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별 글 목록: 2014년 1월월

정지된 생명: 중세 문화의 고통, 쾌락, 형벌(3)

2장 살가죽 벗기기

[도판 1] ‘시삼네스의 체포’, 헤라르트 다비트(Gerard David), 의 왼쪽 패널, 1498년, 나무 패널에 유채. 흐루닝에 미술관, 브뤼헤.

[도판 1] ‘시삼네스의 체포’, 헤라르트 다비트, <캄뷔세스의 재판>의 왼쪽 패널, 1498년, 나무 패널에 유채. 흐루닝에 미술관, 브뤼헤.

‘시삼네스의 처형’, 헤라르트 다비트, 의 오른쪽 패널.

[도판 2] ‘시삼네스의 처형’, 헤라르트 다비트, <캄뷔세스의 재판>의 오른쪽 패널, 1498년, 나무 패널에 유채. 흐루닝에 미술관, 브뤼헤.

1498년 브뤼헤 시청의 ‘정의의 홀’에 설치된 헤라르트 다비트(Gerard David)의 <캄뷔세스 왕의 재판>(도판 1, 2)은, 이제껏 가장 주목을 끌면서도 아마도 가장 이해받지 못한 이미지―중세 후기로부터 이어 내려온 형벌의 잔재―를 담고 있다. 이 그림은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ae)>에 처음 기록된 고대 페르시아의 전설로서, 캄뷔세스 왕의 명으로 부패한 판사인 시삼네스의 살가죽을 벗기는 모습을 두 개의 패널에 묘사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중세 판본은 오리엔트를 비롯한 각지의 전설 및 고전 우화 모음집인 <게스타 로마노룸(Gesta Romanorum, ‘로마인의 업적’)>에 실렸는데, … <게스타>의 29장에는 어떤 판사가 거액의 뇌물을 받고 부정 판결을 내린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러한 편파적인 법 집행을 너그러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황제는 판사의 가죽을 산 채로 벗기라는 명을 내렸다.

그 판결은 즉시 집행되었고, 혐의자의 살가죽은 비슷한 죄를 저지르지 말라는 무시무시한 경고의 의미로서 재판관의 의자 위에 깔리게 되었다. 그 후 황제는 죽은 판사의 아들에게 같은 직위를 수여하고 재판관에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의를 집행하기 위해, 그대는 범법을 저지른 그대의 아비의 살가죽 위에 앉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대를 악한 길로 인도하는 자는 그의 운명을 기억해야 하리라. 그대 아비의 살가죽을 내려다보면서 아비의 운명이 그대에게 떨어지지 않도록 명심하여라.’

다비트의 두폭화(diptych)는 이 전설에서 네 개의 에피소드를 뽑아 재현하고 있다. 좌측 패널의 뒷배경에는 부패한 판사가 뇌물을 수수하는 장면이(도판 3), 전면에는 그가 캄뷔세스 왕에 의해 극적으로 체포되는 장면이(도판 1) 담겨 있다. 우측 패널에서 우리는 시삼네스의 살갗을 벗기는 소름끼치는 공개 처형 장면(도판 2)과 마주하며, 우측 위편 구석에서 이 이야기의 교훈―판사의 아들인 오타네스가 자기 아버지의 살가죽을 덮은 의자에 앉아 법을 집행하는 장면―을(도판 4) 엿볼 수 있다.

[도판 3] 도판 1의 세부. 뇌물을 수수하는 시삼네스.

[도판 3] 도판 1의 세부. 뇌물을 수수하는 시삼네스.

[도판 4] 도판 2의 세부. 법을 집행하는 시삼네스의 아들 오타네스.

[도판 4] 도판 2의 세부. 법을 집행하는 시삼네스의 아들 오타네스.

…다비트가 이 주제를 다룬 방식의 인상적이고도 독특한 점은, 오타네스가 자기 아버지의 살가죽으로 덮인 의자에 앉는 마지막 에피소드에 집중한 그 이후의 재현물과는 달리, 이 브뤼헤 패널화가 화폭 대부분을 시삼네스 자신의 체포와 처형 장면에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중세 후기 네덜란드 회화의 독특한 특성을 단순히 사실 그대로를 모방하는 미학으로 치부해 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앞으로도 보겠지만, 소위 다비트의 회화의 리얼리즘은 물질적 현실을 객관적으로 구체화한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의심의 여지없이 강력하다. 내가 이 두폭화에 대해 대중 앞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을 때 그 두 번째 패널을 학생들에게 보여 주면, 무서워서 반쯤 눈을 가리는 사람들이 최소한 몇 명씩은 있다.

… 현대 관람객들의 눈은 대부분 오른편 패널에 있는 사형수의 절개된 육체에 매료되는 동시에 혐오감을 느낀다. 이 작품이 현재 전시된 브뤼헤의 갤러리 안에 서서 관광객들이 줄 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공포스런 매혹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못 박혀 있거나, 충격을 받고 당황해서 슬그머니 지나쳐 버리거나 둘 중 하나이다(그들은 예쁜 그림을 보면서 한가한 오후를 보내려고 온 것이다). 현대의 감상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살가죽을 벗기는 장면이 그림에서 가장 심기가 불편한 부분인 것 같다. 이 작품에 대한 미술사학자들의 논의에서도 (비록 무시되긴 하지만) 은연중에 비슷한 반응이 엿보인다. 미술사 논저에서 이 그림은 칼라로 실리는 일이 드물고, 비체적 공포의 체현물로보다는 15세기 후반 회화의 보편적인 양식과 구성의 발전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지표로서 다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W. H. 제임스 윌(W. H. James Weale)이 다비트의 작품에 대해 쓴 최초의 연구 논문에서도 “사람의 피부를 발라내는 것은 당연히 보기 즐거운 일이 아니지만, 화가 자신이 이 주제를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강조하는 등 비슷한 불안감이 엿보인다.[1]

… 다비트의 <캄뷔세스 왕의 재판>을 수용해 온 역사를 보면 그런 식의 방어적 반응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사형수의 육체를 보는 것에 대해 끈질긴 거부 반응이 있는 것 같다. 주변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육체란 근본적으로 두려운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는 그렇게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사료와는 친숙해지기가 힘들다…그럼에도 유독 시삼네스의 육체로 눈길을 돌림으로써, 게다가 그것이 중세의 관람객들에게 미친 상상적·상징적 반향을 분석의 뼈대로 삼아, 나는 이 그림의 충격적이고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을 숙고하고자 한다…

피부의 의미

<캄뷔세스>의 이미지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적 내용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피부를 제거하는 형벌 그 자체의 성격이다. 피부는 신체가 점하는 공간적 범위의 한계선이자, 내부 장기를 감싸고 이것들을 충격에서 보호하는 표면이다. 동시에 특정한 의미를 띤 흔적을 새겨 넣을 수 있는 표면이자, 외부 세계와 내부의 감각을 중재하는 감각적 문지방이다.

… 중세의 종교적 텍스트에서 피부는 옷이라는 은유를 통해 구성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시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부를 ‘입었다’고 상상했다… 보다 세속적인 맥락에서 나온 문학 작품으로 눈길을 돌려도 피부는 역시 강한 헌신의 대상이다. 중세의 연애 서사에서 여성의 신체에 대한 묘사에는 매혹적인 피부에 대한 언급이 상투적으로 들어 있다. 반대로 병에 걸리거나 훼손된 피부는 혐오, 구토, 반발과 공포의 대상이다. 특히 나병으로 인한 피부병은 도덕적 결함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세의 나병 환자들은 시신을 매장하는 의례와 유사한 분리 의례를 거쳐야 했다. 훼손되지 않은 신체 표면이야말로 이승에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중세의 처형 절차에도 죄수의 사회적 죽음을 상징하여 희생자의 의복을 벗기는 과정이 있었는데 이는 전도(轉倒)의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체를 감싼 의복의 한계치인 피부 자체를 제거해 버리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을까? 피부는 곧 기억이라는 중세의 관념에 따르면, 산 채로 살갗을 벗기는 행위는 일시적 기억과 정체성이 쓰여진 신체의 표면을 떼어 없애고 그 자리(죽은 피부)에 ‘영구적인’ 교훈이 새겨진 양피지를 바르는 것이다.

