물려 받았습니다. 빌헬름 노이라트는 과잉 생산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산업을 (바로 국유화하지 않고) 정부 통제 하에 두거나 오너/경영자의 관리를 노동자 평의회의 관리로 대체한 범기업연합(pan-cartelism)을 제안한 바 있는데, 이는 훗날 그 아들이 구상한 ‘연합 사회주의(associational socialism)’ 모델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노이라트는 빈에서 철학, 수학, 물리학을, 베를린에서 역사학, 경제학, 철학을 공부하고 1906년 베를린에서 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데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키케로의 <의무론>과 고대 이집트의 비화폐 경제에 대한 것이었음을 보면 그의 경제/사회학적 상상력의 뿌리가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현물 경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 사상으로부터 자신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경제 모델을, 이집트의 상형 문자로부터 보편적인 시각 언어를 착안하게 된 것이죠.

1910년경 그는 빈에서 수학자 한스 한, 물리학자 필립 프랑크 등과 함께 에른스트 마흐, 피에르 뒤엠, 앙리 푸앵카레의 과학 사상을 주로 논하는 철학 토론 그룹을 만듭니다. 이 모임은 1929년 정식 출범하게 된 빈 학단(Vienna Circle)의 전신이 되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이 모임을 ‘제1 빈 학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1 빈 학단에 대한 설명은 <과학철학> 13-1호(2010)에 실린 고인석 선생의 논문 ‘빈 학단의 과학 사상’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이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마흐의 과학사상이 지배력을 행사하던 빈 대학에서 공부한 공통의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이들은 유태계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었다…한과 노이라트, 프랑크 등은 빈의 카페하우스에 모여서 학문과 사회를 논했다. 학문적 차원에서는 특히 당시 이론물리학과 수학, 논리학의 새로운 성과들이 이들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요 관심사에 실천적 의미의 사회주의 계몽운동이 있었던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63-64쪽)…제 1 빈 학단의 시기에는 ‘학문의 존재의미는 인간의 생존과 번영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마흐의 관념이 ‘정제된 학문을 통한 계몽, 혹은 사회적 삶의 고양’이라는 실천적 지향성의 원천으로 뚜렷이 남아 있었다.(71-72쪽)”

1910년대 초에 노이라트는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당시 전쟁 중이던 발칸 반도를 여행하며 전시 경제에 대한 여러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또 1차 대전 중에는 빈 중앙정부의 전쟁부 내에 전시경제와 관련된 부서를 만들 것을 건의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고, 이어 라이프치히에서 ‘독일전시경제박물관’의 관장을 지내며 나중에 빈 사회경제박물관에서 완성될 시각화 작업의 초기 단계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전시의 배급 경제에 대한 이런 연구와 경험은 그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대비되는) 사회주의적 ‘관리 경제(Verwaltungswirtschaft)’ 혹은 (화폐 경제와 대비되는) ‘현물 경제(Naturalwirtschaft)’ 모델을 완성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전시 경제를 통해 현물 경제로’라는 제목의 논문집 서문(1919)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글들은 자유 교환 경제의 시대가 끝나고 관리 경제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으며, 화폐 경제는 해체되어 철저히 조직된 현물 경제에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의거하고 있다. 아버지의 지적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나는 위기와 도탄에 빠진 전통적 경제 질서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자라났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듯한 모든 흐름에 주의를 집중했다…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세계 대전이 미래의 관리 경제를 창출할 것이라는 견해로 나를 이끌었다. 여기서는 모든 노동력과 물자가 전쟁 수행을 위해 중앙에서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질서로부터 (정치 권력을 요하는)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모든 인민을 위한 관리 경제에 다다를 수 있을 듯 보인다.” (Otto Neurath, Empiricism and Sociology, 1973, 124p)

4E3F8A4A036ECA004D

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 1867-1922)

흥미로운 부분은 그의 이러한 급진적 계획 경제 구상이 아에게(AEG)의 2세 경영자였던 발터 라테나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라테나우는 1차 대전 중 정부 전시물자국의 책임자로서 독일의 전시 경제를 지휘하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의 관리•분배 체계를 확립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라테나우가 지휘했던 전시 경제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유시장가격을 폐지하여 물가를 고정시키고 물자를 분배하는 한편, 합성질소흡착법, 인조견, 합성고무, (달팽이로 만든) 합성수지, (도토리로 만든) 커피 등 혁신적인 대체상품을 개발했습니다. 전시물자국은 원자재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24개 기업을 감독했고, 식량공급을 규제하고 분배하기 위한 특수 행정부서인 전시식량청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1]

