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된 생명: 중세 문화의 고통, 쾌락, 형벌(1)

suspended<정지된 생명: 중세 문화의 고통, 쾌락, 형벌(Suspended Animation: Pain, Pleasure and Punishment in Medieval Culture, 2006)>은 런던 킹스 칼리지 교수인 로버트 밀스(Robert Mills)가 중세의 고문과 형벌 이미지를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해석한 책입니다.

suspended(매달려 정지한)는 사전적으로 허공에 매달려 정지한 채 이도저도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suspended animation(정지된 생명)’은 원래 생명 활동이 정지된 동면 혹은 가사 상태를 가리키는 의학 용어이지만, 이 책에서는 삶과 죽음 사이, 혹은 죽음과 죽음 사이의 경계 공간에 (중세 재현물 속의 고통 받는) 육체가 상징적으로 매달려 정지한 상태를 의미하며, 이 책 전체를 관통하여 저자가 내세우는 핵심 개념입니다.

이 책은 몇 년 전 어느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번역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출판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출간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작업한 책이기 때문에 이렇게 묻히는 게 아쉬워서 여기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책의 전문을 올리는 일은 저작권 문제도 있고 또 이 책의 이론적인 부분은 다소 난해하기 때문에, 이 중 몇몇 부분을 도판을 중심으로–주로 재미있는 부분들 위주로–발췌해서 나누어 올릴 것입니다.

서론: 다른 중세를 들여다보는 검사경[1]

‘그때는 빵 한 조각 훔쳤다고 목매달아 죽였잖아. 그러지 않았어?’라고 21세기의 문명화된 서구인은 대꾸한다. 이 말투에는 분명히 안도의 감정이 배어 있다. 우리는 이 진술이 시사하는 바 무섭고도 매혹적인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부터 편안하게 멀찍이 떨어져 있다. 감사하게도 현대 서구 세계에서는 죄와 벌이 그렇게까지 명백히 불합치하지 않는다. 이제 범죄자가 처벌받을 때 그 형벌의 혹독함은 최소한 그가 저지른 범죄의 무게에 보다 근접해 있다. 어떻게 옛날 사람들은 서로에게 그토록 부당하고 야만적인 행위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그러니 현대 세계는 얼마나 큰 진보를 이룩한 것인가!

그러나 앞의 문장을 끝맺는 ‘그러지 않았어?’라는 말은, 화자의 선언 속에 취약한 부분이 있다는 표시이며, 자기 자신의 정의가 위협받고 있음을 희미하게 인정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죽음과 차이(difference)에 대한 공포, 나아가 관음증적인 매혹, 심지어는 그에 대한 동일시─타자에 대한 매혹─이 이 표현을 둘러싸고 있다. […]

우리는 형벌의 공포가 어떤 부침을 겪으며 변화해 왔는가를 사색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비체성(abjection, 脾體性)’[2]의 개념과 맞닥뜨린다. 브로츠와프(과거의 독일 브레슬라우로 현재는 폴란드에 속해 있음)의 성체 축일 교회에 있는, 14세기 후반에 제작된 십자가상(도판 3)을 보자. 이는 대단히 도발적이고 감정에 호소하는 이미지이다. 이 조각은 그뤼네발트의 그림(도판1)이나 홀바인의 <죽은 그리스도(Dead Christ)> (도판2)같은 작품보다도 더욱 즉각적인 반응을 요한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1512-16년경, 콜마르 운티린덴 박물관

[도판1]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이젠하임 제단화> 1512-16년경, 콜마르 운티린덴 박물관

한스 홀바인, , 1520-22, 바젤미술관

[도판2] 한스 홀바인, <무덤에 누운 그리스도>, 1520-22, 바젤미술관

우선 전체 구도를 보면, 이 이미지는 부단히 아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힘줄이 돋고 뼈가 앙상한 그리스도의 팔은 굽은 십자가에 못 박혀 꼼짝달싹 못한 채 잔뜩 켕기어 뻗쳐 있다.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왼팔은 몸의 무게 때문에 팽팽히 당겨 있다. (말 그대로) 목재처럼 뻣뻣하여 금방이라도 어딘가가 툭 끊길 듯한 인상을 준다. 이 브로츠와프 조각에서 십자가에 아래로 늘어뜨려져 부자연스럽게 늘여진 몸의 골격은 ‘카데바[cadaver: 해부용 시체─옮긴이]’라는 단어의 어원─‘아래로 떨어지다’라는 뜻의 라틴어 ‘카데레(cadere)’─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리스도의 두 다리는 애처롭게도 한데 묶인 채, 아래로 가라앉는 상체의 무게를 지탱하려 몸부림치고 있다. 피투성이 속눈썹을 단 감긴 눈꺼풀을 따라 아래쪽으로 눈길을 향하다 보면, 이 이미지에서 가장 매혹적인 부분─그리스도의 옆구리에 난 상처─에 시선이 가 닿는다.

실레시안의 장인, , 1370-80년경, 나무 조각에 채색, 브로츠와프 성체 축일 교회. 현재는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 소장.

[도판3] 실레시안의 장인, <십자가상>, 1370-80년경, 나무 조각에 채색, 브로츠와프 성체 축일 교회. 현재는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 소장.

(그럴 수 있다면) 여기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그러면 우리는 상처에서 나온 피가 잔뜩 응고된 채 방울져 맺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관례적인 십자가 수난 이미지에서 상처의 피가 비교적 적게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이 깊은 상처에는 핏방울이 마치 번쩍이는 진주나 성체성사에 쓰일 포도송이라도 되는 양 나란히 열을 지어 맺혀 있으며, 그리스도의 손에 난 깊은 상처에서도 거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핏덩어리가 스며 나온다. 끊임없이 흐르는 핏물을 따라 옆구리를 두른 옷의 주름도 함께 흘러내리며, 몸 전체는 피부에 띄엄띄엄 리드미컬하게 흩뿌려진 작은 채찍 자국들로 뒤덮여 있다. 갈비뼈는 손풍금처럼 벌어져 있고, 피부는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홀쭉하게 꺼진 배에 잡힌 주름은 갈비뼈에 깊고 날카롭게 파인 홈과 서로 반향한다. 그리스도의 머리카락마저도 피투성이에 끈적이고 헝클어져, 옆구리의 상처에서 나오는 분비물과 구분하기 힘들 지경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를 그 중심에 놓는 문화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과잉의 상상력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1. 여기서 검사경(檢査鏡, speculum)은 뤼스 이리가레가 처음 도입한 개념으로 자가 검진용 질경(膣鏡)을 가리키며, 이 책에서 저자가 중세를 바라보는 방식을 은유하고 있다. “이는 플라톤식의 평평한 거울이 아니라, 자가 진단용 굽은 거울―접히는 거울―이다. 이 검사경은 단순히 역사를 초월한 정체성이나 일정한 거리를 둔 타자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접촉하는 함축적 지식의 장소이다.”
  2. 이는 프랑스 비평가인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제시한 개념이다. 비체(脾體), 이물질 등으로 번역되는 아브젝트(abject)는 오줌, 똥, 토사물, 시체, 썩은 음식물, 감염과 오염 같은 더럽고 혐오스럽고 역겨운 대상을 가리키며, ‘아브젝시옹(abjection)’은 주체가 아브젝트에 대해 갖는 느낌을 말한다.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를 문명화 과정에서 억압된 어머니의 몸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원시와 문명의 경계를 표상하며, 자신의 신체와 주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지만 결코 완벽하게 제거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 계속 남아 있으면서 끊임없이 주체를 위협하고 체제와 정체성을 어지럽힌다.―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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