[도판 5]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의 공방, , 1540년경, 패널에 유채, 베를린 국립박물관(회화 갤러리).

[도판 5]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의 공방, <캄뷔세스의 재판>, 1540년경, 패널에 유채, 베를린 국립박물관(회화 갤러리).

따라서 다비트의 그림은 고통 받는 신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객체가 되는 과정을 잔인할 정도로 똑똑히 드러내고 있다. 시삼네스의 처형을 목격하는 이들은 살갗을 벗기는 행위가 비체성(脾體性)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그 결과 생명 없는 물체에 교훈이 담기게 된다는 양 극단의 모순을 중재해야 한다…시삼네스의 살가죽이 법 집행의 물리적인 지지대로 활용되는 캄뷔세스 신화의 마지막 에피소드 또한 비슷한 효과를 낸다. 여기서 경계[피부―옮긴이]는 문자 그대로 하나의 객체가 된다…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의 1540년경 패널화에서는 살갗을 벗기는 장면이 원경으로 처리되고 살가죽이 오타네스의 머리 위에 위협적으로 걸려 있다(도판 5)…이러한 이미지에서 시삼네스의 살가죽에는 눈구멍이나 손가락, 발가락, 머리카락, 귓바퀴 등 예전에 달려 있었던 신체 일부분의 흔적이─마치 파괴된 줄 알았던 정체성을 외부로 표현하듯이─남아 있다. 시삼네스가 뇌물을 수수함으로써 정치체의 경계선을 범한 것처럼, 그 자신의 신체의 경계를 거스름으로서 위반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 다비트는 벗겨진 피부를 단순명료한 표면으로 묘사하였다(도판 4). 피부는 차라리 양피지를 만드는 데 쓰려고 매끈하게 다듬은 가죽에 가깝고, 인간의 신체임을 연상시키는 세부 묘사는 거의 없다. 따라서 다비트의 그림에서 피부의 위상은 비체성과 추상성 사이에서 동요한다. … 시삼네스의 운명은 신체 절단에 대한 중세의 뿌리 깊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동시에 그의 분리된 신체가 기억과 교훈적 진실을 뒷받침하는 힘을 지녔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공민적’ 미학

이러한 추론으로 살갗을 벗기는 모티프의 상징적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다비트의 작품을 그토록 공포스럽게 만드는 특정한 심미적 자질을 설명해 낼 수는 없다. 그러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차단하는 시각적 전략은 무엇인가?

[도판 6] 도판 2의 세부, 껍질이 벗겨지는 시삼네스의 팔.

[도판 6] 도판 2의 세부, 껍질이 벗겨지는 시삼네스의 팔.

[도판 7] 도판 2의 세부, 시삼네스의 찡그린 얼굴.

[도판 7] 도판 2의 세부, 시삼네스의 찡그린 얼굴.

…시삼네스의 신체를 연출한 방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가 신체의 세부를 놀랍도록, 거의 현학적일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희생자의 몸에 나 있는 모든 털들은─다리털, 음모, 심지어 젖꼭지와 겨드랑이 주변의 몇 가닥 털까지─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시삼네스의 팔에는 정맥이 뚜렷이 드러나 있고, 손목 주위의 살가죽은 밧줄로 단단히 묶여 밀려 있다.(도판 6) 그의 얼굴은 주름이 잡히고 목의 혈관은 도드라져 있다.(도판 7) 그렇다고 이 이미지가 ‘사실주의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 그림의 논리는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강한 심미적 요소가 들어있거나 혹은 상징적 덧칠이 되어 있다. … 다비트의 <캄뷔세스>의 우측 패널이 내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시삼네스의 몸을 묘사한 자연주의가 아니라, 이 그림이 취한 구성의 엄격성이 나 자신의 유동적이고 진행 중인 신체 경험에 들이대는 공격적 느낌이다. 그로 인해 나는 신체적 경험의 경계선, 죽음의 한계와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도판 8] 도판 2의 세부, 껍질이 벗겨지는 시삼네스의 다리.

[도판 8] 도판 2의 세부, 껍질이 벗겨지는 시삼네스의 다리.

그림 속의 형리들이 마치 필경사처럼 정확하게 각자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그런 느낌을 요한다. 그들이 마치 팽팽한 무명천 같은 판사의 피부를 째는 광경을 바라보자면 내 뱃속에서는 욕지기나는 느낌이 올라온다. 시삼네스의 왼쪽 다리에서 얇게 저며 낸 피부는 발꿈치까지 완벽한 직선으로 당겨져 있고 그 가장자리 부분에 자연광이 닿아 희게 빛나는데, 자연스런 곡선을 이루려는 인체의 성질을 거스르는 이러한 표현 방식은 보는 사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다리에서 벗겨 낸 살가죽은 팽팽히 당겨져 마치 접힌 부채처럼 곧은 주름이 서너 개 뭉쳐 있다.(도판 8)

의미심장하게도, 이런 식의 표현은 15~16세기 외과학 참고서의 삽화를 연상시킨다. 여기에 보면 외과 수술용 칼로 ‘살가죽 옷’을 깔끔하게 잘라 내거나, 살갗을 발라낸 신체가 한 손에 칼을 들고 한 손엔 자신의 벗겨낸 가죽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도판 9)─이러한 이미지는 다비트의 회화와 충격적인 상호텍스트를 이룬다. 이 패널은 또한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산 채로 해부하는 장면을 묘사한 동시대의 이미지─<장미 이야기(roman de la rose)>의 네덜란드 필사본 중에 들어 있는 에피소드를 묘사한 세밀화(도판 10)─와도 비교된다.

[도판 9] ‘피부를 벗긴 인물’, 후안 발베르데 데 하무스코(Juan Valverde de Hamusco), (로마: Antonio Salamanca and Antonio Lafresii, 1556) 중 목판화.

[도판 9] ‘피부를 벗긴 인물’, 후안 발베르데 데 하무스코, <인간 신체 구조의 역사>(로마, 1556) 중 목판화.

[도판 10] ‘아그리피나의 해부를 지켜보는 네로’, 의 세밀화, 1500년경, 네덜란드. 영국국립도서관, 런던.

[도판 10] ‘아그리피나의 해부를 지켜보는 네로’, <장미 이야기(Roman de la Rose)>의 세밀화, 1500년경, 네덜란드. 영국국립도서관, 런던.

… <캄뷔세스>에서 가장 심란한 측면은 형리들의 매우 진지한 태도로서, 이는 다시금 해부학 삽화와 병치된다. 예를 들어 <아그리피나> 세밀화에서 해부를 집행하는 우두머리는 소매를 걷어 붙이고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옆에서는 그 조수가 조심스레 칼을 쥐고 있다. 마찬가지로 다비트의 <캄뷔세스>의 형리들도 초연하고 사무적인 태도를 보인다. 신체 표면에 주의 깊게 선을 긋고 있는 이 전문가들은 오로지 자기가 맡은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다만 그림 오른편에 시삼네스의 팔을 받치고 있는 어린 조수만이 예외로, 산란한 듯이 관람객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림 속 인물의 눈길이 관람객의 시선과 마주치는 모티프는 성인 성녀의 순교 장면에서도 가끔씩 나타나는데(5장을 보라), 이것은 그림을 (1장에서 논의한) 일시적 정지의 이미지와 연결하는 테크닉이다. 그림 속의 장면에 관람객이 통합됨으로써 … 현대의 관람객들 역시 이미지를 눈으로 ‘접촉하고’ 안으로부터 경험하면서 이 그림과의 정서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서론에서 논의한 브로츠와프 십자가상이 분명히 보여 주듯이, 중세 후기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감정 이입하는 관계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다비트의 형벌 패널화에는 피가 거의 완벽하게 부재한 것이 인상적이다. 죄수의 몸에서 찾아볼 수 있는 피의 흔적이라고는 흉골과 허벅지를 따라 흘러내리는 몇 방울의 피와, 치아에 조그맣게 맺힌 피 한 방울(혹은 그냥 치아 하나가 빠진 구멍일 수도 있다)뿐이다. 형리 한 사람의 손가락 끝에서도 피가 조금씩 바닥으로 흘러 떨어진다. 어쩌면 수난 도상에서 피가 성체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피를 시삼네스의 몸과 연관 짓게 되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미지에서 피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극적인 서스펜스를 높이기 위해 작가가 취한 전략일 수도 있다. 어느 시점부터 진짜로 피가 흐르기 시작할 것인가…죄수는 언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피부가 완전히 벗겨졌을 때 사체는 어떤 모습이 될까? 작가는 이렇게 생명(움직임)이 정지한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일종의 ‘롤러코스터’의 미학─쾌락의 원천(서스펜스는 현대 공포 영화를 즐기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이자 불안의 원천이 되는 극적인 일시성─을 창출하고 있다.

