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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하는 8월의 묵상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하는 매일 묵상>의 원본에는 편저자가 묵상을 돕기 위해 교황의 말씀 밑에 짤막한 글들을 붙여 놓았는데요. 번역본에서는 이 부분을 (저작권자의 허락을 얻고) 생략했습니다. 혹시 참고가 될까 해서 편저자가 덧붙인 성찰의 글들을 여기에 올립니다. 8월달부터 올라갑니다.

8월 1일
내 주변에는 기쁨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과 대화를 나눠 보고, 그들이 어떻게 그 기쁨 안에서 성장했는지를 물어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기쁨 안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

8월 2일
나는 어떤 헌신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오늘 나는 책임을 기꺼이 짊어지기 위해 어떤 첫 걸음을 뗄 수 있을까요?

8월 3일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카나의 혼인 잔치 대목(2:1-11)을 읽고, 그 내용을 위의 교황님 말씀과 더불어 묵상하면서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은 내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8월 4일
내 삶을 돌아봅시다. 나는 평화의 사람입니까? 나는 누구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대화의 기회를 찾습니까? 나는 어떻게 내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세계에서 평화를 증진할 수 있을까요?

8월 5일
위에서 교황님이 던지신 세 가지 질문을 곱씹어 보십시오. 지난날 나는 이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앞으로 나는 이를 어떻게 실천하고자 합니까?

8월 6일
성령은 내게 어떤 불편한 일을 시키십니까? 나는 성령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어떻게 억누르려 합니까? 이에 대해 나는 어떻게 더욱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을까요?

8월 7일
교황님은 믿음, 소망,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덕목들 중에서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중에서 오늘 내가 “둘러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8월 8일
우리 문화는 하느님이 필요치 않다거나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는 내 삶에서 하느님의 중요성을 매일매일 상기할 수 있을까요?

8월 9일
지금 나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까, 혹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잇습니까? <가톨릭 교리서>에서 내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다룬 부분을 찾아 보십시오. 교리서가 없다면 온라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지혜를 신뢰하십시오.

8월 10일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예수님을 내 결정과 행동과 말의 중심에 구체적으로, 의식적으로 놓으십시오.

8월 11일
내가 솔직히 대면해야 할 실패와 오류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는 나의 어떤 부분이 성장하길 바라실까요?

8월 12일
나는 삶이라는 이야기에서 스스로를 주요한 인물로 여기고 있습니까? 나는 주연입니까? 내가 자신을 주요한 인물로 여긴다면 이 관점은 내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요?

8월 13일
오직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문화에서는 많은 사람들과 중요한 것들이 소외된 채 버려집니다. 이번 주에 나는 더 큰 이타심을 발휘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나의 스케줄에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추가할 수 있을까요?

8월 14일
오늘 나와 이야기 나누는 상대에게 주의를 완전히 집중하십시오. 경청이라는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겸허함을 지니십시오.

8월 15일
지금 나는 비관론과 싸우고 있습니까? 성인전을 읽으십시오. 내가 그 성인의 관점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8월 16일
나는 어떤 때에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8월 17일
내가 지금 직면한 시련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 시련 때문에 겁을 먹고 있습니까?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내 삶과 내 시련을 예수님께 맡기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이 시련을 당신을 믿고 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 기회로 바꾸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8월 18일
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던지신 질문을 묵상하십시오.

8월 19일
우리 시대는 전쟁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 우리 문화 내부의 전쟁, 우리 마음속의 전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기를 바라실까요? 그분께서는 이런 전쟁을 둘러싼 광기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라고 어떻게 나를 부르고 계실까요?

8월 20일
나는 어떻게 비관적인 상황에서 긍정적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악을 선으로 물리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상황에는 어떤 행동이 필요할까요? 어떤 인내가 요구될까요?

8월 21일
오늘 나는 상황에 거칠게 대응하고픈 유혹을 느꼈다가 잠시 멈추고, 어떻게 그 대신 온유한 태도를 취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복음의 사람, 자비의 사람이 되십시오.

8월 22일
삶에서 중요한 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게끔 나를 몰아치는 일들이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일을 서둘러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 귀 기울이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집시다.

8월 23일
나는 청년과 노인들을 보살필 기회를 찾고 있습니까? 우리 본당이나 이웃에 있는 싱글맘 한 명을 도울 수 있습니까? 양로원에 있는 외로운 노인들을 찾아 뵐 수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부모라면, 이런 분들을 위한 봉사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자녀들을 동반하는 것도 생각해 보십시오.

8월 24일
우리는 어떻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대화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겸손하고 열린 마음을 청하며 기도하십시오.

8월 25일
나의 삶은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하고 새롭게 되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에 놓고 있습니까?

8월 26일
예수님을 내 삶의 문지방 안으로 들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내 삶을 집으로 상상해 보십시오. 나는 하느님을 어떤 방으로 들어오시게 할까요? 어떤 방에 하느님을 들어오시지 못하게 할까요? 내 삶의 문을 주님께 열어 드릴 용기를 가지십시오.

8월 27일
나는 성령께 자신을 “내맡기고” 있습니까?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정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분을 무시하거나 제쳐 놓지 마십시오. 아직 성령을 내 삶에 청하지 않았다면, 내 곁에 있어 주십사 청하십시오.

8월 28일
하느님께 오늘 당신의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 상황으로 나를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예를 들면 대화 중에 누군가에게 말할 기회를 양보한다든지, 모욕을 너그럽게 용서한다든지, 험담을 거부하는 식으로 자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8월 29일
나는 하느님이 아닌 어떤 것에서 위안을 구하고 있습니까? 이들은 내게 어떤 거짓 안도감을 줍니까? 나를 이런 우상들로부터 풀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족쇄에서 풀려나 당신께 희망을 구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십시오.

8월 30일
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하신 질문을 성찰해 보십시오. 나는 이를 나의 일상 생활과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8월 31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시는 사랑에 대해 몇 분간 묵상하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증오와 경멸을 드러냈지만 그분은 사랑으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내가 어떠한 악에 대해 선으로 응답할 것을 요구하고 계실까요?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간(3)

