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글 목록: 다. 소개하고픈 책

남자들이 숨는 곳

옛날에 의뢰받아 작성했지만 출간되지 않은 책의 검토서 하나 더 올립니다.

남자들이 숨는 곳 Where Men Hide

twitchell_where-men-hide지은이: 제임스 트위첼(James B. Twitchell), 켄 로스(Ken Ross, 사진 촬영)
하드커버, 264페이지
출판사: Columbia University Press
출간 연월일: 2006년 2월 24일

목차

1. 사슴 사냥 캠프
2. 권투 링의 치욕과 명예
3. 프리메이슨 지부: 형제단에 입회하다
4. 남자의 취미 공간: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모형 기차
5. 자기만의 방: 남자의 가장 좋은 친구 두 가지(개와 TV, 주로 개)
6. 차고: 자동차와 캘린더 걸
7. 미국의 이발소: “다음 신사분!”
8. 야구장 덕아웃: 씹고 뱉고 싸우자
9. 집 바깥으로: 나의 자동차, 나의 인생
10. 안락의자: 훤히 보이는 곳에 숨기
11. 스트립 클럽: 추파 뒤에 숨기
12. “나는 여기가 좋더라고”: 남자의 식사법
13. 작업장의 해머 타임
14. 일터에서: 사무실에서 숨기
15. 하나님을 위한 남자들의 연대: 초대형 교회와 ‘프라미스 키퍼(아버지 학교)’ 운동

내용 소개 및 의견

이 책은 20세기 미국 문화 속에서 남자들의 공간을 조명한 책이다. 남자 혼자서 틀어박히는 공간(작업장, 차고, 자동차, 취미 공간, 안락의자, 사무 공간)과, 남자 여럿이서 모이는 공간들(사슴 사냥 시즌에 열리는 사슴 캠프, 이발소, 프리메이슨 집회소, 스트립 클럽, 대형 교회)을 문학작품이나 역사적 일화 등 다양한 문화 코드와 이론을 동원하여, 그중에서도 특히 광고나 카탈로그 등 미국의 상업적 물질문화를 통해서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서문과 결론에서 이 책의 제목이 <남자가 숨는 곳(Where Men hide)>이지만 실은 <남자가 숨었던 곳(Where Men hid)>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남자들의 공간’ 중 상당수─이발소, 프리메이슨 집회소, 사슴 사냥 캠프 등─는 미국에서 주로 20세기 초-중반까지 풍미했다가 현재는 거의 과거의 유물로 사라져 가고 있는 공간들이다. 저자는 결론에서 이렇게 ‘남자들만의 분리된 공간’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현상에 대해, 페미니즘의 시각을 채용하여 남녀 및 인종의 차별이 사라져 가는 변화의 부산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 전반에는 성 혁명이 일어난 1960년대 이전 미국의 ‘좋았던 황금기’─안정된 가정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남녀가 유별했으며 ‘우리 아버지 형님들이 핀업 걸을 가슴에 품고 전쟁터에 나갔던 시기’─에 대한 향수가 어쩔 수 없이 뚝뚝 묻어난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을 다시 붙인다면, <남자가 숨는 곳>이 아니라 <미국 남자들이 숨었던 곳을 통해 엿보는 20세기─그중에서도 특히 20세기 초-중반의─미국의 물질문화>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특정 시대 미국의 물질문화(광고 문구, 소비 상품, TV 프로그램, 대중 잡지 등)에 강하게 고착되어 있으며, 그 시대를 직접 살았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공감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문화적 코드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책 자체는 재미있다. 일단 저자가 글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썼으며 흥미로운 일화들(예를 들어 디트로이트의 빅3 자동차 회사에서는 사업상 거래를 우리나라 사람이 룸살롱 가듯 주로 스트립 클럽에서 하며, 세 회사에서 각각 잘 가는 단골 스트립 클럽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등의)도 심심치 않게 소개한다. 또 군데군데 남성들의 문화와 심리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도 엿보인다.

저자인 제임스 트위첼은 플로리다 대학 영문학 및 광고학 교수이다. 낭만주의 문학을 가르쳐 오다 10여 년 전부터 상업문화, 특히 마케팅과 광고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오고 있다. 지은 책으로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 <럭셔리 신드롬> 등이 있다.

발췌 번역

서론

만약 남자들에게 어디에 숨어서 지내느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미친 사람 아니냐는 표정을 지으면서 “뭐, 내가 숨는다고요?” 하고 되물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질문을 여자들에게 던진다면 그들은 바로 그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

내가 애초부터 남자들이 숨는 동굴을 연구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내 주된 본업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낭만주의 시를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업 문화, 그중에서도 광고를 연구하는 것이 내 부업이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이 역설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충분히 말이 된다. 나는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들을 가르치지만, 내가 진짜로 흥미를 느끼는 것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광고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마샬 맥루한이 정신 나간 소리도 많이 했지만, “언젠가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광고야말로 우리 시대 모든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가장 풍부하고도 가장 믿음직하게 반영한 사료임을 발견할 것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정곡을 찔렀다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내가 이 주제로 흘러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1990년대가 끝날 무렵, 광고계에는 작은 공황이 일었다. 젊은 남성들이 별안간 광고를 보지 않게 된 것이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그들은 갑자기 닐슨 리서치[마케팅 조사기관]의 레이더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하워드 스턴[저질스러운 입담으로 유명한 미국의 DJ] 같은 것 말고는 라디오도 듣지 않았으며 <맥심>이나 <디테일스> 같은 남성 잡지를 빼고는 아무 것도 읽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애드버타이징 에이지> 같은 업계 매체만이 아니라 전국 신문과 공중파 TV에서도 머릿기사로 다루어졌다.

남성들은 언제나 광고업자들이 찾아내기가 힘든 소구 대상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수퍼볼에 붙는 광고 단가가 30초당 2백만 달러를 훌쩍 뛰어 넘고, 텔레비전에는 프로레슬링과 배스 낚시 프로그램이 그렇게 넘쳐 나는 것이다. 익스트림 스포츠가 옛날의 게임들을 시야 저편으로 밀어내고, 스노우보드 같은 운동이 올림픽 이벤트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마 그 다음 주자는 페인트볼[서바이벌 게임]이 될 것이다. 그것은 헤비메탈과 랩이 MTV의 주류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면도 크림, 맥주, SUV 따위를 팔아야 하는 입장이라면, 팔기 전에 우선 그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남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 남자들은 찾아내기가 힘들고, 광고를 전하는 동안 한 곳에 붙들어 두기란 더더욱 힘들다. 아들 가진 부모들에게 가서 물어보라.

젊은 남자들이 광고업자의 시야에서는 숨어 버리더라도, 나는 그들을 수업 시간에─적어도 잠시 동안은─확실히 붙잡아 놓을 수 있다. 나는 남학생들에게 수업 시간이 아닐 때는 주로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리고 그중 많은 이들이 고속 인터넷이 설치된 기숙사 방이나 동아리방이나 게임방으로 돌아가서 복잡한 비디오게임을 한다는 것을 알고 흥미가 돋았다. 물론 이 세대는 오락실용 아케이드 게임을 하면서 컸지만, 오늘날의 게임도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으며 또한 전 세계에 게이머들이 있다. 온라인 포커 게임이 젊은 아이들 사이에서 큰 유행이어서 그들은 나보다도 도박 하는 것을 더 잘 안다. 그들은 또 인터넷 속으로도 숨는다. 음악을 다운로드하거나 눈요기꺼리 포르노를 보기도 하고 인터넷 메신저 같은 새로운 방식으로 친구들과 의사소통하기도 한다. 많은 아이들은 휴대 전화를 가지고 다니면서 한쪽은 귀에 꽂고 손가락으로는 항상 문자를 보낸다. 결국 그들은 그곳에 잘 있었다. 다만 1980년대처럼 타임워너와 비아컴과 뉴스 코퍼레이션[셋 다 거대 미디어 그룹임]의 교차 지점에 있지 않을 뿐이다. ESPN, <필드 앤 스트림[Field and Stream, 사냥 및 낚시 잡지]>, ‘아웃도어 라이프 네트워크[Outdoor Life Network, 역시 사냥과 낚시를 주로 다루는 케이블 채널]’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며 다시 데리고 올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했다.

사라지는 남자들의 역사(상업 문화를 이끌어 온 프로그래머들은 남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때가 1960년대부터라고 보고 있다)에 대해서 한창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머리를 자를 일이 생겼다. 내가 간 곳은 집 근처의 작은 대학촌에 자리한 ‘콜린스’라는 유니섹스 미용실이었다. 그 창문에는 ‘남녀 모두를 위한 헤어스타일링’이라는 문구를 써 붙여 놓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너덜너덜해진 <에스콰이어> 1999년 3월호를 집어 들었다. 잡지를 뒤적이는데, 뉴저지의 한 사진작가가 ‘남자들의 방[Men’s Room─남자화장실이라는 뜻도 있음]’이라는 제목으로 찍어 게재한 화보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우리는 어디에 머무는가: 남자들이 여자 없이 서식하는 곳들의 초상”이라는 헤드라인이 붙어 있었다(Montali, 52p.). 나는 그 이미지들과 거기에 붙은 복잡한 설명에 이끌렸다.

나는 그 사진들이 사람을 끌어당긴다는 것을 곧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머리를 자를 때는 안경을 벗기 때문에, 글씨가 잘 안 보여서 잡지를 코앞에까지 끌어당겨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러고 있자니, 항상 내 머리를 잘라 주는 데이빗도 자르던 것을 멈추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도 흥미가 동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우리는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우리 바로 옆 자리에서 한 여자가 머리를 염색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본 것은 아쉽게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수영복 화보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고에서 모형 자동차들이 경주하는 모습, 텅 빈 권투 링, 모형 기차 세트 따위에 불과했지만, 우리 둘은 그러한 이미지가 너무나 익숙했고 기묘하게도 공범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발소 문화는 나의 세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변화를 겼었다. 내가 아직 꼬마였을 때, 버몬트 주 벌링턴 읍내의 뱅크 스트리트 이발소는 항상 잡담 소리로 시끄러웠다. 이발사들은 자기들끼리나 손님들하고나 편안하고도 친숙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발소에서 대기하다가 내 차례가 와도 건너뛰고 제리 머롤라 씨가 일을 다 끝마칠 때까지 기다릴라 치면, 다른 이발사들의 악의 없는 놀림을 감수해야만 한다. 다른 이발사들은 “아 그래, 네 머리는 제리만 잘라 줄 수 있지.” 하고 나를 놀려 먹으면서 모두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예약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이발소에는 집에서는 구경도 못할 잡지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다 1960년대부터 여자들이 이발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어고시[Argosy, 대중소설 잡지, SF작가들의 등단 무대이기도 했음.]>와 <폴리스 가제트[The Police Gazette, 싸구려 소설 잡지로, 속옷 차림을 한 여성들의 그림을 실었는데 이것이 핀업 걸의 원조가 되었다.]>는 자취를 감추었다. 머리를 자르는 것은 사적인 일이 되었다. 가위 대신에 플라스틱 날이 달린 전동 클리퍼가 등장했다. 그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여자가 머리를 잘라 줄 확률이 높아졌으니 잘 된 거 아냐.