[도판 11] 도판 2의 세부, 시삼네스의 처형을 구경하는 사람들.

[도판 11] 도판 2의 세부, 시삼네스의 처형을 구경하는 사람들.


…감상자의 반응에는 시삼네스의 몸 주변에 모여든 구경꾼들의 표정도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도판 11) 처형 집행인들과 매한가지인 그들의 금욕적인 몸짓은, 모든 본능적인 반응을 프레임 바깥의 관람객들을 향해 몰아내고 있다. 이는 이미지와의 정서적인 관계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테크닉이다. 앞에서 언급한 네덜란드 필사본의 해부 묘사에서는 자기 어머니의 살이 절개되는 장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네로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는데(도판 10), 이와 달리 이 그림에서 처형을 목격하는 시민들의 시선은 희생자의 몸을 무심히 지나치거나 아예 딴 곳을 쳐다보거나 혹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도판 12] 도판 2의 세부, 작업 중인 형리들.

[도판 12] 도판 2의 세부, 작업 중인 형리들.

마찬가지로 형리들도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할당된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이는 신체를 그 구성 부분으로 조각조각 쪼개어 바라보는 태도이다.(도판 12) 앞서 언급했듯이 신체 절단을 바라보는 중세의 태도는 양가적이었다. 그리스도의 매장이나 성인의 순교라는 맥락에서는 이러한 관습에 열광했지만, 그 외 다른 맥락에서 절단된 신체와 마주치면 공포를 드러냈다. 마찬가지로 다비트의 그림에서 구경꾼들의 태도는 이 그림이 지닌 비체성과 숭고성의 양 극단을 내비치고 있다. 그들의 초연한 태도는 희생자를 비인간화하고, 아직은 살아 있는 통일체로서의 몸을 향한 자연스런 반응을 억누른다. 시삼네스 개인의 정체성이 새겨져 있던 표면이 제거됨으로써, 그의 몸은 정치적 삶이 박탈되고 적나라한 목숨으로 전락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 그러나 구경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이 전하는 정의의 교훈을 숙고하는 것뿐이다. …

하지만 우리가 무리를 해서라도 (그럴 수 있다면) 살갗이 벗겨지는 육체 그 자체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여전히 의미를 담지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림 속의 구경꾼들의 시각에 저항하여 그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려면, 관점의 미세한 변화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시민들의 공허하고 무감동한 표정과 달리 고통으로 주름진 시삼네스의 얼굴을 관찰할 수 있다.(도판 7) 그의 일그러진 입에는 악문 이빨이 드러나 있고 긴장된 목에는 힘줄이 튀어 나와 있다(왼쪽 각막에 흰 점은 눈에 물기가 약간 비친 것 같다)…첫 번째 패널에서도 정의의 옥좌에서 끌어내려지는 시삼네스의 얼굴에는 불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난다. 이처럼 시각을 조금 이동하여 한 걸음만 비껴서 보아도 희생자인 시삼네스 자신은 관람자들의 신체에 공포의 반응을 아로새기며, 우리는 죄수의 공포를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의 맥락에서 다비트의 그림은 희생자와 동일시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니다. 이 그림의 목적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그림 속의 시민들(원래 이 사건을 목격한 관중들)과 동일시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 패널화를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다비트는 구경꾼들의 얼굴 중 상당수를 다시 그려 넣거나 수정하였다. 아마 이 그림이 완성되던 당시에 재직 중이던 시의회 의원과 닮은 얼굴을 재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신 유행에 맞추기 위해 꽃 장식, 아기 조각상, 고전풍의 원형 양각 부조 등의 모티프를 새로 추가하였다. 이런 변경된 요소들을 보면, 화가는 희생자와의 동일시보다는 구경꾼과의 동일시를─구경꾼 사이에 당시 실제 인물의 초상을 포함시킬 정도로─한층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화가가 감상자를 그림 속의 구경꾼들과 동일선상에 놓으려 했음을 되새긴다면, 그림에 대한 반응의 계급적 성격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그림은 15세기 후반 브뤼헤의 중산층 공민 계급이라는 매우 한정된 사회 집단을 염두에 두고 주문된 것이다. 초연함과 도덕적 우월성의 렌즈를 통해 작품을 보는 전통적 미술 비평과 유사하게, 이 그림은 ‘공민적 미학(burgerlijk aesthetic)’이라 할 만한 것을 체현하고 있다. ‘공민적 미학’이란 말하자면 엄정하고 무감동한 표현 모티프에 의한 재현 방식으로서, 본능적, 신체적 반응을 억제한다. 여기서 네덜란드 말인 ‘공민(公民, burgerlijk)’은 이 그림에 대한 반응의 계급적 성격─이 그림을 브뤼헤 시민들이 주문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또 이 단어는─이 말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도 그렇지만─여기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부르주아(Bourgeois)’보다도 교화되고 예의 바른 느낌을 전달한다…공민적 미학은 또한…보다 차갑고 소원하고 미학적인 감정을 수반한다. 이는 추하거나 조야한 것에 대해 방어적이며 결벽하다. 결벽성(fastidiousness)은 <캄뷔세스 왕의 재판>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처참한 육체에 참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고 배우라는’) 교훈적 진실에 대한 숙고를 환기시킴으로써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도판 13] ‘성 바르톨로메오의 순교’, 슈테판 로흐너,  중 한 패널, 1435년경, 목판에 혼합 재료. 슈테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도판 13] ‘성 바르톨로메오의 순교’, 슈테판 로흐너, <사도들의 순교(Martyrdom of the Apostles)> 중 한 패널, 1435년경, 목판에 혼합 재료. 슈테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동시에─중세의 공민들을 포함한─일부 감상자들이, 교화적이고 초연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요구에 저항하면서, 근대 비평가들이 지금껏 끈질기게 무시해 온 ‘고통 받는 육체’에 바로 초점을 맞추어 이 그림을 다른 방식으로 볼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예컨대 최소한 13세기 이후 종교 문헌의 필사본이나 패널화에는, 성 바르톨로메오가 살가죽이 벗겨져 순교하는 장면을 재현하는 뿌리 깊은 전통이 있어 왔다. 그 가장 인상적인 예는 15세기 슈테판 로흐너(Stefan Lochner)가 그린 <사도들의 순교> 제단화 중의 패널화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바르톨로메오는 완전히 알몸이 된 채 한쪽 팔의 살가죽이 너덜하게 반쯤 벗겨져 있다. 눈에 잘 띄게 채색된 핏방울이 그의 등을 타고 흘러내린다.(도판13)…. 성인을 본받자는 교훈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바르톨로메오의 이미지는 현저히 ‘희생자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띤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로흐너의 패널화에서 바르톨로메오는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종교 문필가들은 그들이 신앙하는 ‘고문 받고 고통 중에 있는 육체’가 되기를 갈망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이미타시오 크리스티(imitatio Christi)’라는 급진적 관습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다비트가 이 작품을 제작하던 당시 기독교 신앙의 맥락에서는, 고통 받는 몸을 바라보고 그와 동일시하는 유서 깊은 전통이 존재하고 있었다.