“나는 빈의 학구적인 집안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이미 책이 가득 찬 선반과 찬장을 바라보며 자랐고, 거기서 받은 인상은 이후 평생 동안 내 곁에 머물렀다. 우리 집의 현관에는 책과 팸플릿이 꽉 들어차 있고 유리문이 달린 엄청나게 큰 책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천장까지 닿은 책 선반들은 거실과 아버지 서재의 사면 벽을 빼곡히 채웠다. 나중에는 나와 동생 방의 선반도 책으로 채워졌다.
나는 그 서재 안에 있는 책의 권수를 헤아리면서 어림수 구하는 법을 처음 익혔던 것 같다. 나는 선반의 개수와 선반 하나에—대부분 두 줄 깊이로—배열된 책의 권수를 세어, 합계가 총 1만 3천 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책들 전부가 다 내 차지였다. 나는 서재 전체를 마음껏 헤집고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제대로 글을 읽을 수 있게 되기 전에, 나는 그림과 사진이 있는 책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책들을 좋아하게 된 것은 서재의 배치 때문이기도 했다. 주로 그림과 지도가 수록된 커다란 책들은 손이 닿기 쉬운 책장 맨 아래칸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선반에서 그 책들을 꺼내어 펼치고, 아이들이 곧잘 그러듯이 바닥에 엎드려서 그림들을 구경했다.
나는 색채가 선명하고 모호하지 않게 그려진 그림들을 좋아했다. 직공들이 공구를 가지고 일하는 모습을 묘사한 책들이 있었는데, 나는 곧 그 주요 도판 속에 나오는 공구들이 실제 작업장에서 쓰이는 도구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부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거나 아무 것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는 그림들을 마주칠 때면 더더욱 신경이 거슬렸다. 나는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그림책들이 오류투성이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어떤 그림이 특별히 유익하다거나 모호하다거나 짜증난다는 말을 아버지한테 한 기억은 없다. 도판들은 의사소통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미적이거나 역사적인 관점에서만 논의되었다…아마 시각적 디테일에 대해 논하는 전통이 당시에는 부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오로지 책에만 파묻혀 생활했다고 여기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바깥 활동도 많이 했다. 우리 가족은 매년 몇 달씩을 시골에서—때로는 산간 지방에서—보냈기 때문에 나는 나무와 꽃, 나비와 애벌레, 소와 말, 손으로 만드는 갖가지 도구들, 시내와 연못에 익숙해졌다. 나는 작은 물레방아들을 직접 만들어 개울에 놓기도 했고, 한번은 역사책에 실린 그림을 보고 라인 강에 카이사르가 놓았던 것과 똑같은 다리를 짓기도 했다. 이 작은 구조물은 대단히 튼튼해서 (마른 땅 위에 놓은 다리이긴 했지만) 내가 그 위에 올라가도 끄떡없었다. 빈의 박물관들 역시 나의 시각적 성장 환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토 노이라트의 자전적 노트에서 발췌한 그의 어린 시절’, Otto Neurath, Empiricism and Sociology, 1973, 4-5p.)

오토 노이라트의 아버지 빌헬름 노이라트는 당대의 저명한 정치경제학자이자 사회 개혁가였고, 오토는 아버지가 지녔던 백과사전적 박식함과 개혁 의지를 고스란히 물려 받았습니다. 빌헬름 노이라트는 과잉 생산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산업을 (바로 국유화하지 않고) 정부 통제 하에 두거나 오너/경영자의 관리를 노동자 평의회의 관리로 대체한 범기업연합(pan-cartelism)을 제안한 바 있는데, 이는 훗날 그 아들이 구상한 ‘연합 사회주의(associational socialism)’ 모델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노이라트는 빈에서 철학, 수학, 물리학을, 베를린에서 역사학, 경제학, 철학을 공부하고 1906년 베를린에서 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데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키케로의 <의무론>과 고대 이집트의 비화폐 경제에 대한 것이었음을 보면 그의 경제/사회학적 상상력의 뿌리가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현물 경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 사상으로부터 자신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경제 모델을, 이집트의 상형 문자로부터 보편적인 시각 언어를 착안하게 된 것이죠.

1910년경 그는 빈에서 수학자 한스 한, 물리학자 필립 프랑크 등과 함께 에른스트 마흐, 피에르 뒤엠, 앙리 푸앵카레의 과학 사상을 주로 논하는 철학 토론 그룹을 만듭니다. 이 모임은 1929년 정식 출범하게 된 빈 학단(Vienna Circle)의 전신이 되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이 모임을 ‘제1 빈 학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1 빈 학단에 대한 설명은 <과학철학> 13-1호(2010)에 실린 고인석 선생의 논문 ‘빈 학단의 과학 사상’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이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마흐의 과학사상이 지배력을 행사하던 빈 대학에서 공부한 공통의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이들은 유태계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었다…한과 노이라트, 프랑크 등은 빈의 카페하우스에 모여서 학문과 사회를 논했다. 학문적 차원에서는 특히 당시 이론물리학과 수학, 논리학의 새로운 성과들이 이들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요 관심사에 실천적 의미의 사회주의 계몽운동이 있었던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63-64쪽)…제 1 빈 학단의 시기에는 ‘학문의 존재의미는 인간의 생존과 번영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마흐의 관념이 ‘정제된 학문을 통한 계몽, 혹은 사회적 삶의 고양’이라는 실천적 지향성의 원천으로 뚜렷이 남아 있었다.(71-72쪽)”

1910년대 초에 노이라트는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당시 전쟁 중이던 발칸 반도를 여행하며 전시 경제에 대한 여러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또 1차 대전 중에는 빈 중앙정부의 전쟁부 내에 전시경제와 관련된 부서를 만들 것을 건의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고, 이어 라이프치히에서 ‘독일전시경제박물관’의 관장을 지내며 나중에 빈 사회경제박물관에서 완성될 시각화 작업의 초기 단계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전시의 배급 경제에 대한 이런 연구와 경험은 그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대비되는) 사회주의적 ‘관리 경제(Verwaltungswirtschaft)’ 혹은 (화폐 경제와 대비되는) ‘현물 경제(Naturalwirtschaft)’ 모델을 완성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전시 경제를 통해 현물 경제로’라는 제목의 논문집 서문(1919)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글들은 자유 교환 경제의 시대가 끝나고 관리 경제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으며, 화폐 경제는 해체되어 철저히 조직된 현물 경제에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의거하고 있다. 아버지의 지적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나는 위기와 도탄에 빠진 전통적 경제 질서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자라났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듯한 모든 흐름에 주의를 집중했다…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세계 대전이 미래의 관리 경제를 창출할 것이라는 견해로 나를 이끌었다. 여기서는 모든 노동력과 물자가 전쟁 수행을 위해 중앙에서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질서로부터 (정치 권력을 요하는)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모든 인민을 위한 관리 경제에 다다를 수 있을 듯 보인다.” (Otto Neurath, Empiricism and Sociology, 1973, 1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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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 1867-1922)

흥미로운 부분은 그의 이러한 급진적 계획 경제 구상이 아에게(AEG)의 2세 경영자였던 발터 라테나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라테나우는 1차 대전 중 정부 전시물자국의 책임자로서 독일의 전시 경제를 지휘하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의 관리•분배 체계를 확립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라테나우가 지휘했던 전시 경제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유시장가격을 폐지하여 물가를 고정시키고 물자를 분배하는 한편, 합성질소흡착법, 인조견, 합성고무, (달팽이로 만든) 합성수지, (도토리로 만든) 커피 등 혁신적인 대체상품을 개발했습니다. 전시물자국은 원자재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24개 기업을 감독했고, 식량공급을 규제하고 분배하기 위한 특수 행정부서인 전시식량청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1]