그래서, 현대적인 방식에 따라 데이빗과 나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이 사진에서 본 것이 남자들이 가는 곳에 대한, 그리고 그들이 가진 물건들에 대한 일종의 로드맵임을 깨달았다. 이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평화로움을 느꼈다. 나는 이 공간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 자신이 그 일부라고 느꼈다. 나는 궁금했다. 이 이미지들을 면밀히 읽어 냄으로써 남자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이 이미지들 속에서 남성성의 내러티브를 형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텍스트(윽, 이건 영문학 선생 말투인 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또는 요즘 학계의 유행어를 써서, 남성성이 구성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형성하는 것 중 일부를 이 사진들 속에서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사진작가인 켄 로스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남자들의 방’이라고 이름 붙인 남자들의 공간을 찍은 사진들을 좀 더 볼 수 있겠느냐고 부탁하였다. 그는 내게 그중 몇 장을 보내 주고 나중에 다시 몇 장을 더 보내 주었는데, 그것을 보고 나는 그가 많은 물건들을 한데 아우르는 공간의 위상학을 창조해 내었음을 깨달았다. 한 공간에서 보이는 모티프와 상징들이 다른 이미지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냈고, 특정한 종류의 시각적 이미지들이 다양한 내러티브를 관통하며, 말하자면 화성[<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그 화성]을 관통하면서 자리를 바꿔가며 등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를 다 보고 나자, 나는 일종의 황량함을, 어두컴컴하고 심지어는 불길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헤밍웨이와 맥주 광고가 뭐라고 뇌까리건 간에, 남자의 공간은 확실히 해피밀은 아니다. 화성은 정말로 외롭고 기묘하게 삭막한 곳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를 휴식의 순간으로, 남자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기 위해 찾아들어가는 구석으로, 죽치고 앉아 뭘 만지작거리거나 빈둥거리는 장소로, (여자들을 공공연히 적대해서가 아니라 남자들에게는 그저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여자들에게 불친절한 휴게실로 본다면, 그곳은 충분히 즐거운 공간이 된다.

7. 미국의 이발소: “다음 신사분!”

우리 부모님 대에서부터 내려온 이발소 농담이 있는데 이런 것이다. 한 농부가 머리를 자르러 읍내에 나갔다. 그는 참을성 있게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이발사가 “다음 신사분!” 하자, 농부는 펄쩍 뛰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빨리? 내가 다음인 줄 알았는데?”

이 농담을 음미하려면 이발소의 평등주의적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발소는 모든 남자들이─거의 모든 남자라고 하자─동등하게 대우받는 곳이다. 물론 어느 특정한 이발사를 원한다면 차례를 건너뛰고 더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이발소에서 취하는 표준적인 행동은 이렇다(아니 이러했다). 이발소에 간다. 차례를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잡담도 좀 한다. 머리를 자른다. 돈을 내고 나온다. 불평할 일이 없다. 남자들이 숨는 다른 많은 공간들과 마찬가지로, 이발소에도 이 과정을 확립하는 입문 의례가 있다. 소년이 처음으로 머리를 자르는 것은 엄마에게서 분리되는 중요한 순간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중요한 행사이다. 스페인어 문화권에서는 이 행사를 가리키는 숙어─“이발소에서는 울면 안 된다(En la barberia no se llora)”─까지 있다.

요즘에는 이발소에서 보내는 시간이 기다리는 데 15분, 머리 자르는 데 15분 정도면 되지만, 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곳에서 족히 한 시간은 넘게 보냈다. 이발과 면도라는 두 가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면도는 이발소에 가는 중요한 이유였다. 지금은 에이즈라는 유령 때문에 면도가 이발소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이발소라는 공간 전체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것은 (시가 바처럼) 남자들이 방치해서도 아니고 (프리메이슨처럼) 여자들이 개입해서도 아니다. 이발소가 사라진 것은 주로 일회용 면도기 때문이다. 1880년대의 남성 인구가 5천만 명에 이발사의 수는 약 4만 5천 명이었는데, 오늘날에 소비자의 수는 그 6배가 증가한 반면 이발사의 수는 제자리걸음이다. 이러한 쇠퇴는 특히 2차 대전 이후로 더더욱 급격해 졌다. 1950년대에는 총 28만 천 개의 이발소가 있었던 반면, 현재 그 수는 5만 5천 개로 줄었다(Steten, p.42).

옆 페이지의 이미지는 이발소가 역사적으로 쇠락의 일로를 걷고 있는 와중에 찍은 것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흔적과 그것이 현재 쇠퇴하게 된 이유를 둘 다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남자들이 머리를 자르는 장소라는 의미로서 ‘이발소’라고 부르는 것은, 한때는 시가, 위스키, 도색 잡지,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술이 소비되는 시끌벅적한 소굴이었다. 사진 속 정면에 걸린 거울 옆에 이발사가 써 붙여 놓은 메모를 읽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현대성으로의 변화를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업자와 고객 양자는 서비스가 수행되는 동안 흡연이 금지되어 있음.”이라고 쓰여 있다. 간단한 메모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공식적인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이는 이발소들의 과거 모습을 희화화한 것이기도 하다. 남자들은 집에서 시가를 피울 수 없으면(혹은 술을 마실 수 없으면) 그것을 이발소로 들고 왔다.

이발소와 선술집(saloon)의 공통점은 바로 ‘병’이었다. 금주법 시대에 이발소는 가끔씩 무허가 술집 역할도 했다. 그때에는 알코올을 주 원료로 한 모발용 약품을 (이발사 자리 앞쪽 찬장에 쌓아 놓고) 색깔 있는 병에 담아 팔았는데, 규제 대상이었던 에틸알코올을 뒷방에 통으로 쌓아 두고 거기서 병에 덜어다 몰래 팔기도 했다. 실제로 요즘에 애프터 셰이브로 쓰이는 ‘베이 럼’에는 그 시대의 밀주 진과 비슷한 마개가 달려 있는데, 이는 머리에 바르는 토닉과 몸속에 부어 넣는 토닉과의 연관성을 상기시킨다. 금주법 시대는 처방전 없이 매매하는 특허 의약품, 이른바 만병통치약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진통제라는 명목으로 알코올과 아편제를 운반하는 주된 수단이었다. ‘시폼(Sea Foam)’, ‘브릴리언타인(Brilliantine)’, ‘타이거 럽(Tiger Rub)’ 같이 이발사가 조제한 약품들 덕분에 남자들은 알콜 음료의 유통과 판매를 금지한 수정헌법 18조를 교묘히 피해 갈 수 있었다. 실제로 이발소 모발용 토닉의 알코올 도수는 특허 의약품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서 여자들이 ‘부인병에 효험이 있는’ 리디아 E. 핑크햄의 ‘식물 복합제’를 사는 동안에, 남편들은 이발소에서 ‘플로리다 워터’를 보충하고 있었다.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갱단 조직원들이 면도를 하던 도중에 살해당했는지 의문을 품어 보아야 한다. 그건 그곳이 그들의 비즈니스 장소였기 때문이다. 뒷방은 술병 공장이고 앞방은 남자들이 득시글한 이발소라니 이 얼마나 찰떡궁합인가.

 

리처드 호프스태터–미국의 반지성주의

이 책이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오래 전에 제안했다가 빠꾸 먹은 검토서 올립니다. 2009년에 쓴 것입니다.

untitled미국의 반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

지은이: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
출간연도: 1962년
분량: 434쪽
출판사: Vintage Books

목차

1부 서론
    1장 우리 시대의 반지성주의
    2장 지식인을 백안시하는 경향에 대해
2부 가슴의 종교
    3장 복음주의의 기풍
    4장 복음주의와 신앙 부흥 운동
    5장 모더니티에 대한 반감
3부 민주주의의 정치
    6장 젠틀맨 계층의 쇠퇴
    7장 개혁 세력의 운명
    8장 전문가 집단의 부상
4부 실용 중심의 문화
    9장 기업가와 지식인
    10장 자기 계발 및 영성 개발 서적
    11장 반지성주의 테마의 변종들
5부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
    12장 학교와 교사
    13장 ‘생활 적응(Life Adjustment)’ 운동
    14장 어린이와 세계
6부 결론
    15장 소외와 순응의 지식인
감사의 말
찾아보기

내용 요약

이 책에서 말하는 ‘반지성주의’란 지식인과 지적 활동을 백안시·적대시하는 사회적 경향을 말한다. 저자는 먼저 이 주제를 다루게 된 계기인 1950년대의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고, 여러 가지 맥락에서 반지성주의적 태도가 드러난 연설문, 의사록, 인터뷰, 기사 등 1차 자료들을 차례로 소개한다.(1장) 이들 사례를 종합하며 저자는, 미국에는 지식인이 허세에 차 있고 대중을 기만하며 남성적이지 못한데다 속물적이고, 나아가 비도덕적이고 위험하다는 고정관념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고정관념에 따르면 평범한 사람이 살면서 몸으로 체득한 상식과 윤리야말로 전문가나 식자들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즉 분석적이고 보편적인 ‘지성(intellect)’을 배격하고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슬기(intelligence)’를 중시하는 것이 미국의 풍토이다. (이를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이 바로 미국의 영웅으로 받들어진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다.)