… 고통 받는 육체를 바라보고 거기에 대해 감정 이입하며 참여하는 행위는, 이 육체가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매개체로 변형되는 데 대한 저항으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고통 받는 몸의 이미지에 반응하는 관람객들은 역사의 요구에 저항한다. … 동시에 시삼네스의 신체적 고통과 관람객의 신체 사이에는 여전히 단절이 남아 있다. 이는 희생자의 고통 받는 신체가 실제로 우리의 신체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가가 죄수의 육체로부터 시민 정신과 법의 집행에 관한 교훈적 메시지(이는 관람객들을 과거 중세의 특정 시점으로 돌려놓는다)로 주의를 돌리기 위해 시각적 전략을 활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감정을 이입하는, ‘초역사적’ 반응을 몰아내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관람객들을 끌어들이려 시도한다. 우리가 보는 방식을 달리하여 이 그림의 중심에 있는 처참한 육체에 참여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우리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공포에 근접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내 견해로는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확립하고자 하는 것은 결벽증적이고, 육체로부터 분리되고, 자기로부터 거리를 두고, 초연한, 한마디로 말해 ‘공민적’ 반응이다.

 

  1. 예를 들어 Pa+cht, Early Netherlandish Painting, p.247에서는 시삼네스의 형벌에 대해 단순히 ‘메스꺼운 일’이라고만 언급하고 거기에 대해 보다 면밀히 질문하지 않은 채, 그의 분석을 형식적인 고찰에만 한정한다(‘인물 군상의 머리가 고전 부조 양식처럼 완벽히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는 둥, 살가죽이 벗겨진 몸이 ‘사선으로 후퇴한 공간’에 놓여 있다는 둥)….이는 그림이 그려진 표면과 그것이 감상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으로부터 딴 곳으로 주의를 돌리는 방법론이다.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간(2)

“오토 노이라트(1882-1945)는 20세기에 가장 인정을 못 받았던 천재 중 한 명이다. 그를 경탄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업적에 대해 개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많은 영역에서 개혁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통이 크고 쾌활한 성품이었으며 친구와 적을 동등한 정감으로 대한 것으로 유명하다…매우 설득력 있는 연설가이자 지칠 줄 모르는 조직자 노이라트는 특히 다양한 학제, 계층과 민족들 사이에 가교를 놓는 데 헌신했다… “모든 사람이 공동의 문화에 참여할 수 있고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들 사이의 심연에 다리가 놓이는 즉시 인간은 더욱 완전하게 이해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인간 발전기 노이라트처럼 경제 정신의 보급과 경계를 허무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단한 업적들이 인정을 받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에서 기술한 사상가들 중 어느 누구도 다방면에 박학다식한 노이라트만큼 기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없었고, 2차 대전 후 세계를 그렇게 잘 이해한 사람도 없었다. 그가 만약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한 문화의 영웅이 됐을 것이다…그가 관심을 두었던 그 방대한 학문적 영역을 볼 때, 어느 누구도 그가 산 세기에 그를 능가하지 못했다. 누가 과연 물리학, 수학, 논리학, 경제학, 사회학, 고대사, 정치학 이론, 독일문학사, 건축, 응용 그래픽 영역에서 진정한 연구를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헤르츨처럼 노이라트 또한 실천적 유토피아주의자였다. 그러나 그 씨앗의 결실은 다른 사람들이 거두었다. 성인 교육을 위해 그렇게 많이 노력한 그가 잊혀졌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분명 전문화의 희생양이었고 이것이 그의 백과사전주의를 조소하게 만드는 것이다. 빈 학파의 다른 어떤 학자도 그 집단적 업적을 노이라트만큼 훌륭히 해내지 못했다. 또한 어느 누구도 그렇게 당당히 통합적 사고로 오스트리아인의 재능을 구현한 사람은 없었다.”
(윌리엄 존스턴 지음, 김래현 외 옮김,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신사와 문화사의 재발견>, ‘오토 노이라트: 만능 천재의 사라짐’, 317-322쪽.)

“”오토 노이라트처럼 독특하게 대위법적인 저자를 독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그리고 자기가 알아낸 일부분을 전체로 착각함으로써 그를 오독하는 방법 역시 여러 가지다. 그의 다양한 활동 분야 중에서도 특히 경제에 대한 저작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조차, 사람들은 이를—또 그가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 시도한 것을—두고 그에게 서로 모순되는 딱지를 붙이곤 했다. 그는 ‘낭만주의자’이자 ‘광인’이었고, ‘공산주의자’이면서 ‘부르주아’였으며, ‘바보’인 동시에 ‘선지자’였다.”
(Thomas E. Uebel, ‘Introduction: Neurath’s Economics in Critical Context’ in Otto Neurath, Economic Writing Selection 1904-1945 (Springer, 2004), p. 1.)

오늘날 노이라트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조명되고 있습니다.

1. 논리실증주의 과학철학자
2. 아이소타입과 정보 디자인의 창시자
3. 사회주의 경제학자, 정책 기획자.

이 중 과학철학자로서의 노이라트에 대해서는 논리실증주의, 비엔나 서클, 통일과학운동에 대한 책과 글들을 통해 비교적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오늘날 픽토그램의 원형이 된 그림 언어 체계 ‘아이소타입’에 대해서도 디자인 분야에서 많은 책과 글이 나와 있죠.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 이론가/실천가로서 그의 면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부분입니다.

난점은, 그의 어느 한 측면만을 조명하면 그 한 가지 측면마저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는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소타입’은 그가 참여한 ‘붉은 빈’의 사회주의 실험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었으며, 언어의 통일을 통한 지식의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통일과학운동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 다층적인 면모를 한 사람의 저자가 종합적 시각으로 아울러 조망한 평전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과학철학 분야와 디자인 분야에 국한된 책들을 제외하면, 현재 그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책은 Vienna Circle Collection 시리즈에 포함된 (눈물 나게 비싼 T_T) 그의 저작집들입니다. 또 Vienna Circle Institute Yearbook의 한 권으로 각 분야의 여러 저자가 참여하여 펴낸 책이 하나 있는데, 리뷰를 보면 글들의 수준이 들쭉날쭉한 것 같습니다. 영어권에서 노이라트는 잊혀진 사상가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책을 (구글 번역기를 돌려 가며 독일 아마존을 수색한 결과에 따르면) 독일어권에서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혹시 제가 찾지 못한 그의 독일어 평전이 있다면 부디 알려 주십시오. 찾아도 읽지는 못할 테지만요.)

웹상에서 제가 찾은 자료 중 그의 사상 전반에 대해 가장 잘 정리된 글은 스탠포드 대학에서 만든 철학 사전의 ‘오토 노이라트’ 항목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가 올리는 글들은, 노이라트가 직접 쓴 글들과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의 존 오닐이 쓴 논문들을 제외하면 이 페이지의 정보에 크게 의존할 것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간(1)

<화폐 없는 세lifewithout계는 가능하다>는 여러 저자의 글들을 모은 책인데, 애석하게도 주요 편저자인 애니트라 넬슨의 글(1장과 11장)이 제일 딱딱하고 난해한 축에 속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들은 3장 해리 클리버의 글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원래 해리 클리버의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입말에서 탄생한 글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고, 그가 육성으로 토로하는 열정이 느껴집니다. (제가 느꼈다는 말이고, 그게 번역본에도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3장의 모태가 된 1993년의 인터뷰 원고는 그 번역본이 일찌감치 국내 인터넷에 돌아다녔고, 2002년 <자율평론>에도 소개된 바 있습니다.) 트윈 오크스 공동체와 스페인 스쿼터들의 사례를 소개한 9장과 10장도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글이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번역하는 과정에서 제게 가장 큰 자극을 주었던 글은, 바로 존 오닐이 쓴 4장이었습니다.