사실 라테나우는 단순한 자본가로 치부될 수 없는 개혁적 사상가이자 문필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기에 바이트를 할애하여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제가 보기에는 노이라트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인 것 같습니다).[2] 그는 전시물자의 생산과 분배를 지휘했던 경험을 토대로,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산업의 국유화 대신) 경영주의 참여하에 산업을 국가가 통제하는 ‘산업자치제’를 제안했습니다. 피터 드러커는 라테나우가 1차 대전 초기 국가의 설계자로서 기적적인 일을 해냈다고 평가하면서도 ‘전체주의 경제학을 설교하고 다닌 최초의 인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3] 라테나우가 제안한 ‘산업자치제’는 빌헬름 노이라트가 제안했던 범기업연합과도 일맥상통하며 이 두 가지는 오토 노이라트의 계획 경제 모델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사실 독일은 비스마르크 이래로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정부가 경제에 깊숙이 간섭해 온 유구한 전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산업을 통제하고 물자를 분배하는 이런 식의 계획 경제는 우리도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에 대해 정승일 선생이 쓰신 은혜로운 프레시안 서평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서평은 제가 그때까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노이라트라는 인물의 관점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한국 역시 30년 동안이나 ‘계획-계산 경제’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즉 1962년부터 1992년까지 우리나라는 6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실행했다. 그 계획경제는 광범위한 ‘계산’과 예측을 동반했는데, 그러한 계획경제의 수립 과정에는 수학으로 무장한 경제학자들만이 아니라 중화학공업화의 현장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공과대학 출신의 엔지니어들 역시 테크노크라트로서 다수 참가하였다. 왜냐하면 철강과 자동차, 전자, 화학의 전략 산업 육성에 필요한 대규모 설비투자의 양적•수학적 규모 탐색과 그에 필요한 (경제적) 비용 계산 등을 위해서는 경제학자와 공학자의 양 축이 모두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이라트가 주목하는 점이 바로 이 점이다. 즉 계획경제의 계산 가능성은 교환가치(화폐가치로 측정된)를 단지 노동가치(가상적 화폐(virtual money)로 측정된)로 대체하는 것(랑에와 그 이후 후계자들이 주장한)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며, 실물가치(사용가치) 그 자체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1973년에 시작된 중화학공업화가 노이라트와 비슷한 관점에서, 즉 신고전파 경제학의 시장가격 계산, 화폐적 계산보다는 공학도 출신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주도하는 실물적 계산에 더욱 의존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추진했던 계획 경제는 그가 대동아전쟁기에 경험한 일제의 전시 경제 체제를 모델로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일제와 나치 독일이 채택한 전시 경제의 모델이 된 것은 바로 1928년경부터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경제 계획’이었죠. 또 부하린,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스탈린은 1차대전기 독일의 전시경제—국가자본주의—모델을 분명히 참조했습니다.

당시에도 노이라트가 주변 사람들에게 때로는 ‘사회주의자’로, 때로는 ‘자본가들의 친구’로 불리며 딱히 규정하기 힘든 인물로 평가되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과거의 계획 경제와 전시 경제 경험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새겨져 있는데요. 과연 여기서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실패로 판명 났거나 시대착오적인 전망이 아닐까요? 하지만 노이라트가 생각했던 계획 모델은,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계획을 격렬히 거부하고 모든 사회 단위의 수평적이고 느슨한 연합을 지향했다는 데 결정적 차이점이 있음을 지적해야 합니다(여기에 대해서는 <화폐 없는 사회는 가능하다>의 4장에 나와 있습니다.) 1918년 독일혁명이 터진 뒤, 그는 바이에른 지역에 세워진 혁명 정부에 합류하여 자신의 이런 사회화 구상을 현실에 옮기고자 시도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번 업데이트 때 다루게 될 것입니다.

(다음 업데이트는 아마도 몇 달 뒤가 될 듯합니다.)

 

  1. 이반 버렌드 지음, 이헌대/김흥종 옮김, <20세기 유럽경제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8, 76쪽.
  2. 그는 일명 ‘예술가 기업주’로서 산업 디자인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1907년 당시 “확실히 중앙집중적인 통제 하에 있고 중앙집중적인 조직을 갖고 있는 유럽 최대의 산업단위 결합체”였던 AEG는 디자인 컨설턴트로 페터 베렌스를 고용해서 공장 건물부터 기업 로고, 서식류, 제품, 광고 포스터까지 기업의 모든 활동과 관련된 디자인을 의뢰했고, 미스 반 데어 로에, 발터 그로피우스와도 협업하여 AEG의 디자인 정체성을 수립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라테나우는 외무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1922년 우익 광신자들에게 암살당했고 이는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3. 피터 드러커, <경제인의 종말> 이재규 옮김, 한국경제신문사, 2008, 424쪽.

 

‘번역과 말’: 토머스 드 퀸시와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cc* 워크룸 총서 ‘제안들’ 출간 기념으로 2014년 2월 26일 북소사이어티에서 열린 ‘번역과 말’, 세 번째 행사 때 발표한 원고를 여기 올립니다.

8994207368_1안녕하세요. 토머스 드 퀸시의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을 번역한 유나영입니다. 먼저 바쁘신 중에 귀한 시간 내어, 미세 먼지를 뚫고…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중에는 이 책을 읽으신 분도 있고 아직 못 읽으신 분도 계실 텐데, 편의상 읽지 않으셨다고 가정하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버벅거릴 게 분명해서 원고를 적어왔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 소개를 잠깐 드리면, 저는 원래 사회과학 출판사 편집자 출신으로 정치/사회 분야 책을 주로 번역해 왔습니다. 문학 번역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책을 의뢰 받고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토머스 드 퀸시 전공자도 아니고 또 영문학 전공자도 아니며, 그전까지 제가 드 퀸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보르헤스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19세기 작가죠. 그중에서도 드 퀸시는 당대의 손꼽히는 스타일리스트로 이 사람의 문장은 현란한 장광설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글은 흔히 소용돌이나 미로에 비유되곤 하죠.6744508

그래서 저에게는 뛰어넘어야 할 높은 벽, 큰 도전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작품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번역하는 과정은, 물론 힘들었지만, 일체의 다른 오락거리가 머리에 전혀 안 떠오를 정도로 흥미진진했습니다. 일하다가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솟아서 잠깐 머리 좀 식혀야지 하고 텔레비전 보다가도, ‘아니 내가 재밌는 걸 놔두고 이 지루한 걸 왜 보고 있지?’ 하고 그냥 꺼버리고선 다시 일하고.. 그랬습니다.

토머스 드 퀸시는 19세기 전반기에 영국에서 활동한 작가로, 소설도 몇 편 썼지만 그보다 에세이스트로 유명합니다. 국내에는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혹은 <어느 영국인 아편중독자의 고백>)을 통해서 소개되어 있는데요. 실제로 토머스 드 퀸시가 당대에 문필가로 명성을 얻은 것도 이 <아편쟁이의 고백>을 통해서였고, 영미권에서도 주로 ‘아편쟁이(Opium-eater)’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드 퀸시는 다양한 정기 간행물에 기고하는 필자로서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고—말년에 편집한 저작 선집이 14권짜리였으니까요.—또 대단히 광범위한 소재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아편쟁이의 고백> 같은 자서전적인 글도 많이 썼지만, 아주 많은 정치 평론과 시사 평론을 썼고, 콜리지와 워즈워스에 대한 그의 평론은 영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철학 특히 칸트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역사, 종교, 그리스와 라틴 고전에 대한 해박한 글들도 썼고, 외국 문학 작품의 번역도 했고, 폭력적이고 어두컴컴한 고딕 로맨스 소설도 몇 편 썼고, 심지어 리카도의 가치 이론에 대해 다룬 정치경제학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백과사전적인 방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고요. 이 책만 해도 고전 인용이 굉장히 많이 나오죠.18332180