미국 건국 초기만 해도 청교도 성직자와 헌법 제정자(Founding Fathers)라는 두 지식인 집단의 연합이 사회적 권력을 행사하며 지적·정치적 전통의 기초를 세웠다. 그러나 1820년대 이후부터 서부 개척, 산업 발전, 평등주의 부상 등의 사회 경제적 변화로 인해 건국 초기의 공화 질서가 해체되었다. 전통적 명문 계층은 세련된 문화를 영위하며 명맥을 유지했지만 그 사회적 영향력은 대폭 축소되었고, 그와 더불어 비판적이거나 창조적인 정신도 잃었다.(15장)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들이 시대를 호령하고 비즈니스 논리가 거침없이 통용된 19세기의 도금 시대(Gilded Age)는 ‘나약한’ 지식인과 ‘쓰잘데기 없는’ 학교 교육에 대한 경멸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사회가 복잡해지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공식 교육을 받은 전문가의 지식을 여러 분야에서 필요로 하게 되자(특히 뉴딜 정책이 시행되면서, 지식인들은 전문가 집단으로서 정부 정책에 참여하여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지식인에 대한 비웃음은 두려움과 분노로 바뀌게 된다. 또 이데올로그로서 지식인의 비판적, 진보적 특성 때문에 우익들은 전통적으로 지식인을 적대시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미국 반지성주의의 깊숙한 곳에는 모더니티 자체에 대한 반동이 숨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5장) 즉 1차대전 이후 미국에 몰아닥친 변화–세계시민주의와 다윈 진화론의 유입, 미국 고립주의의 종말, 전통적 자본주의의 (대공황으로) 붕괴와 중앙 집중화된 복지 국가로의 전환, 막대한 전쟁 부담 등–를 거부하고, 대륙으로 떨어져 고립된 채 촌락 사회가 온존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뒷받침하며 산업 자본주의가 제재 없이 활개 쳤던 19세기의 미국으로 회귀하려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 사회에서 반지성주의의 모태가 되거나 희생양이 된 분야를 하나씩 역사적으로 검토한다. 우선 18세기 중후반~19세기에 미국을 휩쓸었고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은 반지성주의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3-4장) 초창기의 청교도 성직자들은 지식인 계층이었지만, 18세기 중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청교도 시대가 끝나고 복음주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운동을 주도한 전도사들은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았었으며, 기존 성직자들을 ‘교활하고 냉혈한 위선자 집단’으로 매도하고 “성경 외에는 책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호전적인 반지성주의 운동을 벌였다. 문명과 교육에서 소외된 남서부 벽촌의 주민들을 최대한 많이, 빨리 전도하려면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고 요란한 통성기도에 의존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던 것도 있다. 남북전쟁 이후에는 도시 인구가 폭발하면서 드와이트 무디, 빌리 선데이, 빌리 그레이엄 등 대도시를 무대로 전국적 성공을 거둔 스타 전도사들이 출현하는데, 이들은 신문에 광고를 내고 교회가 아닌 대형 강당에서 집회를 여는 식으로 복음주의에 비즈니스 마인드를 결합했고, 서커스에 나오는 거인을 도어맨으로 고용하고 설교 중에 옷을 벗어젖히거나 비속어를 내뱉는 등 쇼와 비슷한 요소를 가미했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에는 앞서 말한 모더니즘 유입의 반작용으로 종교적 근본주의가 오히려 더더욱 전투적이고 완고해지며(1920년대에는 학교에서의 진화론 교육을 반대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진다.), 다양성을 용납지 않고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파악하는 미국 우익 세계관의 기저를 이루게 된다. 개신교 근본주의와 연합하여 모더니티에 반기를 들었다는 면에서 가톨릭도 예외는 아니었다. 복음주의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정신적 전통은, 학습된 인공적 이성보다도 신이 주신 직관적 “지혜”를 선호하는 원시주의(primitivism)다. 이는 애초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련되었지만 타락한’ 유럽 문명과 스스로를 구분하면서 세워졌다는 데서도 기인한다.

복음주의와 원시주의가 미국인의 의식에서 반지성주의의 뿌리를 이룬다면, 반지성주의가 미국인 의식의 전면으로 떠오른 것은 미국이 비즈니스 패권이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9장) 비즈니스와 지식인은 근본적으로 서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을 뿐더러, 개척지에서 맨손으로 사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거칠고 공격적인 남성적 마인드와 과감한 의사결정, 기회를 놓치지 않는 순발력이 미덕이 되고, 지적이고 문화적인 것은 ‘유약하고 여성적’이라고 배척하는 풍토가 심화된 것이다.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문화를 애호하는 부유한 (특히 동부 해안 지역) 상인 계층이 지식인을 후원하는 전통이 이어졌지만, 비즈니스가 서부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새로 유입된 신흥 자본가들은 반지성, 반문화 운동에 가장 큰 동력을 제공한 세력이 되었다. 이들 중 다수는 공식 교육 없이 맨손으로 자수성가하여 성공 신화를 양산한 장본인들이었는데, 이들의 이상을 잘 반영한 문헌이 19세기부터 출현한, 강한 종교색을 띤 자기계발(self-help) 서적들이다.(10장) 원래 비즈니스에 열심히 임하는 것이야말로 신을 섬기는 방법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청교도 논리인데, 19세기 말부터는 미국 중산층 기질의 세속화와 더불어 이 관계가 역전되어 신앙이 세속적 성공의 도구가 된다. 이런 부류의 ‘종교 실용서’에는, 타고난 재능보다 인성을 강조하고, 사업 경영에 쓸모없는 고등 교육보다 현장에서 부딪치며 배우는 경험을 중시하며, “내향적 기질보다는 외향적 기질이, 비판적 지성보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기업가들의 마인드가 담겨 있다. 20세기에 들어 비즈니스 규모가 커지면서 기업도 전문적인 관리·기술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고, 대학도 이에 부응하여 경영대학원(business school)을 설립하는 등 좀 더 실용적인 직업 교육을 도입하게 된다. 하지만 기업 경영 현장의 변화와는 별도로 지성과 재능보다 인성과 순응을 선호하는 기업가들의 마인드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지식인과 그들의 전문 지식을 적대시하는 경향은 비단 기업가들뿐만이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심지어 노동 운동) 사이에서도 보편적이었다.(11장) 미국 농민들은 계급감정과 실용주의의 영향으로 젠틀맨 계층의 부농과 전문가들이 개발한 새로운 농법을 불신하고 이를 받아들이기를 오랫동안 꺼렸다. 또 지식인들은 초창기 노동 운동의 태동과 노동자들의 의식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면서도 이후 노조와 사회주의 정당 내에서 소외되었다. 이는 지식인들이 노동 운동을 통해 사회주의나 개혁 등 더 큰 목표를 추구했던 반면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기업가와 유사한 자수성가형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 서로 지향점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먹물에 찌들지 않은 순수하고 강인한 노동자’의 이상이나 조직 내의 잭슨식 평등주의 이상과 충돌을 빚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잭슨식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로 대표되는, 미국 사회 특유의 평등주의적 풍토는 미국 정치에서 반지성주의를 규정한 주된 힘이었다.(6장) 처음 미국을 건국한 지도자들은 부유한 지식인(젠틀맨) 계층이었지만, 평등주의적 욕구는 아주 초창기부터 지식인 내지 전문 정치인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잭슨식 민주주의’란 1824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앤드류 잭슨(지지자들은 그를 책이 아니라 숲과 들판에서 배운 지혜를 지닌 농부의 아들, 보통 사람들의 영웅으로 찬양했다)으로부터 유래한 정치 이념으로, 중앙 집권과 상류층을 배격하며, 정부 활동은 기본적으로 특별히 교육받은 전문가가 아니라 상식을 지닌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이후로 전통적 젠틀맨 계층은 정치 무대에서 소외되었고, 공직은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하게 되었으며, 의회에서는 위스키와 단검이 난무하게 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젠틀맨 가문의 지식인 개혁가들이 공무원을 시험을 통해 뽑으려는 공직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정치 기득권과 충돌을 빚게 된다(7장). 개혁가들은 기존 정치인들이 무식하고 천박하며 부패했다고 비난한 데 비해, 정치는 남성의 전유물이므로 유약하고 여성적인 지식인들은 거칠고 힘든 정치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기존 정치인들의 주장이었다. 이런 고정관념을 쇄신한 사람이 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그는 부유한 집안 태생에 하버드 출신이었지만 개인적인 남성적 매력과 서부에서의 경험을 내세워 강하고 결단력 있는 인상을 줌으로써 1890년대에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미국은 혁신주의(progressivism) 시대로 들어섰고, 급속한 경제 사회 발전에 부응하여 정부 기능도 복잡해지면서 지식인 전문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8장) 그 최초의 사례가 1892년 위스콘신 대학과 주 정부가 서로 긴밀한 정책 협력 관계를 맺은 ‘위스콘신 모델’이었고, 이 모델은 기득권의 거센 저항을 받았지만 이후 뉴딜 정책을 추진한 두뇌 집단(brain trust)의 원형이 되었다. 지식인이 드디어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서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는 다른 종류의 ‘실용적’ 전문 지식으로 무장한 지식인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대중의 선망과 동시에 경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추세는 전쟁 수행을 위해 고급 두뇌 수요가 더더욱 높아진 2차대전기에 절정에 이르렀다가, 전쟁 이후 대대적인 역풍을 맞게 된다. 지식인들의 유례없는 지지를 한 몸에 받았던 대통령 후보 애들레이 스티븐슨을 대상으로 지식인을 급진주의, 국가 반역, 여성적 유약함 등과 연관시키는 반지성주의적 공격이 행해졌고, 그가 결국 참패한 것이다. 반면 존 F. 케네디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후 최초로, 지성과 문화에 대한 존중을 진취적이고 실용적인 미덕과 결합시키는 데 성공한 대통령이었다.