사실 이 글은 낯선 개념과 낯선 고유명사로 가득차 있어서 번역하기가 제일 골치 아팠습니다. (심지어 ‘화폐, 시장, 생태학’이라는 제목도 지루합니다. 실은 제목을 좀 더 재미있게 바꾸고 싶었지만 끝내 좋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편집자님도 뾰족한 대안이 없으셨던 듯.) 그런데도 이 글에 흥미를 느낀 것은 오로지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게 노이라트는, 20년 전 과학철학 수업 시간에–그러니까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칼 포퍼에 의해 반박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논리실증주의를 공부하면서 약 0.1초 동안 귓가에 머물고 간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 소개된 노이라트는 영판 다른 사람이더군요. 사회주의 계산 논쟁에 참여하고, 화폐 없는 현물 경제를 주장한 급진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데다, 실제로 사회주의 혁명에 참여하여 정책을 추진한 경력도 있더군요. 이거 금시초문이네. ‘실천적 맑시스트 과학철학자’라니 좀 섹시한데…그런데 이분께서 말씀하시는 ‘현물 경제’라는 게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생전 그런 걸 경험해 봤어야지 젠장… 하며 끙끙대고  있는데, 뒤에서 지나가던 배우자분께서 불쑥 물으셨습니다. ‘무슨 책을 하고 있길래 오토 노이라트가 나와?’

남편은 디자인 전문 편집자고, 저는 사회과학 출판사에서 일했던 연줄로 주로 정치/사회 쪽 책을 번역해 왔기 때문에 서로의 분야가 겹치는 일은 바람직하게도 전무합니다. 또 우리는 상대가 만드는 책에 대해 거의 소 닭 보듯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정말 희귀하죠.

들어본즉슨, 그 당시 배우자분은 오토 노이라트의 (세 번째) 부인 마리 노이라트가 쓴, ‘아이소타입’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분의 설명에 따르면, 디자인사에서 노이라트는 매우 중요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책은 이렇게 이쁘게 나왔고 transformer

(제목도 무려 ‘트랜스포머’. 이런 메카닉한 제목이라니.)

오토 노이라트가 마리 노이라트와 게르트 아른츠와의 협업으로 만들어 낸, 이렇게 아름다운 도표들이 실렸습니다.

transformer1

neurath_kraftwagen

이쯤 되자 저는 거의 성적인(…) 매력을 느꼈고, 이렇게 섹시한 두뇌의 소유자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사진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결과는…

 

 

 

 

 

 

 

neurath-otto

(묵념)

 

혹자는 제가 이 지점에서 퀘스트를 종료했으리라 추측할지도 모르나… 만약 그랬다면 그런 불찰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거구의 대머리 아저씨에 대해 파기 시작하자, 호박이 넝쿨채로 주렁주렁 끝도 없이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딸려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정지된 생명: 중세 문화의 고통, 쾌락, 형벌(2)

[도판 1] ‘매달린 사람’, 비스콘티-스포르자(Visconti-Sforza) 타로키(타로) 카드, 1445년경. 뉴욕 피어몬트 모건 도서관.

[도판 1] ‘매달린 사람’, 비스콘티-스포르자(Visconti-Sforza) 타로키(타로) 카드, 1445년경. 뉴욕 피어몬트 모건 도서관.

1장 하늘과 땅 사이에

적을 매다는 세련된 기술

사람을 매다는 이미지를 묘사한 또 다른 형벌 도상 장르의 주제는 바로 조롱이었다. ‘피투레 인파만티(Pitture infamanti)’라고 하는 이것은 남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그린 초상화로서, 로마법의 ‘파마(fama)’와 ‘인파마(infama)’의 고대 교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그림들은 13~16세기 북이탈리아 도시의 주요 재판소 벽에 흔히 그려져 있었으며 그 주된 기능은 법정을 모독한 배신자나 채무자를 겨냥해 일종의 연행적인 모욕을 주는 것이었다. ‘피투레 인파만티’의 희생자들을 그림 속에서 죽이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신에 다양한 모욕적인 자세─주로 한쪽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린 자세─를 취한 모습으로 그리곤 했다. 이탈리아의 비방용 초상화는 문헌 기록과 스케치로만 전해지며, 공개적으로 제작된 그림이 현재까지 남아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는 타로 카드 안에 있는 ‘매달린 사람’의 아이콘과 비교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타로 카드는 1440년경 북이탈리아에서 제작되었는데, 이것이 아마도 당시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비방용 초상화를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최고(最古)의 유물일 것이다(도판 1).

‘피투레 인파만티’의 제작과 감상에 중요한 역할을 한 요소는 주로 계급 구분이었다. 여기에 그려진 대상은 주로 상류층 남성들로서(여성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손상될 것을 염려할 만한 명예를 갖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모욕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참수형을 받을 특권이 허락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교수형이라는 모욕적인 처벌 방식과 연관시킴으로써 유효해지는 것이었다. 교수형과 성인(聖人)이 연관된 유일한 사례는 성 히에로니무스가 억울한 판결로 교수대에 매달린 사람을 구해 준 기적 이야기(도판 2) 하나뿐이며, 그나마 성인 자신이 목 매달린 모습을 재현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 종교적인 맥락에서 교수형은 가장 치욕스런 죽음, 즉 유다의 자살과 결부되어 있었다. 따라서 ‘피투레 인파만티’는 유복한 희생자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교수형과 치욕과 사회적 망신이 연관되어 있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작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의 이면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그중에서도 거꾸로 매달린다는 모티프의 의미는 무엇일까?

[도판 2]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 15세기 후반, 제단 패널에 채색,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판 2]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성 히에로니무스가 두 교수형당한 사람을 구하다>, 15세기 후반, 제단 패널에 채색,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판 3] ‘여우 레이너드를 목 매다는 거위들’, 15세기, 장의자 옆면 조각, 성 미카엘 교회, 브렌트 놀, 섬머셋.

[도판 3] ‘여우 레이너드를 목 매다는 거위들’, 15세기, 장의자 옆면 조각, 성 미카엘 교회, 브렌트 놀, 섬머셋.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거꾸로 매달린 모습의 재현은 ‘문두스 인베르수스(mundus inversus, 거꾸로 뒤집힌 세상)라는 개념을 전달한다. 그리고 상징적 전도(顚倒)의 모티프는 코미디의 주된 원리 중 하나다. 인류학자들은 전도를 ‘안전밸브(Ventilsitten)’, 즉 ‘김을 빼서 위험성을 중화하는’ 수단으로 이해하곤 한다. 즉 상징적 전도는 우리를 가역적인 과정에 참여시킴으로써 근원적 형태의 놀이를 이끌어 내며,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역할을 간접적으로 실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도판 3)은 15세기 후반~16세기 초반 영국 서머셋의 브렌트 놀(Breant Knoll)에 있는 한 교회의 장의자 옆면에 조각된 작품으로, 한 무리의 거위들이 여우 레이너드를 교수대에 매달아 끌어올리는 우화 속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자연 질서의 일시적 전복에 근거한 장난스럽고 희극적인 측면을 환기하고 있다. 이 우화 속에서 여우 레이너드는 강간, 살인 등의 죄목으로 왕 앞에 불려가 재판을 받고 법정에서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원래의 텍스트에서 여우는 성지순례를 떠난다는 조건으로 결국 풀려나게 되지만, 의자 측면에 조각된 이미지에서는 끈에 목이 졸려 매달려 있다.