당대의 살인 사건에 대한 관심은 토머스 드 퀸시의 이런 여러 관심사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이 책의 테마가 된 존 윌리엄스의 연쇄 살인 사건은 드 퀸시가 거의 병적으로 집착했던 소재였습니다. 이는 1811년, 아일랜드인 선원 존 윌리엄스가 런던 이스트엔드의 래트클리프 하이웨이에서 12일 간격으로 두 일가족을 잔혹하게 몰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잭 더 리퍼가 출현하기 이전에 영국에서 일어난 가장 기억할 만한 연쇄 살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피해자가 매춘부나 부랑자가 아니라 평범한 서민이었고, 길거리 뒷골목이 아닌 자기 집안에서 살해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영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영국인의 집은 그의 성이다’라는 격언이 있죠. 이는 그 굳건한 믿음을 완전히 깨부순 사건이었습니다. 살인범인 존 윌리엄스는 범행 현장에 흘리고 달아난 흉기가 증거가 되어 검거되었고, 판결이 나기 전에 감방 안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법에 따라 가슴에 말뚝이 박힌 채 도심의 사거리 밑에 매장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1811년 당시 드 퀸시는 스물 여섯 살 청년이었습니다. 드 퀸시의 글 중에서 윌리엄스 사건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바로 이 책에 첫 번째로 실린 ‘맥베스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이 글이 발표된 때가 윌리엄스 사건이 있은 지 12년이 흐른 1823년, 드 퀸시가 서른 여덟 살 때입니다. 자, 그 다음으로 나오는 글이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이죠. 이 글을 <블랙우즈 매거진>이라는 잡지에 처음 발표한 게 1827년, 드 퀸시가 마흔 두 살 때입니다. 이 글은 살인 사건을 예술적으로 감상하는 이른바 ‘살인 감상 협회’라는 가상의 협회에서 주최한 가상의 강연문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요. 이 강연의 제목이 ‘예술로서의 살인에 대한 윌리엄스 기념 강연’입니다. 하지만 윌리엄스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짤막하게만 들어가고요, 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살인 사건들을 풍자를 섞어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으로 1839년, 드 퀸시가 쉰 네 살 때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에 대한 두 번째 글’을 <블랙우즈 매거진>에 발표합니다. 이 글은 앞 글의 강연자였던 이 ‘살인 감상 협회’의 회장이 <블랙우즈 매거진> 편집장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요. 인도에서 ‘서그 암살단’이라는 대규모 강도 집단이 검거되어서 그 정체를 드러낸 것을 경축하여 ‘살인 감상 협회’에서 열었던 기념 만찬을 회고하는 내용입니다.16038383

자, 그 다음에 나오는 가장 긴 글,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에 대한 후기’, 이것을 쓴 것이 1854년, 드 퀸시가 예순 아홉 살 때입니다. 죽음을 불과 5년 남겨 놓고 있을 때죠. 이때야 비로소 드 퀸시는 윌리엄스 살인 사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깁니다. 이 글에서 그는, 그로부터 43년 전 살인범 윌리엄스가 밟았던 길을 마치 르포 작가처럼, 혹은 스릴러 소설 작가처럼 한 발 한 발 숨가쁘게 뒤쫓아 갑니다. 마지막으로, 생전에 발표되지 않은 세 편의 짧은 수고는, 각각 드 퀸시가 1825년(마흔 살) 1828년(마흔 세 살) 1844년(쉰 아홉 살) 때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드 퀸시가 청년 시절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평생에 걸쳐 써 나간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읽으면, 이 모든 글들이 마치 일주일 간격으로 연재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건 정말 집요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이 잔혹한 살인 사건에 집착했을까요? 우선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들 수 있습니다. 19세기 당시의 영국에는 이미 잔혹한 살인 사건에 열광하는 대중들이 있었고 이들의 수요에 맞춘 옐로 저널리즘과 선정적인 범죄 소설과 연극들이 존재했습니다. 어떤 소설은 시리즈로 매주 연재해 가며 출간되었는데 주마다 4만 부씩이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13607141드 퀸시 자신도 이런 시류에 한몫 했습니다. 드 퀸시는 <웨스트몰랜드 가제트>라는 신문의 편집장을 잠시 지낸 적이 있는데요. 이때 신문 지면을 살인 사건의 재판 보고서, 자살, 강간, 아편, 이상하고 기이한 사건 소식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예를 들면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발표하고 불과 몇 달 뒤에, ‘살인범의 시체를 전기 충격으로 되살리는 실험’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싣기도 했습니다. 한 글에서 드 퀸시는 그것을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살인 사건을 다루는 이유는) 첫 번째는 이것들이 흥미롭기 때문이고, 둘째는 교육받지 못한 계층에게 사회적 의무를 가르치기 위해서이고, 셋째는 이것이 우리 사회의 윤리적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별로 설득력 있는 변명은 아니죠.

드 퀸시의 살인 에세이 또한 고급 문학(high literature)의 탈을 쓰고 있지만 현학적인 고전 인용과 젠체하는 문체를 걷어 내고 보면 당시의 이런 싸구려 범죄 소설이나 선정적 신문 보도와 공통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유행했던 범죄 소설의 조류는 범죄자를 사회 모순의 희생양이자 전복적 영웅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정치적 알레고리를 띠고 있었고, 한 발 더 나아가 사법 개혁을 촉구하기 위해 집필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 퀸시는 살인범의 동기에 대한 합리적 분석이나, 살인범의 개인사와 내면이나, 그를 범죄자로 만든 사회 구조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11369911

그러면 드 퀸시가 관심 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살인 그 자체의 순수한 미적 가치였죠. 드 퀸시가 찬미한 윌리엄스의 예술성은 바로 “과잉과 낭비”에 있었습니다. 또 19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도래한 가차 없는 시간 규율 속에서, 한 순간을 낚아채어 공포의 순간으로 영구히 박제하는 능력에 있었습니다. 한 글에서 드 퀸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 비극을 주재하는 힘은 죽음이다. 위대한 죽음의 한 순간을 그 순간에 영구히 얼어붙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 조각과 그리스 비극의 미학적 특성이다.” 그것을 생생히 보여주는 한 예가 라오콘 상입니다. 아폴로 신전의 사제 라오콘이 커다란 뱀에 물려 죽는 순간을 장엄하게 묘사한 조각이죠. 여기에는 그리스 비극의 미적 이상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 이는 드 퀸시가 심취해 있었던 칸트 철학의 숭고미(sublime) 개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감동받지만 무섭고 두려운 것을 보고도 감동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깎아지른 듯한 절벽, 뜨거운 용암이 분출하는 화산, 바닥이 없을 것 같은 검푸른 바다와 광막한 우주…. 이런 압도적이고 무시무시한 것들에도 우리는 매료됩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 두려운 대상이 우리에게 직접 해를 끼치지 않을 만큼 멀찍이 있어야만 합니다.) 드 퀸시는 살인이라는 무시무시한 행위도 안전한 거리에서 멀찍이 놓고 봤을 때는 우리 마음에 미적 감흥을 일으킨다고 한 것입니다. (자, 폭풍우 치는 밤 난롯가 소파에 푹 파묻혀서 책을 읽는다고 할 때 여러분은 무슨 책을 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오싹한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추리 소설을 읽습니다. 이보다 더 안락하면서 짜릿한 쾌락이 있을까요?)