반지성주의적 신념이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겨진 분야가 바로 미국의 교육이다. 미국 학교 교육의 실패–교사의 저임금과 낮은 사회적 지위, 노후하고 게토화된 학교, 운동선수에 대한 과도한 숭배, 학업 성취도의 전반적 저하, 성적이 뛰어난 학생의 방치–가 대부분 여기에 기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미국에서 교사는 애초부터 존경받는 직업이 못 되었다.(12장) 마을에서는 교사 월급을 충분히 줄 여력이 없었고, 공직자의 봉급이 너무 높으면 안 된다는 평등주의적 의식이 작용해서 대우도 변변치 않았다. 그래서 교사는 다른 (남자다운) 직업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잠시 거쳐 가거나 어쩔 수 없이 눌러앉는 자리로 여겨졌고, 자격 미달인 자들이 교사가 되어 학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여성 교사가 대규모로 충원되면서 이런 악순환은 해결되는 듯했지만, 교직의 여초 현상 때문에 교사의 지위가 더욱 하락하는 부작용이 생겼고 20세기 들어 학교와 학생 수가 크게 증가하면서 인력이 부족해지자 교사의 질을 담보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예로부터도 지식 그 자체의 추구나 지적 능력의 개발은 미국 교육의 목표가 아니었지만, 특히 1870년대 이후 중등 의무 교육이 시행되고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의 자녀들까지 가세해 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공부에 관심 없는 대다수 평균 이하의 학생들에게 고교 교육의 포커스를 맞추어 대학 진학보다는 시민 의식 함양과 실용적 직업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신념이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이 신념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예가 1940-1950년대에 시행된 ‘Life Adjustment’ 운동으로, 이를테면 외국어나 수학, 고전 같은 학구적 과목이 대거 폐지되고 운전이나 가사처럼 학생들의 흥미와 필요에 부응하는 실용적인 과목이 개설되었다.(13장) 이 운동은 너그럽고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이상을 추구했지만, 매스미디어가 부추기는 소비문화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간을 길러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기도 했다. 존 듀이의 교육 철학은 이런 새로운 교육 운동을 떠받친 지적 기둥 중 하나였으나,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듀이의 의도와 달리 단순화되고 왜곡되었다.(14장)

 

발췌 번역

1. 우리 시대의 반지성주의

-1-

이 책이 미국 역사에서 좀 더 오래된 과거의 특정 측면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실은 1950년대의 정치적·지적 상황에 대응하여 착상하게 된 것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웬만해서 듣기 힘들었던 ‘반지성주의’라는 말이, 이 시기를 거치면서 비방을 되받아치고 서로를 매도하는 익숙한 단어로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과거에도 미국의 지식인들은 지성을 경시하는 국가적 경향 때문에 좌절과 쓰라림을 감내해야 했지만, 지식인 공동체 외부에서 이런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이 이토록 많았거나, 이런 식의 자기비판이 전국 규모의 운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시기를 상기하기란 힘들다.

이 나라에서 비판적 지성의 가치가 폭락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킨 주범은 대체로 매카시즘이었다. 물론 매카시의 부단한 공격은 지식인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지만–그는 더 큰 사냥감을 쫓고 있었다–지식인들은 그의 총구가 향하는 방향에 서 있었고, 그의 추종자들은 지식인이 쓰러질 때에 더더욱 환호하는 듯했다. 지식인과 대학을 향한 그의 돌격을 본받아, 하급 종교재판관들이 전국에서 비슷한 행태를 벌였다. 이윽고 매카시의 비난 공세로 인해 극심한 악의와 재미없는 머저리짓이 횡행하는 분위기에서 1952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각각 지성과 무지를 대표하는 후보가 서로 극명한 대조를 이룬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한 쪽은 비범한 지성과 스타일을 갖춘 정치인 애들레이 스티븐슨으로, 역사상 지식인에게 그만큼 어필한 사람이 드물었다. 한편 그 반대쪽은 진부한 수준의 지성에 자기 의견이 그다지 분명치 않으며 닉슨이라는 입맛 안 맞는 러닝메이트에게 끌려 다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었다. 그의 선거 운동 분위기는 아이젠하워 자신보다는 그의 러닝메이트와 당 내 매카시 파벌의 손에 좌지우지되었다.

지식인들 자신과 그 비판 세력 모두는, 아이젠하워의 압도적 승리를 미국이 지식인을 거부했다는 지표로서 받아들였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아이젠하워의 승리로 “오랫동안 의심해 왔던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의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 넓고도 불건전한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면서 짐짓 우려하는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서 슐레진저 주니어는 선거 직후 발표한 신랄한 글에서, 지식인이 “지난 한 세대 동안 몰랐던 생소한 상황”에 놓였다고 말했다. 지식인이 대체로 이해와 존경을 누렸던 20년간의 민주당 집권기가 끝나고, 친기업 세력이 권좌로 복귀하면서 “기업 패권의 거의 정해진 수순”으로 “천박화”를 끌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제 ‘달걀머리(egghead)’, 별종으로 취급되어 쫓겨난 지식인들은 자신들을 거의 필요로 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당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고, 소득세부터 진주만 공격에 이르는 모든 문제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기업가들 사이에서 반지성주의는 오래 전부터 반유대주의와 같은 것이었다…오늘날 미국 사회에서….지식인은 쫓겨나고 있다.”고 슐레진저는 말했다.

새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이 모든 우려는 충분히 이유 있는 것이 되었다. 이미 트루먼 재임기에도 지식인들은 지방 정치인들의 그늘에 가려졌지만, 스티븐슨의 말마따나 카 딜러(Car Dealer)가 뉴딜러(New Dealer)를 몰아냄으로써 지식인과 그들의 가치에 대한 거부에 결정타를 먹인 듯했다. 이제는 순수 학문에 대한 찰스 E. 윌슨의 공격, 아이젠하워의 서부 소설 취향, 지식인은 말 많고 허세 부리는 사람이라는 아이젠하워의 관념 등이 나라를 논하는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에 이런 사회 분위기는 전환점에 이르렀다. 매카시 광풍이 공화당 대통령과 마찰을 빚다가 드디어 수명을 다해 사그라진 것이다.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 매카시는 고립되고 비난받고 결국 쪼그라들었다. 마침내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하면서, 국가 위신을 의식적으로 재검토하는 물결에 주기적으로 휩쓸리는 미국 대중의 경향이 다시금 꿈틀거리기에 이르렀다. 스푸트니크는 미국의 국가적 자부심에 충격 그 이상이었다. 이로써 학교 시스템과 미국 사회 전체에 퍼진 반지성주의의 결과에 엄청난 이목이 쏠리게 되었다. 지식인에 대한 국가적 혐오는 단순한 망신거리가 아니라 졸지에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국가에 불충하는 교사들을 염려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낮은 월급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날로 심해지는 안보 강박관념 때문에 연구 사기가 저하된다고 우려해 온 과학자들의 말에 갑자기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 교육의 느슨함을 질타하는 목소리는 그전까지 소수 교육 비평가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는 텔레비전 대중 잡지, 기업가, 과학자, 정치가, 장성, 대학 총장들까지 나서서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고, 이는 곧 국가적 자성의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물론 이런 소동으로 곧바로 자경단 기질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미국 사회의 한 흐름으로 존재해 온 반지성주의가 말끔히 걷힌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가장 직접적인 영향권인 교육 분야에서도, 사람들의 열정은 좀 더 많은 지식인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스푸트니크를 생산해 내는 쪽으로 주로 쏠리는 듯했고, 우수한 아이들을 냉전의 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식의 수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확연히 변했다. 1952년만 해도 반지성주의라는 유령에게 괴롭힘 당하는 사람은 지식인들뿐이었지만, 1958년에는 이것이 중요하고 심지어 위험한 국가적 약점이라는 인식이 대다수의 생각 있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오늘날[케네디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1962년–옮긴이]에는 1950년대의 정치 문화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매카시즘과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지식인이 공적 영역에서 몰락했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면, 이제 정부가 하버드 교수들과 로즈 장학생 출신 학자들을 다시금 그렇게 적대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식인이 정치나 정부의 성공을 가로막는 장해물이 되었다는 의혹이 있기는 하지만, 새 대통령이 사상에 관심을 갖고 지식인을 존중하며, 국정 운영에서 이런 존중을 의례적 제스처를 통해 드러내고, 지식인을 가까이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듣기를 즐기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 기간 신중히 가려 뽑은 출중한 인재들을 데리고 행정부를 출범시켰기에 이런 의혹은 곧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한편 행정부가 이런 인재를 영입함으로써 국정을 완전히 쇄신할 수 있다는 과도한 자만심에 부풀어 있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현실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현재 우리는 지식인이 과장된 당파주의나 자기 연민 없이 반지성주의를 논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

-2-

1950년대에 교육 논쟁이 정치적으로 끓어오르면서,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는 미국에 대한 자기 평가의 중심을 이루는 어구가 되었다. 이 말은 뚜렷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어느새 우리의 일상 언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고, 달갑잖은 여러 현상을 가리키는 데 흔히 쓰이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말을 듣게 된 사람들은 반지성주의가 삶의 이런 저런 영역에 새롭게 출현한 현상 혹은 최근에 만들어진 환경의 산물일 것이라고 짐작하곤 한다.(이는 미국 지식인들의 역사 관념이 한숨이 나올 정도로 얄팍한 데다, 현대인이 일종의 묵시록의 그늘 밑에서 너무 오래 살아온 탓에 지식인들이 사회 변화의 조그만 소용돌이도 마치 커다란 격동인 양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문헌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1950년대를 강타한 반지성주의라는 흐름은 전혀 새롭지 않고 익히 친숙한 것이었다. 이 나라에서 반지성주의는 1950년대에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의 반지성주의는 우리의 국가 정체성보다도 더 오래되었고, 긴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 배경을 검토해 보면 미국에서 지식인에 대한 인식이 꾸준히 하락한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땅에 떨어진 것도 아니며, 주기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우리 시대 지식인들에게 쏟아진 분노는 지식인의 지위가 낮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현저히 상승한 증거임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체계적으로 알지 못하며, 이 주제에 대해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한 고찰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국의 지식인과 이 나라 사이의 오랜 불화에 대해 많은 문헌이 쓰였지만, 이런 문헌들은 지식인의 눈으로 본 미국에 대해 주로 다루고 있으며 미국의 눈으로 본 지성과 지식인에 대해서는 가끔씩 어렴풋이만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의견

내가 이 책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2003-2004년쯤이었는데, 출판평론가 표정훈의 홈페이지(현재 궁리닷컴 홈페이지)를 통해서였다. 여기서 그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소개했다. “호프스태터의 1963년 저작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 (퓰리쳐상 수상작)는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국 사회, 미국 지성의 풍토, 미국적인 것, 미국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첩경이다. 반지성주의야말로 미국 문화,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지식인에 대한 비합리적일 정도의 경멸과 반감이 미국 사회의 저류에 흐르고 있다.”