사실 라테나우는 단순한 자본가로 치부될 수 없는 개혁적 사상가이자 문필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기에 바이트를 할애하여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제가 보기에는 노이라트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인 것 같습니다).[2] 그는 전시물자의 생산과 분배를 지휘했던 경험을 토대로,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산업의 국유화 대신) 경영주의 참여하에 산업을 국가가 통제하는 ‘산업자치제’를 제안했습니다. 피터 드러커는 라테나우가 1차 대전 초기 국가의 설계자로서 기적적인 일을 해냈다고 평가하면서도 ‘전체주의 경제학을 설교하고 다닌 최초의 인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3] 라테나우가 제안한 ‘산업자치제’는 빌헬름 노이라트가 제안했던 범기업연합과도 일맥상통하며 이 두 가지는 오토 노이라트의 계획 경제 모델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사실 독일은 비스마르크 이래로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정부가 경제에 깊숙이 간섭해 온 유구한 전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산업을 통제하고 물자를 분배하는 이런 식의 계획 경제는 우리도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에 대해 정승일 선생이 쓰신 은혜로운 프레시안 서평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서평은 제가 그때까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노이라트라는 인물의 관점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한국 역시 30년 동안이나 ‘계획-계산 경제’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즉 1962년부터 1992년까지 우리나라는 6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실행했다. 그 계획경제는 광범위한 ‘계산’과 예측을 동반했는데, 그러한 계획경제의 수립 과정에는 수학으로 무장한 경제학자들만이 아니라 중화학공업화의 현장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공과대학 출신의 엔지니어들 역시 테크노크라트로서 다수 참가하였다. 왜냐하면 철강과 자동차, 전자, 화학의 전략 산업 육성에 필요한 대규모 설비투자의 양적•수학적 규모 탐색과 그에 필요한 (경제적) 비용 계산 등을 위해서는 경제학자와 공학자의 양 축이 모두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이라트가 주목하는 점이 바로 이 점이다. 즉 계획경제의 계산 가능성은 교환가치(화폐가치로 측정된)를 단지 노동가치(가상적 화폐(virtual money)로 측정된)로 대체하는 것(랑에와 그 이후 후계자들이 주장한)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며, 실물가치(사용가치) 그 자체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1973년에 시작된 중화학공업화가 노이라트와 비슷한 관점에서, 즉 신고전파 경제학의 시장가격 계산, 화폐적 계산보다는 공학도 출신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주도하는 실물적 계산에 더욱 의존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추진했던 계획 경제는 그가 대동아전쟁기에 경험한 일제의 전시 경제 체제를 모델로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일제와 나치 독일이 채택한 전시 경제의 모델이 된 것은 바로 1928년경부터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경제 계획’이었죠. 또 부하린,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스탈린은 1차대전기 독일의 전시경제—국가자본주의—모델을 분명히 참조했습니다.

당시에도 노이라트가 주변 사람들에게 때로는 ‘사회주의자’로, 때로는 ‘자본가들의 친구’로 불리며 딱히 규정하기 힘든 인물로 평가되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과거의 계획 경제와 전시 경제 경험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새겨져 있는데요. 과연 여기서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실패로 판명 났거나 시대착오적인 전망이 아닐까요? 하지만 노이라트가 생각했던 계획 모델은,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계획을 격렬히 거부하고 모든 사회 단위의 수평적이고 느슨한 연합을 지향했다는 데 결정적 차이점이 있음을 지적해야 합니다(여기에 대해서는 <화폐 없는 사회는 가능하다>의 4장에 나와 있습니다.) 1918년 독일혁명이 터진 뒤, 그는 바이에른 지역에 세워진 혁명 정부에 합류하여 자신의 이런 사회화 구상을 현실에 옮기고자 시도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번 업데이트 때 다루게 될 것입니다.

(다음 업데이트는 아마도 몇 달 뒤가 될 듯합니다.)

 

  1. 이반 버렌드 지음, 이헌대/김흥종 옮김, <20세기 유럽경제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8, 76쪽.
  2. 그는 일명 ‘예술가 기업주’로서 산업 디자인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1907년 당시 “확실히 중앙집중적인 통제 하에 있고 중앙집중적인 조직을 갖고 있는 유럽 최대의 산업단위 결합체”였던 AEG는 디자인 컨설턴트로 페터 베렌스를 고용해서 공장 건물부터 기업 로고, 서식류, 제품, 광고 포스터까지 기업의 모든 활동과 관련된 디자인을 의뢰했고, 미스 반 데어 로에, 발터 그로피우스와도 협업하여 AEG의 디자인 정체성을 수립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라테나우는 외무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1922년 우익 광신자들에게 암살당했고 이는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3. 피터 드러커, <경제인의 종말> 이재규 옮김, 한국경제신문사, 2008, 424쪽.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간(3)”에 대한 2개의 생각

    1. 유나영 글쓴이

      우선 댓글이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노이라트 전기 출간 소식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와, 이제서야 본격적인 평전이 나왔군요. 게다가 ‘정치적 전기’라니! 이제부터 독일어를 배워야겠습니다!
      딴 소리지만, 학생 시절 선생님 홈페이지와 칼럼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아마 기억 못하시겠지만, 환경사에 대해 여쭤보는 메일을 무턱대고 보내서 자상한 답장을 받은 적도 있고요. 그래서 선생님이 남겨주신 댓글이 더 반갑고 감회가 새롭습니다.

      응답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