17974594그럼 그런 미적 감흥을 드 퀸시는 어떻게 글로 재현했는가? 살인의 위협에 압도되어 모든 것이 정지한 공포의 순간과, 그 순간이 끝나고 정지한 모든 것들이 갑자기 움직이며 일상이 되돌아오는 순간을 극적으로 대비시킵니다. 살인범이 집안에서 살인을 막 끝냈을 때 심부름 나간 하녀가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는 순간, 비명 소리를 듣고 계단을 내려온 직공이 일가족을 몰살한 살인범의 뒷모습을 목격하고 몸이 얼어붙는 순간—이 공포의 순간에 모든 사고와 움직임은 정지됩니다. 드 퀸시는 의도적으로 이 시간을 길~게 늘려서 자세히 묘사해 놓았습니다. 그 뒤, 하녀의 절규로 이웃 사람들이 달려옵니다. 직공이 극적으로 탈출하여 위급을 소리쳐 알리자 성난 군중들이 살인범을 잡으러 밀물처럼 몰려옵니다. 공포의 시간이 끝나고 일상의 시간이 역류하는 것입니다. 이 두 상황의 극적 대비가 내는 시적 효과에 대해서는 <맥베스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에 압축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는 드 퀸시의 다른 글(영국의 우편 마차)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나는 모티프입니다. 이는 아편 중독의 부작용으로 극단적 흥분과 극단적 무기력 상태를 오갔던 드 퀸시의 체험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살인범 존 윌리엄스가 실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 그다지 흥미로운 인물은 못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성향이 있는 아일랜드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드 퀸시의 글에서 윌리엄스는 불가해하고 순수한 악마로 묘사됩니다. 그는 오렌지색 머리에 창백한 가면 같은 얼굴을 하고 있고, 인도에서 체류한 경력 탓에 신비하면서도 불길한 동양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습니다. 심지어 드 퀸시는 그를 지진에 빗대며 자연의 힘에 비견하기도 합니다. 그 뒤 살인범은 가슴에 말뚝이 박혀 묻힘으로써 희생 의례의 제물이 됩니다. 공동체는 그를 단죄하고 축출, 희생시킴으로써 단결되고 정화됩니다. 드 퀸시는 범죄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연행되어야 할 의례로서 다루고 있는 것이죠. 이는 문제에 대한 매우 보수주의적인 접근 방식입니다. 드 퀸시는 뿌리 깊은 보수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고 이는 그가 살인을 다루는 방식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3698553

드 퀸시가 편집장을 맡았던 <웨스트몰랜드 가제트>는 보수당의 전신인 토리당 계열의 신문으로 모든 종류의 개혁을 거세게 비판하고 현 상태를 옹호하는 논조를 띠었습니다. 또 드 퀸시가 주로 기고한 문예지 <블랙우즈 매거진>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를 예술적으로는 급진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죠. 이 잡지에는 대단히 공격적이고 방종하기까지 한 풍자글들이 많이 실렸습니다. 이런 태도에는 순수한 미적 쾌락, 자유롭고 무책임한 쾌락의 영역을 일상 정치와 분리된 자율적인 공간으로 보존하고 봉인하려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말이 길어졌는데 다시 드 퀸시가 죽음과 살인에 집착하게 된 배경으로 돌아와서…. 이번에는 드 퀸시의 자전적 배경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드 퀸시는 7살 때 당시 9살이던 친한 누이를 병으로 잃었고 또 10살 때는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특히 누이의 죽음은 드 퀸시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드 퀸시는 이때의 충격으로 평생 동안 죽음에 집착하게 되었고, 기괴한 환영을 보기 시작했고,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아편을 복용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성공한 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고, 교육도 잘 받았고 우등생으로 옥스퍼드까지 진학했지만 어려서 죽어 버린 누이 외에는 그 어떤 가족과도 마음을 나눌 수 없었기에 외롭고 조숙한 어린 시절을 보냈죠. 아버지는 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데다 일찍 세상을 떴고, 그의 어머니는 대단히 완고한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로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하고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드 퀸시는 다른 글에서 자기가 어머니와의 소통이 불가능했으며, 어머니 앞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이 절망적인 무력감을 느꼈다고 쓰고 있습니다. <아편쟁이의 고백>에도 나오지만 드 퀸시는 청소년기에 어머니와 후견인들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학교를 때려치우고 집을 뛰쳐나와 런던을 방황하며 굶주려 죽을 뻔합니다.

15778846여기까지 말하면 짐작하시겠지만 드 퀸시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아편 중독자였고, 살인과 죽음에 병적으로 집착했고, 외국인과 하층 계급에 대한 편견에 가득 찬 완고한 보수주의자였고, 무엇 하나 제대로 끝을 맺질 못했고—대학도 중도에 뛰쳐나왔고, 심지어 기고하는 연재물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했죠—금전 관리에는 완전히 빵점이라 평생을 빚쟁이한테서 도망다녔죠. 기벽도 많았는데요. 일례로 아주 작은 메모 조각 하나까지 버리지 못하고, 정리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책상, 의자, 침대, 바닥까지 책과 종이로 꽉 차서 운신을 못할 정도가 되면, 그 집의 문을 그냥 잠가 버리고 다른 숙소를 구해 나가는 식으로 숙소를 전전했죠. 드 퀸시가 죽고 난 뒤 최소한 여섯 군데의 숙소가 이런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벽, 개인적 트라우마, 빈곤, 중독 성향, 지극히 예민한 성정과 번득이는 두뇌,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 받지 못한 괴팍한 천재’의 이미지는 그를 대단히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에드거 앨런 포가 드 퀸시를 동경하고 그를 모델로 최초의 탐정 오귀스트 뒤팽을 창조한 것도 무리가 아니죠.[1] 그의 이러한 개성은 오귀스트 뒤팽과 셜록 홈즈에게로 이어지는 고전적 탐정 캐릭터의 원형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또 살인 사건을 그 사회적/윤리적 맥락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서 순수한 미적 구조물 혹은 지적 구조물로 취급하는 태도는 모든 추리소설의 전제가 된다는 면에서, 그의 글은 현대적 추리소설이 탄생할 기본 조건을 마련해 주었습니다.8206501

수많은 후대 작가들이 그의 글과 캐릭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드 퀸시의 글에서 직접 영향을 받은 유명 작가들의 목록은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 찰스 디킨스, 코난 도일, G.K. 체스터턴, 버지니아 울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보르헤스, 영화작가로는 앨프리드 히치콕, 나아가 연쇄 살인마와 범죄가 등장하는 오늘날의 모든 소설과 영상 작품에까지 이어집니다.