마침 부시 행정부에서 한창 흘러나오던 비이성적인 언행에 질리고–저런 웃기지도 않는 사고방식이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 세계 최강대국을 지배하게 된 것인지–의아했던 차라, 이 책이 그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읽어본 다음에는 정말 그 의문이 상당히 풀렸다.)

이 책의 내용은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했고, (지식인을 변호하려다 보니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이 엿보이긴 하지만)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니만큼 가치도 충분히 공인되어 있다.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장밋빛 기대나 비트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이 책이 쓰인 시대를 짐작케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놀랍게도 거의 낡아 보이지 않는다.

시장성에 대해서는 요즘 상황이 어려운 만큼 자신 있게 말하기 힘들다. 조선 왕조 이래로 엘리트 문관이 패권을 쥐어 온 한국 사회에서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는 다소 낯선 것이기도 하다. 부시 행정부 시기에 번역본이 나왔다면 아마 좀 더 시의성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한 마디 보태자면, 비전문가인 독자 입장에서도 생각보다 읽기에 지루하지 않은 책이었다. 미국사에서 우리에게 덜 알려졌던 새롭고 흥미로운 사실과 통찰이 가득 들어있고, 영화나 책에서 단편적으로 봤던 미국 사회 단면(예를 들어 미국 틴에이저 영화 속의 학교에서는 왜 운동선수와 치어걸이 짱이고 우등생이 찐따 취급을 받는지, 왜 배관공 같은 육체노동자들이 심심찮게 섹시 아이콘으로 묘사되는지, ‘라떼 리버럴’이라는 말이 왜 욕이 되는지, 스테로이드를 맞은 조증 환자가 쓴 것 같은 미국산 자기 계발 서적이라든지, 왜 아직까지도 지구가 6천 년 전에 창조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무시 못 할 세력을 떨치고 있는지, 한국 교회 풍경과 겹쳐져 왠지 낯설지 않은 미국의 대형 부흥 집회 장면이라든지)의 배경이 이해되면서 마치 퍼즐을 맞추는 듯한 재미가 있다. 문장은 호흡이 긴 만연체지만 난삽하지 않고 위트와 격조가 있다.

정지된 생명: 중세 문화의 고통, 쾌락, 형벌(3)

2장 살가죽 벗기기

[도판 1] ‘시삼네스의 체포’, 헤라르트 다비트(Gerard David), 의 왼쪽 패널, 1498년, 나무 패널에 유채. 흐루닝에 미술관, 브뤼헤.

[도판 1] ‘시삼네스의 체포’, 헤라르트 다비트, <캄뷔세스의 재판>의 왼쪽 패널, 1498년, 나무 패널에 유채. 흐루닝에 미술관, 브뤼헤.

‘시삼네스의 처형’, 헤라르트 다비트, 의 오른쪽 패널.

[도판 2] ‘시삼네스의 처형’, 헤라르트 다비트, <캄뷔세스의 재판>의 오른쪽 패널, 1498년, 나무 패널에 유채. 흐루닝에 미술관, 브뤼헤.

1498년 브뤼헤 시청의 ‘정의의 홀’에 설치된 헤라르트 다비트(Gerard David)의 <캄뷔세스 왕의 재판>(도판 1, 2)은, 이제껏 가장 주목을 끌면서도 아마도 가장 이해받지 못한 이미지―중세 후기로부터 이어 내려온 형벌의 잔재―를 담고 있다. 이 그림은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ae)>에 처음 기록된 고대 페르시아의 전설로서, 캄뷔세스 왕의 명으로 부패한 판사인 시삼네스의 살가죽을 벗기는 모습을 두 개의 패널에 묘사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중세 판본은 오리엔트를 비롯한 각지의 전설 및 고전 우화 모음집인 <게스타 로마노룸(Gesta Romanorum, ‘로마인의 업적’)>에 실렸는데, … <게스타>의 29장에는 어떤 판사가 거액의 뇌물을 받고 부정 판결을 내린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러한 편파적인 법 집행을 너그러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황제는 판사의 가죽을 산 채로 벗기라는 명을 내렸다.

그 판결은 즉시 집행되었고, 혐의자의 살가죽은 비슷한 죄를 저지르지 말라는 무시무시한 경고의 의미로서 재판관의 의자 위에 깔리게 되었다. 그 후 황제는 죽은 판사의 아들에게 같은 직위를 수여하고 재판관에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의를 집행하기 위해, 그대는 범법을 저지른 그대의 아비의 살가죽 위에 앉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대를 악한 길로 인도하는 자는 그의 운명을 기억해야 하리라. 그대 아비의 살가죽을 내려다보면서 아비의 운명이 그대에게 떨어지지 않도록 명심하여라.’

다비트의 두폭화(diptych)는 이 전설에서 네 개의 에피소드를 뽑아 재현하고 있다. 좌측 패널의 뒷배경에는 부패한 판사가 뇌물을 수수하는 장면이(도판 3), 전면에는 그가 캄뷔세스 왕에 의해 극적으로 체포되는 장면이(도판 1) 담겨 있다. 우측 패널에서 우리는 시삼네스의 살갗을 벗기는 소름끼치는 공개 처형 장면(도판 2)과 마주하며, 우측 위편 구석에서 이 이야기의 교훈―판사의 아들인 오타네스가 자기 아버지의 살가죽을 덮은 의자에 앉아 법을 집행하는 장면―을(도판 4) 엿볼 수 있다.

[도판 3] 도판 1의 세부. 뇌물을 수수하는 시삼네스.

[도판 3] 도판 1의 세부. 뇌물을 수수하는 시삼네스.

[도판 4] 도판 2의 세부. 법을 집행하는 시삼네스의 아들 오타네스.

[도판 4] 도판 2의 세부. 법을 집행하는 시삼네스의 아들 오타네스.

…다비트가 이 주제를 다룬 방식의 인상적이고도 독특한 점은, 오타네스가 자기 아버지의 살가죽으로 덮인 의자에 앉는 마지막 에피소드에 집중한 그 이후의 재현물과는 달리, 이 브뤼헤 패널화가 화폭 대부분을 시삼네스 자신의 체포와 처형 장면에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중세 후기 네덜란드 회화의 독특한 특성을 단순히 사실 그대로를 모방하는 미학으로 치부해 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앞으로도 보겠지만, 소위 다비트의 회화의 리얼리즘은 물질적 현실을 객관적으로 구체화한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의심의 여지없이 강력하다. 내가 이 두폭화에 대해 대중 앞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을 때 그 두 번째 패널을 학생들에게 보여 주면, 무서워서 반쯤 눈을 가리는 사람들이 최소한 몇 명씩은 있다.

… 현대 관람객들의 눈은 대부분 오른편 패널에 있는 사형수의 절개된 육체에 매료되는 동시에 혐오감을 느낀다. 이 작품이 현재 전시된 브뤼헤의 갤러리 안에 서서 관광객들이 줄 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공포스런 매혹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못 박혀 있거나, 충격을 받고 당황해서 슬그머니 지나쳐 버리거나 둘 중 하나이다(그들은 예쁜 그림을 보면서 한가한 오후를 보내려고 온 것이다). 현대의 감상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살가죽을 벗기는 장면이 그림에서 가장 심기가 불편한 부분인 것 같다. 이 작품에 대한 미술사학자들의 논의에서도 (비록 무시되긴 하지만) 은연중에 비슷한 반응이 엿보인다. 미술사 논저에서 이 그림은 칼라로 실리는 일이 드물고, 비체적 공포의 체현물로보다는 15세기 후반 회화의 보편적인 양식과 구성의 발전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지표로서 다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W. H. 제임스 윌(W. H. James Weale)이 다비트의 작품에 대해 쓴 최초의 연구 논문에서도 “사람의 피부를 발라내는 것은 당연히 보기 즐거운 일이 아니지만, 화가 자신이 이 주제를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강조하는 등 비슷한 불안감이 엿보인다.[1]

… 다비트의 <캄뷔세스 왕의 재판>을 수용해 온 역사를 보면 그런 식의 방어적 반응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사형수의 육체를 보는 것에 대해 끈질긴 거부 반응이 있는 것 같다. 주변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육체란 근본적으로 두려운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는 그렇게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사료와는 친숙해지기가 힘들다…그럼에도 유독 시삼네스의 육체로 눈길을 돌림으로써, 게다가 그것이 중세의 관람객들에게 미친 상상적·상징적 반향을 분석의 뼈대로 삼아, 나는 이 그림의 충격적이고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을 숙고하고자 한다…

피부의 의미

<캄뷔세스>의 이미지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적 내용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피부를 제거하는 형벌 그 자체의 성격이다. 피부는 신체가 점하는 공간적 범위의 한계선이자, 내부 장기를 감싸고 이것들을 충격에서 보호하는 표면이다. 동시에 특정한 의미를 띤 흔적을 새겨 넣을 수 있는 표면이자, 외부 세계와 내부의 감각을 중재하는 감각적 문지방이다.

… 중세의 종교적 텍스트에서 피부는 옷이라는 은유를 통해 구성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시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부를 ‘입었다’고 상상했다… 보다 세속적인 맥락에서 나온 문학 작품으로 눈길을 돌려도 피부는 역시 강한 헌신의 대상이다. 중세의 연애 서사에서 여성의 신체에 대한 묘사에는 매혹적인 피부에 대한 언급이 상투적으로 들어 있다. 반대로 병에 걸리거나 훼손된 피부는 혐오, 구토, 반발과 공포의 대상이다. 특히 나병으로 인한 피부병은 도덕적 결함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세의 나병 환자들은 시신을 매장하는 의례와 유사한 분리 의례를 거쳐야 했다. 훼손되지 않은 신체 표면이야말로 이승에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중세의 처형 절차에도 죄수의 사회적 죽음을 상징하여 희생자의 의복을 벗기는 과정이 있었는데 이는 전도(轉倒)의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체를 감싼 의복의 한계치인 피부 자체를 제거해 버리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을까? 피부는 곧 기억이라는 중세의 관념에 따르면, 산 채로 살갗을 벗기는 행위는 일시적 기억과 정체성이 쓰여진 신체의 표면을 떼어 없애고 그 자리(죽은 피부)에 ‘영구적인’ 교훈이 새겨진 양피지를 바르는 것이다.

[도판 5]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의 공방, , 1540년경, 패널에 유채, 베를린 국립박물관(회화 갤러리).