[…] 뒤죽박죽으로 본말이 전도된 세계의 은유는 북유럽에서 이탈리아의 비방 회화와 가장 유사한 장르인 독일의 ‘샨트빌더[Schandbilder, 망신을 주는 그림이라는 뜻─옮긴이]’에서도 중요하다. 이러한 이미지는 묘사된 사람을 망신 주기 위해, 종이 또는 양피지에 그려서 조롱하는 글귀를 덧붙여(이럴 경우에는 셸트브리페[Scheltbriefe, 비난하는 편지라는 뜻─옮긴이]라고 한다) 피해자의 집 대문이나 공공장소에 게시했다. ‘샨트빌더’는 국가 기관이 아니라 개인들 사이에서 사적으로 널리 행해졌다는 점에서 ‘피투레 인파만티’와 다르다(이탈리아에서는 비방 회화를 개인적으로 그려서 게시하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긴 해도 그것이 기능한 방식은 아주 비슷했다. 비행을 저지른 범법자─주로 채무자─를 모욕적인 자세로 그려 게시함으로써, ‘법정 바깥의’ 처벌 효과를 노리고 상대로 하여금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일찍이 오토 후프(Otto Hupp)는 이 장르에 대해 상세히 연구하여, 1379~1593년 사이에 제작된 총 39점의 ‘샨트빌더’와 ‘셸트브리페’의 목록을 작성하였다(이 중 1500년 이전에 제작된 것은 15점이다). 최근에는 연구가 더욱 진척되어 당시 독일 북부를 중심으로 제작된 비방 회화가 100여 점까지 발견되었다. 가장 흔한 비방 양식은, 범법자가 암퇘지나 암나귀나 암캐의 항문에 자기 가문의 인장을 찍고 있는─그래서 결국 가문에 똥칠을 하게 되는─광경을 재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리가 밧줄에 묶인 채 거꾸로 매달린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흔했다. 1438년 뢰벤슈타인의 요한이 헤세의 루드비히 백작을 대상으로 제작한 ‘셸트브리페‘(도판4)에서, 채무자는 멋진 예복을 입은 채 거꾸로 매달려 까마귀가 발을 쪼아 먹고 있고(관습상으로는…눈을 쪼아 먹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는 상징적 전도를 드러낸다), 그 옆에는 그의 문장(紋章)이 역시 거꾸로 매달려 있다. 그림 위에 덧붙인 문장에 보면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경위─백작의 성에서 수프 한 사발을 놓고 싸움 끝에 충동질되었다는─를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유다를 지저분하게 빗대어, 불만의 원인이 돈과 관련한 분쟁임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이 글에서 요한은, “유다가 스스로 목매달았을 때 불었던 바람이 그의 눈과 귀에 불어 닥쳐서 그는 앞으로 다시는 명예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리라”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실용적인 목적은 분명하다.

[도판 4] 뢰벤슈타인의 요한(Johann of Lo+wenstein)이 헤센의 루드비히(Ludwig of Hesse)에 대해 쓴 셸트브리페(‘비방문’), 1438년 11월 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시사(市史)연구소.

[도판 4] 뢰벤슈타인의 요한이 헤센의 루드비히에 대해 쓴 셸트브리페(‘비방문’), 1438년 11월 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시사(市史)연구소.

…이상이 우리가 그의 모욕적인 그림을 그의 문장과 함께 걸어 두는 이유이다. 우리는 그와 그의 가족이 앞서 기술한 식으로 자행한 부당한 행위에 대해서 존경할 만한 이들이 인정할 만큼 베상할 때까지 이 그림을 계속 걸어 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매달린 그림을 보고 자비심을 구하는 자들에게 이 그림에 손대지 말 것을 청하는 바이다.

1490년 레겐스부르크의 두 유대인인 사이드로와 아이작 스트라우빈저가 한스 주드만을 상대로 제작한 ‘샨트빌더’에서도 희생자는 마찬가지로 기사 제복을 입은 채로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려, 악마가 그의 머리 주위를 몽둥이로 때리고 있다.(도판 5)

[도판 5] 사이드로와 아이작 스트라우빈저(Say+dro and Isaac Straubinger)가 한스 주드만(Hans Judmann)을 상대로 그린 샨트빌더(Schandbilder ‘비방화’), 1490년, 독일. 17세기에 제작된 사본. 바이에른 주립문서보관소, 뮌헨.

[도판 5] 사이드로와 아이작 스트라우빈저가 한스 주드만을 상대로 그린 샨트빌더(‘비방화’), 1490년, 독일. 17세기에 제작된 사본. 바이에른 주립문서보관소, 뮌헨.

이들 대부분의 사례는 […] 직접적 사형 행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독일의 ‘샨트빌더’에서는 이따금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목이 매달리거나, 수레바퀴에 묶여 사지가 부러지거나 심지어는 기둥에 못 박힌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이 거꾸로 매달린 이미지는 통상적인 교수형의 관습을 연상시키고자 의도한 것은 아니다. 이는 그보다는 당시에 실제로 가끔 시행되었던 유사한 형벌─소위 ‘유대식 처형(Jewish execution)’이라고 하는 것으로, 여기서 유대인 범죄자는 사나운 개들과 나란히 산 채로 거꾸로(어떤 경우는 한 발로) 매달린다─과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처형 의식은 중세 독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멀리는 스페인에도 기록된 사례가 있지만, 이 관습을 수록한 현존하는 법령집은 중세 거의 끝 무렵 혹은 그 이후에 쓰인 것이다. 유대식 처형에 대한 최초의 정의는 16세기 초 울리히 탱글러의 <일반인의 귀감>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유대교의 이단’을 완강하게 고집하는 자에게 부과되는 속죄 행위라고 해설하고 있다. 한편 이 형벌에 대한 가장 상세한 묘사는 17세기 후반 또는 18세기 초반 스위스 글라루스 주(州)의 법령집에 기록되어 있다(여기서 제시하는 견해도 앞의 문헌과 일치한다). 이 법령집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그는 절도범으로서 밧줄이나 사슬로 발을 묶어서 특별히 세운 교수대에 매달되, 그 양 옆에 사납고 으르렁거리는 개를 함께 매달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풀이나 목초가 그 아래에서 자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높이 매달아, 그는 땅에서 멀리 떨어져 개들과 새들과 허공에 내맡겨질 것이다. 그리고 판사와 군중과 경비병은 교수대 주위에 모여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것을 지켜볼 것이다.

이 인용문은 […] 사람을 매다는 상징의 중요한 측면, 즉 정지(매달림)─지연된 죽음─의 모티프를 전하고 있다. 형벌 받는 유대인의 운명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있다.

베네치아에서 바젤로 파견된 사절인 파두아의 안드레아 가타로가 쓴 일기는 이 관습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이다. 이 일기에는 1434년 두 독일계 유대인이 절도범으로 체포되어,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고문당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결국 둘 중 하나는 개종하여 참수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개와 함께 거꾸로 매달리는 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밧줄로 교수대 위에 끌어올려져 거기 한동안 매달려 있다가 ‘그의 예언자들이 자신을 구원해 주지 않음을’ 깨닫고 마침내 동정녀 마리아를 외치며 도움을 청했다. 그 순간 개 짖는 소리가 누그러졌고 죄수는 밑에 서 있는 수도사를 향해 “기독교도가 되겠소!” 하고 절규했다. 비방용 도상과 유사하게, 여기서 묘사한 의식에도 상징적 전도가 들어 있다. 즉 거꾸로 매달리는 것은 유대인의 명예에 대한 모욕을 나타낸다. 동시에, 유대인의 개종을 재현한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이 이야기 또한 유대인의 완고함에 대한 반유대적 판타지를 지속시킨다. 즉 범법자에게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운명에 대해 숙고할 시간이 주어지지만 그는 개종하지 않는다. (방금 소개한 사례에서, 매달린 유대인은 결국 사면되었다.) 교수대 위의 전도를 통해서 이 유대인이 인간과 짐승 사이의 분리라는 또 다른 형태의 상징적 전도와 융합되었다는 것 역시 의미심장하다. 에스더 코헨에 따르면, 거꾸로 매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해친 짐승, 그중에서도 특히 돼지에게 행한 형벌이었다고 한다(유대인은 돼지고기를 금지하는 레위기의 구절을 통해서 돼지와 결부된다). 그래서 방금 인용한 사례에서 절도범들은 ‘짐승처럼 죽지 않으려면 기독교도로 개종하라고 계속해서 강요당했던’ 것이다. 그 유대인 희생자는 유다처럼 기독교도로서 합당한 사회적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비천하고 짐승 같은 종말을 맞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문지방 위의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도판 6] ‘유대식 처형’, (스트라스부르크: Matthias Hupfuff, 1512-15년경).