에드거 앨런 포와 조지 오웰이 드 퀸시의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을 오마주해서 쓴 짤막한 글이 있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가 쓴 것은 <정밀 과학의 한 분과로서의 사기치기(Diddling Considered as one of the exact Sciences)>라는 건데, 사기를 치기 위해 갖춰야 할 미덕을 열거하고 사기 치는 수법을 종류별로 정밀하게 분류하는 내용이고요, 조지 오웰의 글은 <영국 살인의 쇠락(Decline of the English Murder)>이라는 건데 당시 그러니까 1940년대 영국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들이 별로 볼 만한 게 없다고 불평하는 내용입니다. 둘 다 풍자적이고 익살이 섞인 글입니다. 편집자님이 평범한 번역 후기는 안 된다고 하셔서 고민하다가, 이 책에서 드 퀸시도 발랄하게 갔으니 후기도 발랄하게 가 보자, 해서 이 두 글을 번역해서 그냥 후기로 대신하면 어떨까요 하고 나름 꼼수를 써봤는데요, 편집자님께서 말씀하시길,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그 두 편의 글에 덧붙여, 에드거 앨런 포와 조지 오웰이 했듯이 드 퀸시의 <살인> 에세이를 오마주한 글을 한 편 더 써 주시면 어떨까요’ 하시는 바람에 그만 독박을 뒤집어 쓰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여기 실린 후기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드 퀸시의 화법을 패러디한 히치콕의 짧은 연설문을 찾아서, 포와 오웰의 글은 따로 안 실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책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독자 질문]
1. 특정 장르/분야의 글을 번역할 때 그 장르 언어에 익숙하기 위해 따로 뭔가를 하시는지요?
: 그 분야의 언어에 익숙해지려면 일단 번역을 시작하기 전에 책을 완독하여 그 책의 전체 맥락과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일이 필수입니다. 작업하는 도중에 배경 지식을 얻기 위한 독서를 병행하는 일도 많습니다. 저자의 다른 책들도 찾아서 읽고, 특히 번역서에 인용된 책들을 찾아 앞뒤 맥락을 확인하는 일은 반드시 합니다. <007 제임스 본드의 과학>이라는 책을 번역할 때는 그때까지 나온 모든 제임스 본드 영화들을 보았습니다. 이건 그 책을 번역하는 데 필수였습니다.

97649012. 책을 번역할 때 가장 곤란했던 점과 가장 신경을 썼던 점은? 저자 특유의 문장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떤 점에 주의했고 어떤 점이 특히 어려웠는지 궁금합니다.
: 곤란했던 점은 역시 드 퀸시 특유의 길고 난한 문장들이었죠. 단어들도 요즘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 문어투나 고어체 용법으로 쓰인 것들이 많고요… 만약 적당한 풀이를 영한사전에서 찾을 수 없을 때는 OED(Oxford English Dictionary)를 뒤졌습니다. OED는 그 영어 단어가 처음 문헌에 등장한 시기부터의 의미 변천사를 다 볼 수 있게 해 놓았죠. 영어사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OED의 예문 검색창에서 저자 이름 ‘Thomas de Quincey’를 치면 예문이 1천 개가 넘게 나옵니다. 그걸 다시 연도순으로 정렬하면 지금 내가 번역하는 바로 그 글에 수록된 예문들을 최소한 수십 개는 건질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드 퀸시 자신이 만들어낸 단어, 혹은 최초로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 단어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드 퀸시는 ‘subconscious’ 즉 ‘잠재의식’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나오기 반세기 이전에 말이죠. 또 ‘clue’라는 단어를 현대 추리소설에서 쓰는 대로 미스터리를 푸는 ‘단서’라는 의미로 사용한 최초의 범죄 소설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선대와 동시대의 여러 편집자들이 달아놓은 상세한 주석도 있고, 또 일역본과 불역본도 나와 있어서 이것들을 참고하여 대부분의 난관을 헤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3. 드 퀸시의 책은 국내에서 2번 번역되어 나왔는데요, 이번 번역에서 중점을 둔 부분 혹은 차별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6940803
: 드 퀸시의 대표작이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시공사)과 <어느 영국인 아편중독자의 고백>(펭귄북스)의 두 가지 번역본으로 나와 있죠. 이것과 특별히 차별점을 둬야겠다고 의식하고 작업하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이 <살인>과 <고백>은 서로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저는 <살인> 번역을 시작하기 전에 <고백>을 읽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약간 지루했습니다. 젊은 시절 런던에서 떠돌며 메리와 만나는 부분이나 뒤에 가서 기괴한 환상이 펼쳐지는 부분은 좋은데, 아편에 대해 이야기한 모든 부분들, 아편을 몇 온스 먹었고 끊으려고 뭘 했고… 자기가 왜 아편을 복용했는지 구구절절 변명하는 부분이 제겐 좀 구차하게 들렸어요… 드 퀸시의 캐릭터와 문체에 익숙해진 지금 다시 읽으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살인>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작업 시작할 때부터 완전 신나고 재밌었어요. 작업 기간이 얼마나 걸리나 재보려고 첫 글 <맥베스>를 시험 삼아 해봤는데 그때부터 벌써 머릿속에서 둥! 하고 종이 울리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작업 끝날 때까지 그렇게 하이한 상태로 쭉 갔습니다. 아마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소재에 드 퀸시 특유의 장광설과 비틀린 유머 감각이 결합해서, 또 그것이 저 자신의 취향과 궁합이 잘 맞아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4. 번역 작업을 할 때 출발어에 대한 ‘충실함’과 도착어의 창조적 독립 사이에서 많이 갈등하는 편인지, 그렇다면/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1583083: 여기서 ‘충실함’의 정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것 같은데요. 여기서 단어 하나하나를 품사 그대로 옮기고 문장 구조와 어순을 보존하는 것이 ‘충실한’ 번역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음… 번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거칠게 말해, 저는 한 문장 단위에서 저자가 전달하려는 의미가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오롯이 옮겨졌다면 충실한 번역이라고 봅니다. (생각은 이렇게 하지만, 제가 번역할 때 정말로 문장을 막 해체해서 재조립하는 일은 드뭅니다. 사실 그건 굉장히 품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또 이번 드 퀸시 책처럼 문학 작품의 경우는 문체가 주는 느낌까지—물론 100퍼센트 전달은 힘들겠지만–전달해 주어야겠죠. 그런 의미의 충실함을 전제한다면, 저는 창조적 독립보다는 충실함 쪽으로 확실히 더 기웁니다. 이건 전적으로 번역자 개인의 성향에 따라 갈리는 문젠데요. 제 경우는 아직 저 자신에게 번역’가’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낯간지럽습니다. 진짜 번역가는 배수아, 성귀수 선생님 같은 분들이죠. 그분들은 번역가이기 이전에 이미 작가, 즉 창작자셨으니까요. 저는 애초에 편집자로 출발했기 때문에 아직도 편집자로서의 마인드가 기본으로 장착돼 있고, ‘나는 편집자와 협업하여 책을 만드는 스태프의 일원으로서의 번역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번역도 제 개성을 최소한으로 드러내고 저자의 개성을 최대한 살려 주는 쪽으로 작업하려고 노력합니다.

끝으로, 저는 특히 범죄-추리-스릴러 장르 독자분들이 이 책을 많이 읽어 주시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읽으시다가 오역이나 표기 오류 등을 발견하신 독자분은, 제 홈페이지에 정오표 란을 마련해 놓았으니 댓글로 신고해 주시면 추첨을 통해 사은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제 홈페이지 주소는 역자 소개글 맨 뒤에 쓰여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 드 퀸시의 캐릭터와 뒤팽의 공통점: “저명한 집안 출신이지만 잇따른 불운으로 가난하게” 됨. “책이 그의 유일한 사치품”이며 “광범위한 독서가”로 대단히 박식하고, “공상벽”과 몽상가 기질이 있음. 밤마다 나와서 거리를 산책하는 습관이 있음. 논리적이지만 직관이 뛰어남. 살인과 죽음에 대해 비상한 흥미를 품고 있음. 프로를 능가하는 아마추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변덕과 기벽의 소유자. 어떤 평자는 포의 <도둑맞은 편지>가, 드 퀸시가 콜리지의 표절 혐의를 조사하여 폭로한 일화와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함. 실제로 드 퀸시는 당시 신문에 보도된 살인 사건들의 기사를 보고 추리하여 범인을 찾아내는 게임을 즐겼고, 때로는 경찰보다 먼저 범인을 맞추기도 했음.