[도판 5]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의 공방, <캄뷔세스의 재판>, 1540년경, 패널에 유채, 베를린 국립박물관(회화 갤러리).

따라서 다비트의 그림은 고통 받는 신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객체가 되는 과정을 잔인할 정도로 똑똑히 드러내고 있다. 시삼네스의 처형을 목격하는 이들은 살갗을 벗기는 행위가 비체성(脾體性)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그 결과 생명 없는 물체에 교훈이 담기게 된다는 양 극단의 모순을 중재해야 한다…시삼네스의 살가죽이 법 집행의 물리적인 지지대로 활용되는 캄뷔세스 신화의 마지막 에피소드 또한 비슷한 효과를 낸다. 여기서 경계[피부―옮긴이]는 문자 그대로 하나의 객체가 된다…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의 1540년경 패널화에서는 살갗을 벗기는 장면이 원경으로 처리되고 살가죽이 오타네스의 머리 위에 위협적으로 걸려 있다(도판 5)…이러한 이미지에서 시삼네스의 살가죽에는 눈구멍이나 손가락, 발가락, 머리카락, 귓바퀴 등 예전에 달려 있었던 신체 일부분의 흔적이─마치 파괴된 줄 알았던 정체성을 외부로 표현하듯이─남아 있다. 시삼네스가 뇌물을 수수함으로써 정치체의 경계선을 범한 것처럼, 그 자신의 신체의 경계를 거스름으로서 위반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 다비트는 벗겨진 피부를 단순명료한 표면으로 묘사하였다(도판 4). 피부는 차라리 양피지를 만드는 데 쓰려고 매끈하게 다듬은 가죽에 가깝고, 인간의 신체임을 연상시키는 세부 묘사는 거의 없다. 따라서 다비트의 그림에서 피부의 위상은 비체성과 추상성 사이에서 동요한다. … 시삼네스의 운명은 신체 절단에 대한 중세의 뿌리 깊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동시에 그의 분리된 신체가 기억과 교훈적 진실을 뒷받침하는 힘을 지녔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공민적’ 미학

이러한 추론으로 살갗을 벗기는 모티프의 상징적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다비트의 작품을 그토록 공포스럽게 만드는 특정한 심미적 자질을 설명해 낼 수는 없다. 그러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차단하는 시각적 전략은 무엇인가?

[도판 6] 도판 2의 세부, 껍질이 벗겨지는 시삼네스의 팔.

[도판 6] 도판 2의 세부, 껍질이 벗겨지는 시삼네스의 팔.

[도판 7] 도판 2의 세부, 시삼네스의 찡그린 얼굴.

[도판 7] 도판 2의 세부, 시삼네스의 찡그린 얼굴.

…시삼네스의 신체를 연출한 방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가 신체의 세부를 놀랍도록, 거의 현학적일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희생자의 몸에 나 있는 모든 털들은─다리털, 음모, 심지어 젖꼭지와 겨드랑이 주변의 몇 가닥 털까지─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시삼네스의 팔에는 정맥이 뚜렷이 드러나 있고, 손목 주위의 살가죽은 밧줄로 단단히 묶여 밀려 있다.(도판 6) 그의 얼굴은 주름이 잡히고 목의 혈관은 도드라져 있다.(도판 7) 그렇다고 이 이미지가 ‘사실주의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 그림의 논리는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강한 심미적 요소가 들어있거나 혹은 상징적 덧칠이 되어 있다. … 다비트의 <캄뷔세스>의 우측 패널이 내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시삼네스의 몸을 묘사한 자연주의가 아니라, 이 그림이 취한 구성의 엄격성이 나 자신의 유동적이고 진행 중인 신체 경험에 들이대는 공격적 느낌이다. 그로 인해 나는 신체적 경험의 경계선, 죽음의 한계와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도판 8] 도판 2의 세부, 껍질이 벗겨지는 시삼네스의 다리.

[도판 8] 도판 2의 세부, 껍질이 벗겨지는 시삼네스의 다리.

그림 속의 형리들이 마치 필경사처럼 정확하게 각자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그런 느낌을 요한다. 그들이 마치 팽팽한 무명천 같은 판사의 피부를 째는 광경을 바라보자면 내 뱃속에서는 욕지기나는 느낌이 올라온다. 시삼네스의 왼쪽 다리에서 얇게 저며 낸 피부는 발꿈치까지 완벽한 직선으로 당겨져 있고 그 가장자리 부분에 자연광이 닿아 희게 빛나는데, 자연스런 곡선을 이루려는 인체의 성질을 거스르는 이러한 표현 방식은 보는 사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다리에서 벗겨 낸 살가죽은 팽팽히 당겨져 마치 접힌 부채처럼 곧은 주름이 서너 개 뭉쳐 있다.(도판 8)

의미심장하게도, 이런 식의 표현은 15~16세기 외과학 참고서의 삽화를 연상시킨다. 여기에 보면 외과 수술용 칼로 ‘살가죽 옷’을 깔끔하게 잘라 내거나, 살갗을 발라낸 신체가 한 손에 칼을 들고 한 손엔 자신의 벗겨낸 가죽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도판 9)─이러한 이미지는 다비트의 회화와 충격적인 상호텍스트를 이룬다. 이 패널은 또한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산 채로 해부하는 장면을 묘사한 동시대의 이미지─<장미 이야기(roman de la rose)>의 네덜란드 필사본 중에 들어 있는 에피소드를 묘사한 세밀화(도판 10)─와도 비교된다.

[도판 9] ‘피부를 벗긴 인물’, 후안 발베르데 데 하무스코(Juan Valverde de Hamusco), (로마: Antonio Salamanca and Antonio Lafresii, 1556) 중 목판화.

[도판 9] ‘피부를 벗긴 인물’, 후안 발베르데 데 하무스코, <인간 신체 구조의 역사>(로마, 1556) 중 목판화.

[도판 10] ‘아그리피나의 해부를 지켜보는 네로’, 의 세밀화, 1500년경, 네덜란드. 영국국립도서관, 런던.

[도판 10] ‘아그리피나의 해부를 지켜보는 네로’, <장미 이야기(Roman de la Rose)>의 세밀화, 1500년경, 네덜란드. 영국국립도서관, 런던.

… <캄뷔세스>에서 가장 심란한 측면은 형리들의 매우 진지한 태도로서, 이는 다시금 해부학 삽화와 병치된다. 예를 들어 <아그리피나> 세밀화에서 해부를 집행하는 우두머리는 소매를 걷어 붙이고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옆에서는 그 조수가 조심스레 칼을 쥐고 있다. 마찬가지로 다비트의 <캄뷔세스>의 형리들도 초연하고 사무적인 태도를 보인다. 신체 표면에 주의 깊게 선을 긋고 있는 이 전문가들은 오로지 자기가 맡은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다만 그림 오른편에 시삼네스의 팔을 받치고 있는 어린 조수만이 예외로, 산란한 듯이 관람객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림 속 인물의 눈길이 관람객의 시선과 마주치는 모티프는 성인 성녀의 순교 장면에서도 가끔씩 나타나는데(5장을 보라), 이것은 그림을 (1장에서 논의한) 일시적 정지의 이미지와 연결하는 테크닉이다. 그림 속의 장면에 관람객이 통합됨으로써 … 현대의 관람객들 역시 이미지를 눈으로 ‘접촉하고’ 안으로부터 경험하면서 이 그림과의 정서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서론에서 논의한 브로츠와프 십자가상이 분명히 보여 주듯이, 중세 후기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감정 이입하는 관계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다비트의 형벌 패널화에는 피가 거의 완벽하게 부재한 것이 인상적이다. 죄수의 몸에서 찾아볼 수 있는 피의 흔적이라고는 흉골과 허벅지를 따라 흘러내리는 몇 방울의 피와, 치아에 조그맣게 맺힌 피 한 방울(혹은 그냥 치아 하나가 빠진 구멍일 수도 있다)뿐이다. 형리 한 사람의 손가락 끝에서도 피가 조금씩 바닥으로 흘러 떨어진다. 어쩌면 수난 도상에서 피가 성체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피를 시삼네스의 몸과 연관 짓게 되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미지에서 피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극적인 서스펜스를 높이기 위해 작가가 취한 전략일 수도 있다. 어느 시점부터 진짜로 피가 흐르기 시작할 것인가…죄수는 언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피부가 완전히 벗겨졌을 때 사체는 어떤 모습이 될까? 작가는 이렇게 생명(움직임)이 정지한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일종의 ‘롤러코스터’의 미학─쾌락의 원천(서스펜스는 현대 공포 영화를 즐기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이자 불안의 원천이 되는 극적인 일시성─을 창출하고 있다.

[도판 11] 도판 2의 세부, 시삼네스의 처형을 구경하는 사람들.

[도판 11] 도판 2의 세부, 시삼네스의 처형을 구경하는 사람들.


…감상자의 반응에는 시삼네스의 몸 주변에 모여든 구경꾼들의 표정도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도판 11) 처형 집행인들과 매한가지인 그들의 금욕적인 몸짓은, 모든 본능적인 반응을 프레임 바깥의 관람객들을 향해 몰아내고 있다. 이는 이미지와의 정서적인 관계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테크닉이다. 앞에서 언급한 네덜란드 필사본의 해부 묘사에서는 자기 어머니의 살이 절개되는 장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네로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는데(도판 10), 이와 달리 이 그림에서 처형을 목격하는 시민들의 시선은 희생자의 몸을 무심히 지나치거나 아예 딴 곳을 쳐다보거나 혹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도판 12] 도판 2의 세부, 작업 중인 형리들.

[도판 12] 도판 2의 세부, 작업 중인 형리들.