[도판 6] ‘유대식 처형’, <유대인에 의한 성모 성화의 모독 및 수치>(스트라스부르크: Matthias Hupfuff, 1512-15년경).

유대식 처형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예는 매우 드문데, 그중 하나가 14세기 초 에노(Hainaut, 지금의 벨기에) 지방 캠브론의 시토 수도원에서 동정녀의 이미지를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유대인들이 처형된 사건을 재현한 대형 팸플릿이다. 16세기 초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인쇄된 이 팸플릿에는 그중 주모자였던 윌리엄이 받은 일련의 시죄(試罪) 광경이 목판화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문과 결투 재판을 거친 끝에, 결국 교수대와 끌려와 거꾸로 매단 채 그 밑에 불을 지피고 양 옆에 개를 매다는 형벌을 받았다(도판 6). 거기에 앞서 등장하는 이미지에는 윌리엄이 칼을 꽂은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피를 흘리는 기적이 묘사되어 있다. 몽(Mons) 시 부근의 한 교회에 있는, 역시 성상을 훼손해 처벌 받는 유대인을 그린 그림도 이 목판화와 놀랄 만큼 유사하다. (지옥불 또는 교회법에 따른 가장 가혹한 형벌 방식을 가리키는) 불의 모티프는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천벌 사이에 매달려 정지한 유대인의 상황을 전달한다. ‘샨트빌더’처럼 이 목판화에서도 희생자의 전도된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 시체를 쪼려고 달려드는 까마귀의 도상을 이용하고 있다. ‘사이에 있음’의 모티프는 앞서 인용한 대로 유대식 형벌에 대한 후대의 법적 정의에도 들어가 있지만, 이 이미지에 덧붙여진 텍스트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이 유대인은 ‘두 커다란 개를 양 옆에 두고, 거꾸로 매달린 채 땅에서 유리되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이 글은 계속해서 이 형벌이 ‘날이면 날마다 혐오스러운 범죄를 저르고 우리의 종교를 욕되게 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처벌하는’ 본보기이자 ‘속죄’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판 4, 5의 ‘샨트빌더’와 유대식 처형의 도상 사이에는 분명한 유사점이 있다. ‘샨트빌더’의 목적은 자살자에게 가해지는 사후 처벌과 유사하게, 현실의 법정에서 실망스럽게도 형벌이 유보된 자를 대상으로 모욕을 주려는 것이다. 유대인 범죄자의 처형처럼, 거꾸로 매다는 형벌은 사회적 지위와 운명이 말 그대로 공중에 높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물론 ‘샨트빌더’는 재현물을 통해 가상의 처벌을 내리는 것이고, 유대식 처형은 실제로 집행된 증거가 있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둘 다 불안정한 정지(매달림)의 논리에 기대고 있다는 점은, ‘샨트빌더’와 반유대주의의 틀이 어떤 차원에서 상호 교감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예컨대 비방 회화를 제작한 사람들이 비유대인을 모욕하기 위한 재현물을 만들면서 사람을 짐승과 동일시하는 반유대주의의 언어를 직접적으로 갖다 썼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유대식 처형이 비방 회화의 도상적 ‘전거’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있지만 그렇게 분명한 계보를 확립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최소한 유대식 처형·짐승 처형의 시각적 재현과 실제 집행은 독일의 ‘샨트빌더’를 해석하는 적절한 틀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즉 유대인이라는 모욕과 거꾸로 매달리는 형벌을 결부시켜 그림에 묘사된 사람의 굴욕을 배가하는 효과를 노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중세 독일에서 거꾸로 매달린 사람의 이미지가 불러일으켰던 심상은 어떤 면에서는 ‘피투레 인파만티’에서 연상된 것과는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 나는 독일의 ‘샨트빌더’를 보았던 사람들이 처벌 받는 유대인의 원형적 이미지를 통해 이 도상을 이해했다고 제시하고자 한다.

[도판 7] 브루더 글라드벡(Bru+der Gladbeck)이 프리드리히 폰 니어하우젠(Friedrich von Niehausen)과 그의 보증인에게 보낸 슈만브리페(Schma+nbrief, ‘비방문’), 1525-6, 독일. 헤센 주립문서보관소, 마르부르크.

[도판 7] 브루더 글라드벡이 프리드리히 폰 니어하우젠과 그의 보증인에게 보낸 슈만브리페(‘비방문’), 1525-6, 독일. 헤센 주립문서보관소, 마르부르크.

‘샨트빌더’의 반유대적 배경은 또한 채무자가 자신의 인장을 암컷 짐승의 항문에 찍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셸트브리페‘(도판 7)와, 유대인이 암퇘지의 젖을 빨고 그 배설물을 먹는 광경을 재현한 그림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후자는 13세기부터 독일어 사용권에서 유행한 것으로서, ‘유덴자우[Judensau, ‘유대 암퇘지’라는 뜻─옮긴이]’라는 도상 장르를 구축하고 있다(도판 8). 희생자를 짖어 대는 두 마리 개와 나란히 매달아 놓는 유대식 처형과 유사하게, ‘유덴자우’에서도 유대인은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라 젖 먹는 새끼 돼지처럼 이질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즉 사람을 짐승과 동일시하고 배설물로 더럽히는 언어를 통해 한편으로는 신분이 높은 비유대인의 명예를 더럽히고, 한편으로는 유대인을 가장 혐오스런 짐승과 결부시키려(도판 7의 ‘유덴자우’ 이미지에 쓰인 글귀 중 하나는 “그래서 우리는 구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의도했음을 알 수 있다.

[도판 8] , 15세기 독일의 판목으로 1700년경 제작된 목판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역사박물관.

[도판 8] <유덴사우(Judensau)>, 15세기 독일의 판목으로 1700년경 제작된 목판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역사박물관.

따라서 똑같은 비방용 도상처럼 보이는 것들도 전달하는 메시지는 서로 다르며, 시대적·지역적 특성에 따라 내러티브가 다르게 착색된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비방 초상 간의 가장 명백한 차이는 그 제도적 위상에 있다. 이탈리아에서 ‘피투레 인파만티’는 일반적으로 공권력의 도구였다. 묘사된 개인은 거의 예외 없이 부유한 귀족이었고 그 초상화는 지위나 혈통과 관계된 이슈와 결부되어 있었다. 독일의 ‘샨트빌더’의 ‘희생자’들도 비슷하게 유복한 계층이지만 이탈리아의 경우와 달리 사적 개인과의 분쟁에 휘말린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중세 독일에서 금전적 부채로 야기된 사회적 긴장이 일부분 반유대적 분위기를 띤 불명예스러운 이미지를 통해 표현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유대식 처형을 묘사한 이미지(도판 19)와 비방 초상화 사이의 유사성이 ‘피투레 인파만티’를 보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유효한 해석틀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의 맥락에서 비방 회화는 상류 계층에서 유행한 특정 초상화 장르(‘우오미니 파모시’)의 전도를 암시함으로써 잠재적 효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독일어권의 비방 회화는, 인간성을 박탈하는 반유대적 정서(명예가 훼손된 개인이 유대인들처럼 수성[獸性]을 띠게 된다는 생각)를 불러일으킴으로써 그 효력이 작용하였다. 물론, 독일의 비방 회화 중에서도 그림을 교사한 사람 자신이 유대인인 경우가─한스 주드만을 그린 샨트빌더(도판 5)─하나 있기는 하다. 아마도 이 경우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기독교도가 유대인에게 가하는 모욕을 거꾸로 기독교도에게 되돌려 주는 공격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형세의 이러한 역전은 실로 전복적인 암시를 띠지만, 이러한 전략이 행해진 보다 큰 맥락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전도의 은유는 유대식 처형의 상징적 언어에서 큰 몫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중세 후기의 수많은 신성 모독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요소였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유대인들은 성체를 훼손하면서 성찬식의 관습을 뒤집고 흉내 낸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유대인들을 향한 실제 폭력의 광풍을 선동하기도 했음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중세 유럽이 사람을 매다는 도상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을 매다는 하나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여러 특수한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중세의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 반유대주의의 언어와 모욕의 언어 사이의 상호작용은, 불명예와 유대인의 정체성과 동물성을 서로 결부시켜서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편견의 악순환을 창출했을 수도 있다.