 

1811년 래트클리프 하이웨이 연쇄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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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존 윌리엄스의 스케치

토머스 드 퀸시의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은 1811년 런던에서 일어난 실제 연쇄 살인 사건을 테마로 하여 드 퀸시가 쓴 글들을 묶은 것입니다. 이 해 12월, 아일랜드인 선원 존 윌리엄스가 런던 이스트엔드의 래트클리프 하이웨이에서 12일 간격으로 두 일가족을 잔혹하게 몰살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영국 전역에 큰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전국의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습니다.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에는 당시 신문에 게재된 삽화들이 도판으로 실려 있는데, 여기에 그 삽화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 사건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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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희생자인 포목상 티모시 마(Timothy Marr) 일가족의 상점 겸 살림집 전경. 1811년 12월 7일, 존 윌리엄스는 이 집에 침입해 티모시 마와 그의 부인과 갓난아기, 도제 소년을 살해하고 달아났습니다. 하녀 한 명은 심부름을 나가 있어 참사를 면했습니다. 이 삽화는 <런던 크로니클>에 실렸습니다.

Ratcliffe_Highway_Murders,_Seaman's_Maul_used_in_the_first_murders

존 윌리엄스가 범행 현장에 흘리고 달아난 살인 흉기인 나무 망치의 실측도. 이 나무 망치에 새겨진 머리글자 J.P.는 그를 검거한 결정적 증거가 되었습니다. J.P.는 존 윌리엄스와 같은 숙소에 묵고 있던 함부르크 출신 선원 욘 페테르센의 머릿글자였습니다. 존 윌리엄스는 욘 페테르센이 잠시 고국에 돌아가 있는 사이 그의 공구 상자에서 이 나무 망치를 훔쳐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여기서 삽화가는 J.P.를 I.P.로 착각한 듯합니다.)

Ratcliffe_Highway_Murders_Reward_poster

마 가족 살인 사건의 범인을 수배한 현상금 포스터. 50파운드의 현상금이 내걸렸습니다.

Ratcliffe_Highway_murders_-_funeral_of_the_Marr_family

살해된 마 씨 일가족의 장례식 광경입니다. 드 퀸시에 따르면 이 장례식에는 3만 명의 노동자가 참석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관에는 마가, 두 번째 관에는 아기를 품에 안은 마 부인이, 세 번째 관에는 도제 소년이 안치되었다. 그들은 관을 나란히 하여 함께 묻혔다. 3만 명의 노동자들이 공포와 슬픔이 서린 표정으로 장례 행렬을 뒤따랐다.” 이 삽화는 1811년 12월 24일 <런던 크로니클>에 실렸습니다.

Ratcliffe_Highway_Murders,_escape_of_John_Turner

마 가족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12일이 경과한 1811년 12월 19일, 마의 상점에서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킹스 암스’ 선술집에서 선술집 주인 존 윌리엄슨과 그의 부인과 하녀가 살해됩니다. 위의 삽화는 역시 <런던 크로니클>에 실린 것으로, 이 선술집의 고정 하숙객이었던 젊은 직공 존 터너가 2층 자기 방에서 침대 시트를 묶어 극적으로 탈출하는 광경입니다.

존 윌리엄스는 그가 묵고 있던 숙소 주인과 동료 투숙객들의 신고로 1811년 12월 24일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12월 28일, 감방 안에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법의학 기술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을 때라 수사가 전적으로 증언에 의존했기에, 그의 진범 여부와 공범의 존재 여부에 대한 의견은 아직까지도 분분합니다. 현대의 한 평자는 그가 진범이 아니었으며,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었고 오히려 진범에 의해 살해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Ratcliffe_Highway_Murders_-_Procession_to_interment_of_the_supposed_murderer_John_William

그의 시체는 당시의 법에 따라 가슴에 말뚝이 박힌 채 마차가 지나가는 도심의 사거리 밑에 매장되었습니다. 위의 삽화는 두 번째 범행 현장인 존 윌리엄슨 씨의 선술집 앞에 그의 매장 행렬이 멈춰선 광경입니다. 수레 위에는 존 윌리엄스의 시체와 그가 사용한 살인 흉기들이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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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가 매장되기 직전의 광경을 묘사한 또다른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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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존 윌리엄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4년 뒤인 1815년 <런던 크로니클>에 실린 삽화로, 존 윌리엄스의 시체가 살인 무기와 함께 수레에 실린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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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의 시체는 그로부터 75년이 흐른 뒤에 다시 햇볕을 보게 됩니다. 1886년, 가스 공사를 하려고 사거리를 파헤치던 인부들이 몸에 말뚝이 박힌 한 남자의 해골을 발견한 것입니다. 파헤쳐진 그의 두개골은 이 사거리 앞 술집의 눈에 잘띄는 공간에 한동안 전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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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가 묻혔던 네거리의 현재 모습. 예전의 술집은 훗날 주거용 건물로 바뀌었습니다. 존 윌리엄스의 해골은 현재 분실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ratcliff3래트클리프 하이웨이 살인 사건 지도.

1. 첫 번째 마 가족 살인 사건이 벌어진 래트클리프 하이웨이 29번지  2. 마 가족의 시신이 매장된 세인트 조지 인 디 이스트 교회  3. 두 번째 살인 사건이 벌어진 킹스 암스 선술집  4. 두 번째 희생자인 윌리엄슨 가족이 묻힌 세인트폴 교회  5. 존 윌리엄스가 묵었던 올드페어 여관의 대략적 위치  6. 살인범 존 윌리엄스가 매장된 구덩이 위치.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간(2)

“오토 노이라트(1882-1945)는 20세기에 가장 인정을 못 받았던 천재 중 한 명이다. 그를 경탄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업적에 대해 개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많은 영역에서 개혁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통이 크고 쾌활한 성품이었으며 친구와 적을 동등한 정감으로 대한 것으로 유명하다…매우 설득력 있는 연설가이자 지칠 줄 모르는 조직자 노이라트는 특히 다양한 학제, 계층과 민족들 사이에 가교를 놓는 데 헌신했다… “모든 사람이 공동의 문화에 참여할 수 있고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들 사이의 심연에 다리가 놓이는 즉시 인간은 더욱 완전하게 이해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인간 발전기 노이라트처럼 경제 정신의 보급과 경계를 허무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단한 업적들이 인정을 받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에서 기술한 사상가들 중 어느 누구도 다방면에 박학다식한 노이라트만큼 기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없었고, 2차 대전 후 세계를 그렇게 잘 이해한 사람도 없었다. 그가 만약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한 문화의 영웅이 됐을 것이다…그가 관심을 두었던 그 방대한 학문적 영역을 볼 때, 어느 누구도 그가 산 세기에 그를 능가하지 못했다. 누가 과연 물리학, 수학, 논리학, 경제학, 사회학, 고대사, 정치학 이론, 독일문학사, 건축, 응용 그래픽 영역에서 진정한 연구를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헤르츨처럼 노이라트 또한 실천적 유토피아주의자였다. 그러나 그 씨앗의 결실은 다른 사람들이 거두었다. 성인 교육을 위해 그렇게 많이 노력한 그가 잊혀졌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분명 전문화의 희생양이었고 이것이 그의 백과사전주의를 조소하게 만드는 것이다. 빈 학파의 다른 어떤 학자도 그 집단적 업적을 노이라트만큼 훌륭히 해내지 못했다. 또한 어느 누구도 그렇게 당당히 통합적 사고로 오스트리아인의 재능을 구현한 사람은 없었다.”
(윌리엄 존스턴 지음, 김래현 외 옮김,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신사와 문화사의 재발견>, ‘오토 노이라트: 만능 천재의 사라짐’, 317-322쪽.)