마찬가지로 형리들도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할당된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이는 신체를 그 구성 부분으로 조각조각 쪼개어 바라보는 태도이다.(도판 12) 앞서 언급했듯이 신체 절단을 바라보는 중세의 태도는 양가적이었다. 그리스도의 매장이나 성인의 순교라는 맥락에서는 이러한 관습에 열광했지만, 그 외 다른 맥락에서 절단된 신체와 마주치면 공포를 드러냈다. 마찬가지로 다비트의 그림에서 구경꾼들의 태도는 이 그림이 지닌 비체성과 숭고성의 양 극단을 내비치고 있다. 그들의 초연한 태도는 희생자를 비인간화하고, 아직은 살아 있는 통일체로서의 몸을 향한 자연스런 반응을 억누른다. 시삼네스 개인의 정체성이 새겨져 있던 표면이 제거됨으로써, 그의 몸은 정치적 삶이 박탈되고 적나라한 목숨으로 전락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 그러나 구경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이 전하는 정의의 교훈을 숙고하는 것뿐이다. …

하지만 우리가 무리를 해서라도 (그럴 수 있다면) 살갗이 벗겨지는 육체 그 자체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여전히 의미를 담지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림 속의 구경꾼들의 시각에 저항하여 그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려면, 관점의 미세한 변화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시민들의 공허하고 무감동한 표정과 달리 고통으로 주름진 시삼네스의 얼굴을 관찰할 수 있다.(도판 7) 그의 일그러진 입에는 악문 이빨이 드러나 있고 긴장된 목에는 힘줄이 튀어 나와 있다(왼쪽 각막에 흰 점은 눈에 물기가 약간 비친 것 같다)…첫 번째 패널에서도 정의의 옥좌에서 끌어내려지는 시삼네스의 얼굴에는 불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난다. 이처럼 시각을 조금 이동하여 한 걸음만 비껴서 보아도 희생자인 시삼네스 자신은 관람자들의 신체에 공포의 반응을 아로새기며, 우리는 죄수의 공포를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의 맥락에서 다비트의 그림은 희생자와 동일시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니다. 이 그림의 목적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그림 속의 시민들(원래 이 사건을 목격한 관중들)과 동일시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 패널화를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다비트는 구경꾼들의 얼굴 중 상당수를 다시 그려 넣거나 수정하였다. 아마 이 그림이 완성되던 당시에 재직 중이던 시의회 의원과 닮은 얼굴을 재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외에도 최신 유행에 맞추기 위해 꽃 장식, 아기 조각상, 고전풍의 원형 양각 부조 등의 모티프를 새로 추가하였다. 이런 변경된 요소들을 보면, 화가는 희생자와의 동일시보다는 구경꾼과의 동일시를─구경꾼 사이에 당시 실제 인물의 초상을 포함시킬 정도로─한층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화가가 감상자를 그림 속의 구경꾼들과 동일선상에 놓으려 했음을 되새긴다면, 그림에 대한 반응의 계급적 성격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그림은 15세기 후반 브뤼헤의 중산층 공민 계급이라는 매우 한정된 사회 집단을 염두에 두고 주문된 것이다. 초연함과 도덕적 우월성의 렌즈를 통해 작품을 보는 전통적 미술 비평과 유사하게, 이 그림은 ‘공민적 미학(burgerlijk aesthetic)’이라 할 만한 것을 체현하고 있다. ‘공민적 미학’이란 말하자면 엄정하고 무감동한 표현 모티프에 의한 재현 방식으로서, 본능적, 신체적 반응을 억제한다. 여기서 네덜란드 말인 ‘공민(公民, burgerlijk)’은 이 그림에 대한 반응의 계급적 성격─이 그림을 브뤼헤 시민들이 주문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또 이 단어는─이 말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도 그렇지만─여기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부르주아(Bourgeois)’보다도 교화되고 예의 바른 느낌을 전달한다…공민적 미학은 또한…보다 차갑고 소원하고 미학적인 감정을 수반한다. 이는 추하거나 조야한 것에 대해 방어적이며 결벽하다. 결벽성(fastidiousness)은 <캄뷔세스 왕의 재판>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처참한 육체에 참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고 배우라는’) 교훈적 진실에 대한 숙고를 환기시킴으로써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도판 13] ‘성 바르톨로메오의 순교’, 슈테판 로흐너,  중 한 패널, 1435년경, 목판에 혼합 재료. 슈테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도판 13] ‘성 바르톨로메오의 순교’, 슈테판 로흐너, <사도들의 순교(Martyrdom of the Apostles)> 중 한 패널, 1435년경, 목판에 혼합 재료. 슈테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동시에─중세의 공민들을 포함한─일부 감상자들이, 교화적이고 초연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요구에 저항하면서, 근대 비평가들이 지금껏 끈질기게 무시해 온 ‘고통 받는 육체’에 바로 초점을 맞추어 이 그림을 다른 방식으로 볼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예컨대 최소한 13세기 이후 종교 문헌의 필사본이나 패널화에는, 성 바르톨로메오가 살가죽이 벗겨져 순교하는 장면을 재현하는 뿌리 깊은 전통이 있어 왔다. 그 가장 인상적인 예는 15세기 슈테판 로흐너(Stefan Lochner)가 그린 <사도들의 순교> 제단화 중의 패널화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바르톨로메오는 완전히 알몸이 된 채 한쪽 팔의 살가죽이 너덜하게 반쯤 벗겨져 있다. 눈에 잘 띄게 채색된 핏방울이 그의 등을 타고 흘러내린다.(도판13)…. 성인을 본받자는 교훈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바르톨로메오의 이미지는 현저히 ‘희생자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띤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로흐너의 패널화에서 바르톨로메오는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종교 문필가들은 그들이 신앙하는 ‘고문 받고 고통 중에 있는 육체’가 되기를 갈망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이미타시오 크리스티(imitatio Christi)’라는 급진적 관습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다비트가 이 작품을 제작하던 당시 기독교 신앙의 맥락에서는, 고통 받는 몸을 바라보고 그와 동일시하는 유서 깊은 전통이 존재하고 있었다.

… 고통 받는 육체를 바라보고 거기에 대해 감정 이입하며 참여하는 행위는, 이 육체가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매개체로 변형되는 데 대한 저항으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고통 받는 몸의 이미지에 반응하는 관람객들은 역사의 요구에 저항한다. … 동시에 시삼네스의 신체적 고통과 관람객의 신체 사이에는 여전히 단절이 남아 있다. 이는 희생자의 고통 받는 신체가 실제로 우리의 신체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가가 죄수의 육체로부터 시민 정신과 법의 집행에 관한 교훈적 메시지(이는 관람객들을 과거 중세의 특정 시점으로 돌려놓는다)로 주의를 돌리기 위해 시각적 전략을 활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감정을 이입하는, ‘초역사적’ 반응을 몰아내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관람객들을 끌어들이려 시도한다. 우리가 보는 방식을 달리하여 이 그림의 중심에 있는 처참한 육체에 참여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우리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공포에 근접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내 견해로는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확립하고자 하는 것은 결벽증적이고, 육체로부터 분리되고, 자기로부터 거리를 두고, 초연한, 한마디로 말해 ‘공민적’ 반응이다.

 

  1. 예를 들어 Pa+cht, Early Netherlandish Painting, p.247에서는 시삼네스의 형벌에 대해 단순히 ‘메스꺼운 일’이라고만 언급하고 거기에 대해 보다 면밀히 질문하지 않은 채, 그의 분석을 형식적인 고찰에만 한정한다(‘인물 군상의 머리가 고전 부조 양식처럼 완벽히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는 둥, 살가죽이 벗겨진 몸이 ‘사선으로 후퇴한 공간’에 놓여 있다는 둥)….이는 그림이 그려진 표면과 그것이 감상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으로부터 딴 곳으로 주의를 돌리는 방법론이다.

정지된 생명: 중세 문화의 고통, 쾌락, 형벌(2)

[도판 1] ‘매달린 사람’, 비스콘티-스포르자(Visconti-Sforza) 타로키(타로) 카드, 1445년경. 뉴욕 피어몬트 모건 도서관.

[도판 1] ‘매달린 사람’, 비스콘티-스포르자(Visconti-Sforza) 타로키(타로) 카드, 1445년경. 뉴욕 피어몬트 모건 도서관.

1장 하늘과 땅 사이에

적을 매다는 세련된 기술

사람을 매다는 이미지를 묘사한 또 다른 형벌 도상 장르의 주제는 바로 조롱이었다. ‘피투레 인파만티(Pitture infamanti)’라고 하는 이것은 남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그린 초상화로서, 로마법의 ‘파마(fama)’와 ‘인파마(infama)’의 고대 교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그림들은 13~16세기 북이탈리아 도시의 주요 재판소 벽에 흔히 그려져 있었으며 그 주된 기능은 법정을 모독한 배신자나 채무자를 겨냥해 일종의 연행적인 모욕을 주는 것이었다. ‘피투레 인파만티’의 희생자들을 그림 속에서 죽이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신에 다양한 모욕적인 자세─주로 한쪽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린 자세─를 취한 모습으로 그리곤 했다. 이탈리아의 비방용 초상화는 문헌 기록과 스케치로만 전해지며, 공개적으로 제작된 그림이 현재까지 남아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는 타로 카드 안에 있는 ‘매달린 사람’의 아이콘과 비교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타로 카드는 1440년경 북이탈리아에서 제작되었는데, 이것이 아마도 당시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비방용 초상화를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최고(最古)의 유물일 것이다(도판 1).

‘피투레 인파만티’의 제작과 감상에 중요한 역할을 한 요소는 주로 계급 구분이었다. 여기에 그려진 대상은 주로 상류층 남성들로서(여성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손상될 것을 염려할 만한 명예를 갖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모욕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참수형을 받을 특권이 허락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교수형이라는 모욕적인 처벌 방식과 연관시킴으로써 유효해지는 것이었다. 교수형과 성인(聖人)이 연관된 유일한 사례는 성 히에로니무스가 억울한 판결로 교수대에 매달린 사람을 구해 준 기적 이야기(도판 2) 하나뿐이며, 그나마 성인 자신이 목 매달린 모습을 재현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 종교적인 맥락에서 교수형은 가장 치욕스런 죽음, 즉 유다의 자살과 결부되어 있었다. 따라서 ‘피투레 인파만티’는 유복한 희생자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교수형과 치욕과 사회적 망신이 연관되어 있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작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의 이면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그중에서도 거꾸로 매달린다는 모티프의 의미는 무엇일까?

[도판 2]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 15세기 후반, 제단 패널에 채색,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판 2]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성 히에로니무스가 두 교수형당한 사람을 구하다>, 15세기 후반, 제단 패널에 채색,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판 3] ‘여우 레이너드를 목 매다는 거위들’, 15세기, 장의자 옆면 조각, 성 미카엘 교회, 브렌트 놀, 섬머셋.