정지된 생명: 중세 문화의 고통, 쾌락, 형벌(1)

suspended<정지된 생명: 중세 문화의 고통, 쾌락, 형벌(Suspended Animation: Pain, Pleasure and Punishment in Medieval Culture, 2006)>은 런던 킹스 칼리지 교수인 로버트 밀스(Robert Mills)가 중세의 고문과 형벌 이미지를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해석한 책입니다.

suspended(매달려 정지한)는 사전적으로 허공에 매달려 정지한 채 이도저도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suspended animation(정지된 생명)’은 원래 생명 활동이 정지된 동면 혹은 가사 상태를 가리키는 의학 용어이지만, 이 책에서는 삶과 죽음 사이, 혹은 죽음과 죽음 사이의 경계 공간에 (중세 재현물 속의 고통 받는) 육체가 상징적으로 매달려 정지한 상태를 의미하며, 이 책 전체를 관통하여 저자가 내세우는 핵심 개념입니다.

이 책은 몇 년 전 어느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번역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출판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출간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작업한 책이기 때문에 이렇게 묻히는 게 아쉬워서 여기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책의 전문을 올리는 일은 저작권 문제도 있고 또 이 책의 이론적인 부분은 다소 난해하기 때문에, 이 중 몇몇 부분을 도판을 중심으로–주로 재미있는 부분들 위주로–발췌해서 나누어 올릴 것입니다.

서론: 다른 중세를 들여다보는 검사경[1]

‘그때는 빵 한 조각 훔쳤다고 목매달아 죽였잖아. 그러지 않았어?’라고 21세기의 문명화된 서구인은 대꾸한다. 이 말투에는 분명히 안도의 감정이 배어 있다. 우리는 이 진술이 시사하는 바 무섭고도 매혹적인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부터 편안하게 멀찍이 떨어져 있다. 감사하게도 현대 서구 세계에서는 죄와 벌이 그렇게까지 명백히 불합치하지 않는다. 이제 범죄자가 처벌받을 때 그 형벌의 혹독함은 최소한 그가 저지른 범죄의 무게에 보다 근접해 있다. 어떻게 옛날 사람들은 서로에게 그토록 부당하고 야만적인 행위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그러니 현대 세계는 얼마나 큰 진보를 이룩한 것인가!

그러나 앞의 문장을 끝맺는 ‘그러지 않았어?’라는 말은, 화자의 선언 속에 취약한 부분이 있다는 표시이며, 자기 자신의 정의가 위협받고 있음을 희미하게 인정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죽음과 차이(difference)에 대한 공포, 나아가 관음증적인 매혹, 심지어는 그에 대한 동일시─타자에 대한 매혹─이 이 표현을 둘러싸고 있다. […]

우리는 형벌의 공포가 어떤 부침을 겪으며 변화해 왔는가를 사색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비체성(abjection, 脾體性)’[2]의 개념과 맞닥뜨린다. 브로츠와프(과거의 독일 브레슬라우로 현재는 폴란드에 속해 있음)의 성체 축일 교회에 있는, 14세기 후반에 제작된 십자가상(도판 3)을 보자. 이는 대단히 도발적이고 감정에 호소하는 이미지이다. 이 조각은 그뤼네발트의 그림(도판1)이나 홀바인의 <죽은 그리스도(Dead Christ)> (도판2)같은 작품보다도 더욱 즉각적인 반응을 요한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1512-16년경, 콜마르 운티린덴 박물관

[도판1]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이젠하임 제단화> 1512-16년경, 콜마르 운티린덴 박물관

한스 홀바인, , 1520-22, 바젤미술관

[도판2] 한스 홀바인, <무덤에 누운 그리스도>, 1520-22, 바젤미술관

우선 전체 구도를 보면, 이 이미지는 부단히 아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힘줄이 돋고 뼈가 앙상한 그리스도의 팔은 굽은 십자가에 못 박혀 꼼짝달싹 못한 채 잔뜩 켕기어 뻗쳐 있다.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왼팔은 몸의 무게 때문에 팽팽히 당겨 있다. (말 그대로) 목재처럼 뻣뻣하여 금방이라도 어딘가가 툭 끊길 듯한 인상을 준다. 이 브로츠와프 조각에서 십자가에 아래로 늘어뜨려져 부자연스럽게 늘여진 몸의 골격은 ‘카데바[cadaver: 해부용 시체─옮긴이]’라는 단어의 어원─‘아래로 떨어지다’라는 뜻의 라틴어 ‘카데레(cadere)’─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리스도의 두 다리는 애처롭게도 한데 묶인 채, 아래로 가라앉는 상체의 무게를 지탱하려 몸부림치고 있다. 피투성이 속눈썹을 단 감긴 눈꺼풀을 따라 아래쪽으로 눈길을 향하다 보면, 이 이미지에서 가장 매혹적인 부분─그리스도의 옆구리에 난 상처─에 시선이 가 닿는다.

실레시안의 장인, , 1370-80년경, 나무 조각에 채색, 브로츠와프 성체 축일 교회. 현재는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 소장.

[도판3] 실레시안의 장인, <십자가상>, 1370-80년경, 나무 조각에 채색, 브로츠와프 성체 축일 교회. 현재는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 소장.

(그럴 수 있다면) 여기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그러면 우리는 상처에서 나온 피가 잔뜩 응고된 채 방울져 맺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관례적인 십자가 수난 이미지에서 상처의 피가 비교적 적게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이 깊은 상처에는 핏방울이 마치 번쩍이는 진주나 성체성사에 쓰일 포도송이라도 되는 양 나란히 열을 지어 맺혀 있으며, 그리스도의 손에 난 깊은 상처에서도 거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핏덩어리가 스며 나온다. 끊임없이 흐르는 핏물을 따라 옆구리를 두른 옷의 주름도 함께 흘러내리며, 몸 전체는 피부에 띄엄띄엄 리드미컬하게 흩뿌려진 작은 채찍 자국들로 뒤덮여 있다. 갈비뼈는 손풍금처럼 벌어져 있고, 피부는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홀쭉하게 꺼진 배에 잡힌 주름은 갈비뼈에 깊고 날카롭게 파인 홈과 서로 반향한다. 그리스도의 머리카락마저도 피투성이에 끈적이고 헝클어져, 옆구리의 상처에서 나오는 분비물과 구분하기 힘들 지경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를 그 중심에 놓는 문화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과잉의 상상력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1. 여기서 검사경(檢査鏡, speculum)은 뤼스 이리가레가 처음 도입한 개념으로 자가 검진용 질경(膣鏡)을 가리키며, 이 책에서 저자가 중세를 바라보는 방식을 은유하고 있다. “이는 플라톤식의 평평한 거울이 아니라, 자가 진단용 굽은 거울―접히는 거울―이다. 이 검사경은 단순히 역사를 초월한 정체성이나 일정한 거리를 둔 타자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접촉하는 함축적 지식의 장소이다.”
  2. 이는 프랑스 비평가인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제시한 개념이다. 비체(脾體), 이물질 등으로 번역되는 아브젝트(abject)는 오줌, 똥, 토사물, 시체, 썩은 음식물, 감염과 오염 같은 더럽고 혐오스럽고 역겨운 대상을 가리키며, ‘아브젝시옹(abjection)’은 주체가 아브젝트에 대해 갖는 느낌을 말한다.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를 문명화 과정에서 억압된 어머니의 몸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원시와 문명의 경계를 표상하며, 자신의 신체와 주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지만 결코 완벽하게 제거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 계속 남아 있으면서 끊임없이 주체를 위협하고 체제와 정체성을 어지럽힌다.―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