“”오토 노이라트처럼 독특하게 대위법적인 저자를 독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그리고 자기가 알아낸 일부분을 전체로 착각함으로써 그를 오독하는 방법 역시 여러 가지다. 그의 다양한 활동 분야 중에서도 특히 경제에 대한 저작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조차, 사람들은 이를—또 그가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 시도한 것을—두고 그에게 서로 모순되는 딱지를 붙이곤 했다. 그는 ‘낭만주의자’이자 ‘광인’이었고, ‘공산주의자’이면서 ‘부르주아’였으며, ‘바보’인 동시에 ‘선지자’였다.”
(Thomas E. Uebel, ‘Introduction: Neurath’s Economics in Critical Context’ in Otto Neurath, Economic Writing Selection 1904-1945 (Springer, 2004), p. 1.)

오늘날 노이라트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조명되고 있습니다.

1. 논리실증주의 과학철학자
2. 아이소타입과 정보 디자인의 창시자
3. 사회주의 경제학자, 정책 기획자.

이 중 과학철학자로서의 노이라트에 대해서는 논리실증주의, 비엔나 서클, 통일과학운동에 대한 책과 글들을 통해 비교적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오늘날 픽토그램의 원형이 된 그림 언어 체계 ‘아이소타입’에 대해서도 디자인 분야에서 많은 책과 글이 나와 있죠.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 이론가/실천가로서 그의 면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부분입니다.

난점은, 그의 어느 한 측면만을 조명하면 그 한 가지 측면마저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는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소타입’은 그가 참여한 ‘붉은 빈’의 사회주의 실험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었으며, 언어의 통일을 통한 지식의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통일과학운동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 다층적인 면모를 한 사람의 저자가 종합적 시각으로 아울러 조망한 평전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과학철학 분야와 디자인 분야에 국한된 책들을 제외하면, 현재 그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책은 Vienna Circle Collection 시리즈에 포함된 (눈물 나게 비싼 T_T) 그의 저작집들입니다. 또 Vienna Circle Institute Yearbook의 한 권으로 각 분야의 여러 저자가 참여하여 펴낸 책이 하나 있는데, 리뷰를 보면 글들의 수준이 들쭉날쭉한 것 같습니다. 영어권에서 노이라트는 잊혀진 사상가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책을 (구글 번역기를 돌려 가며 독일 아마존을 수색한 결과에 따르면) 독일어권에서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혹시 제가 찾지 못한 그의 독일어 평전이 있다면 부디 알려 주십시오. 찾아도 읽지는 못할 테지만요.)

웹상에서 제가 찾은 자료 중 그의 사상 전반에 대해 가장 잘 정리된 글은 스탠포드 대학에서 만든 철학 사전의 ‘오토 노이라트’ 항목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가 올리는 글들은, 노이라트가 직접 쓴 글들과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의 존 오닐이 쓴 논문들을 제외하면 이 페이지의 정보에 크게 의존할 것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간(1)

<화폐 없는 세lifewithout계는 가능하다>는 여러 저자의 글들을 모은 책인데, 애석하게도 주요 편저자인 애니트라 넬슨의 글(1장과 11장)이 제일 딱딱하고 난해한 축에 속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들은 3장 해리 클리버의 글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원래 해리 클리버의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입말에서 탄생한 글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고, 그가 육성으로 토로하는 열정이 느껴집니다. (제가 느꼈다는 말이고, 그게 번역본에도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3장의 모태가 된 1993년의 인터뷰 원고는 그 번역본이 일찌감치 국내 인터넷에 돌아다녔고, 2002년 <자율평론>에도 소개된 바 있습니다.) 트윈 오크스 공동체와 스페인 스쿼터들의 사례를 소개한 9장과 10장도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글이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번역하는 과정에서 제게 가장 큰 자극을 주었던 글은, 바로 존 오닐이 쓴 4장이었습니다.

사실 이 글은 낯선 개념과 낯선 고유명사로 가득차 있어서 번역하기가 제일 골치 아팠습니다. (심지어 ‘화폐, 시장, 생태학’이라는 제목도 지루합니다. 실은 제목을 좀 더 재미있게 바꾸고 싶었지만 끝내 좋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편집자님도 뾰족한 대안이 없으셨던 듯.) 그런데도 이 글에 흥미를 느낀 것은 오로지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게 노이라트는, 20년 전 과학철학 수업 시간에–그러니까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칼 포퍼에 의해 반박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논리실증주의를 공부하면서 약 0.1초 동안 귓가에 머물고 간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 소개된 노이라트는 영판 다른 사람이더군요. 사회주의 계산 논쟁에 참여하고, 화폐 없는 현물 경제를 주장한 급진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데다, 실제로 사회주의 혁명에 참여하여 정책을 추진한 경력도 있더군요. 이거 금시초문이네. ‘실천적 맑시스트 과학철학자’라니 좀 섹시한데…그런데 이분께서 말씀하시는 ‘현물 경제’라는 게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생전 그런 걸 경험해 봤어야지 젠장… 하며 끙끙대고  있는데, 뒤에서 지나가던 배우자분께서 불쑥 물으셨습니다. ‘무슨 책을 하고 있길래 오토 노이라트가 나와?’

남편은 디자인 전문 편집자고, 저는 사회과학 출판사에서 일했던 연줄로 주로 정치/사회 쪽 책을 번역해 왔기 때문에 서로의 분야가 겹치는 일은 바람직하게도 전무합니다. 또 우리는 상대가 만드는 책에 대해 거의 소 닭 보듯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정말 희귀하죠.

들어본즉슨, 그 당시 배우자분은 오토 노이라트의 (세 번째) 부인 마리 노이라트가 쓴, ‘아이소타입’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분의 설명에 따르면, 디자인사에서 노이라트는 매우 중요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책은 이렇게 이쁘게 나왔고 transformer

(제목도 무려 ‘트랜스포머’. 이런 메카닉한 제목이라니.)

오토 노이라트가 마리 노이라트와 게르트 아른츠와의 협업으로 만들어 낸, 이렇게 아름다운 도표들이 실렸습니다.

transformer1

neurath_kraftwagen

이쯤 되자 저는 거의 성적인(…) 매력을 느꼈고, 이렇게 섹시한 두뇌의 소유자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사진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결과는…

 

 

 

 

 

 

 

neurath-otto

(묵념)

 

혹자는 제가 이 지점에서 퀘스트를 종료했으리라 추측할지도 모르나… 만약 그랬다면 그런 불찰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거구의 대머리 아저씨에 대해 파기 시작하자, 호박이 넝쿨채로 주렁주렁 끝도 없이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딸려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