[도판 3] ‘여우 레이너드를 목 매다는 거위들’, 15세기, 장의자 옆면 조각, 성 미카엘 교회, 브렌트 놀, 섬머셋.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거꾸로 매달린 모습의 재현은 ‘문두스 인베르수스(mundus inversus, 거꾸로 뒤집힌 세상)라는 개념을 전달한다. 그리고 상징적 전도(顚倒)의 모티프는 코미디의 주된 원리 중 하나다. 인류학자들은 전도를 ‘안전밸브(Ventilsitten)’, 즉 ‘김을 빼서 위험성을 중화하는’ 수단으로 이해하곤 한다. 즉 상징적 전도는 우리를 가역적인 과정에 참여시킴으로써 근원적 형태의 놀이를 이끌어 내며,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역할을 간접적으로 실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도판 3)은 15세기 후반~16세기 초반 영국 서머셋의 브렌트 놀(Breant Knoll)에 있는 한 교회의 장의자 옆면에 조각된 작품으로, 한 무리의 거위들이 여우 레이너드를 교수대에 매달아 끌어올리는 우화 속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자연 질서의 일시적 전복에 근거한 장난스럽고 희극적인 측면을 환기하고 있다. 이 우화 속에서 여우 레이너드는 강간, 살인 등의 죄목으로 왕 앞에 불려가 재판을 받고 법정에서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원래의 텍스트에서 여우는 성지순례를 떠난다는 조건으로 결국 풀려나게 되지만, 의자 측면에 조각된 이미지에서는 끈에 목이 졸려 매달려 있다.

[…] 뒤죽박죽으로 본말이 전도된 세계의 은유는 북유럽에서 이탈리아의 비방 회화와 가장 유사한 장르인 독일의 ‘샨트빌더[Schandbilder, 망신을 주는 그림이라는 뜻─옮긴이]’에서도 중요하다. 이러한 이미지는 묘사된 사람을 망신 주기 위해, 종이 또는 양피지에 그려서 조롱하는 글귀를 덧붙여(이럴 경우에는 셸트브리페[Scheltbriefe, 비난하는 편지라는 뜻─옮긴이]라고 한다) 피해자의 집 대문이나 공공장소에 게시했다. ‘샨트빌더’는 국가 기관이 아니라 개인들 사이에서 사적으로 널리 행해졌다는 점에서 ‘피투레 인파만티’와 다르다(이탈리아에서는 비방 회화를 개인적으로 그려서 게시하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긴 해도 그것이 기능한 방식은 아주 비슷했다. 비행을 저지른 범법자─주로 채무자─를 모욕적인 자세로 그려 게시함으로써, ‘법정 바깥의’ 처벌 효과를 노리고 상대로 하여금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일찍이 오토 후프(Otto Hupp)는 이 장르에 대해 상세히 연구하여, 1379~1593년 사이에 제작된 총 39점의 ‘샨트빌더’와 ‘셸트브리페’의 목록을 작성하였다(이 중 1500년 이전에 제작된 것은 15점이다). 최근에는 연구가 더욱 진척되어 당시 독일 북부를 중심으로 제작된 비방 회화가 100여 점까지 발견되었다. 가장 흔한 비방 양식은, 범법자가 암퇘지나 암나귀나 암캐의 항문에 자기 가문의 인장을 찍고 있는─그래서 결국 가문에 똥칠을 하게 되는─광경을 재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리가 밧줄에 묶인 채 거꾸로 매달린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흔했다. 1438년 뢰벤슈타인의 요한이 헤세의 루드비히 백작을 대상으로 제작한 ‘셸트브리페‘(도판4)에서, 채무자는 멋진 예복을 입은 채 거꾸로 매달려 까마귀가 발을 쪼아 먹고 있고(관습상으로는…눈을 쪼아 먹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는 상징적 전도를 드러낸다), 그 옆에는 그의 문장(紋章)이 역시 거꾸로 매달려 있다. 그림 위에 덧붙인 문장에 보면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경위─백작의 성에서 수프 한 사발을 놓고 싸움 끝에 충동질되었다는─를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유다를 지저분하게 빗대어, 불만의 원인이 돈과 관련한 분쟁임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이 글에서 요한은, “유다가 스스로 목매달았을 때 불었던 바람이 그의 눈과 귀에 불어 닥쳐서 그는 앞으로 다시는 명예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리라”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실용적인 목적은 분명하다.

[도판 4] 뢰벤슈타인의 요한(Johann of Lo+wenstein)이 헤센의 루드비히(Ludwig of Hesse)에 대해 쓴 셸트브리페(‘비방문’), 1438년 11월 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시사(市史)연구소.

[도판 4] 뢰벤슈타인의 요한이 헤센의 루드비히에 대해 쓴 셸트브리페(‘비방문’), 1438년 11월 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시사(市史)연구소.

…이상이 우리가 그의 모욕적인 그림을 그의 문장과 함께 걸어 두는 이유이다. 우리는 그와 그의 가족이 앞서 기술한 식으로 자행한 부당한 행위에 대해서 존경할 만한 이들이 인정할 만큼 베상할 때까지 이 그림을 계속 걸어 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매달린 그림을 보고 자비심을 구하는 자들에게 이 그림에 손대지 말 것을 청하는 바이다.

1490년 레겐스부르크의 두 유대인인 사이드로와 아이작 스트라우빈저가 한스 주드만을 상대로 제작한 ‘샨트빌더’에서도 희생자는 마찬가지로 기사 제복을 입은 채로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려, 악마가 그의 머리 주위를 몽둥이로 때리고 있다.(도판 5)

[도판 5] 사이드로와 아이작 스트라우빈저(Say+dro and Isaac Straubinger)가 한스 주드만(Hans Judmann)을 상대로 그린 샨트빌더(Schandbilder ‘비방화’), 1490년, 독일. 17세기에 제작된 사본. 바이에른 주립문서보관소, 뮌헨.

[도판 5] 사이드로와 아이작 스트라우빈저가 한스 주드만을 상대로 그린 샨트빌더(‘비방화’), 1490년, 독일. 17세기에 제작된 사본. 바이에른 주립문서보관소, 뮌헨.

이들 대부분의 사례는 […] 직접적 사형 행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독일의 ‘샨트빌더’에서는 이따금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목이 매달리거나, 수레바퀴에 묶여 사지가 부러지거나 심지어는 기둥에 못 박힌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이 거꾸로 매달린 이미지는 통상적인 교수형의 관습을 연상시키고자 의도한 것은 아니다. 이는 그보다는 당시에 실제로 가끔 시행되었던 유사한 형벌─소위 ‘유대식 처형(Jewish execution)’이라고 하는 것으로, 여기서 유대인 범죄자는 사나운 개들과 나란히 산 채로 거꾸로(어떤 경우는 한 발로) 매달린다─과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처형 의식은 중세 독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멀리는 스페인에도 기록된 사례가 있지만, 이 관습을 수록한 현존하는 법령집은 중세 거의 끝 무렵 혹은 그 이후에 쓰인 것이다. 유대식 처형에 대한 최초의 정의는 16세기 초 울리히 탱글러의 <일반인의 귀감>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유대교의 이단’을 완강하게 고집하는 자에게 부과되는 속죄 행위라고 해설하고 있다. 한편 이 형벌에 대한 가장 상세한 묘사는 17세기 후반 또는 18세기 초반 스위스 글라루스 주(州)의 법령집에 기록되어 있다(여기서 제시하는 견해도 앞의 문헌과 일치한다). 이 법령집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그는 절도범으로서 밧줄이나 사슬로 발을 묶어서 특별히 세운 교수대에 매달되, 그 양 옆에 사납고 으르렁거리는 개를 함께 매달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풀이나 목초가 그 아래에서 자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높이 매달아, 그는 땅에서 멀리 떨어져 개들과 새들과 허공에 내맡겨질 것이다. 그리고 판사와 군중과 경비병은 교수대 주위에 모여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것을 지켜볼 것이다.

이 인용문은 […] 사람을 매다는 상징의 중요한 측면, 즉 정지(매달림)─지연된 죽음─의 모티프를 전하고 있다. 형벌 받는 유대인의 운명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있다.

베네치아에서 바젤로 파견된 사절인 파두아의 안드레아 가타로가 쓴 일기는 이 관습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이다. 이 일기에는 1434년 두 독일계 유대인이 절도범으로 체포되어,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고문당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결국 둘 중 하나는 개종하여 참수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개와 함께 거꾸로 매달리는 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밧줄로 교수대 위에 끌어올려져 거기 한동안 매달려 있다가 ‘그의 예언자들이 자신을 구원해 주지 않음을’ 깨닫고 마침내 동정녀 마리아를 외치며 도움을 청했다. 그 순간 개 짖는 소리가 누그러졌고 죄수는 밑에 서 있는 수도사를 향해 “기독교도가 되겠소!” 하고 절규했다. 비방용 도상과 유사하게, 여기서 묘사한 의식에도 상징적 전도가 들어 있다. 즉 거꾸로 매달리는 것은 유대인의 명예에 대한 모욕을 나타낸다. 동시에, 유대인의 개종을 재현한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이 이야기 또한 유대인의 완고함에 대한 반유대적 판타지를 지속시킨다. 즉 범법자에게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운명에 대해 숙고할 시간이 주어지지만 그는 개종하지 않는다. (방금 소개한 사례에서, 매달린 유대인은 결국 사면되었다.) 교수대 위의 전도를 통해서 이 유대인이 인간과 짐승 사이의 분리라는 또 다른 형태의 상징적 전도와 융합되었다는 것 역시 의미심장하다. 에스더 코헨에 따르면, 거꾸로 매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해친 짐승, 그중에서도 특히 돼지에게 행한 형벌이었다고 한다(유대인은 돼지고기를 금지하는 레위기의 구절을 통해서 돼지와 결부된다). 그래서 방금 인용한 사례에서 절도범들은 ‘짐승처럼 죽지 않으려면 기독교도로 개종하라고 계속해서 강요당했던’ 것이다. 그 유대인 희생자는 유다처럼 기독교도로서 합당한 사회적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비천하고 짐승 같은 종말을 맞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문지방 위의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도판 6] ‘유대식 처형’, (스트라스부르크: Matthias Hupfuff, 1512-15년경).

[도판 6] ‘유대식 처형’, <유대인에 의한 성모 성화의 모독 및 수치>(스트라스부르크: Matthias Hupfuff, 1512-15년경).

유대식 처형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예는 매우 드문데, 그중 하나가 14세기 초 에노(Hainaut, 지금의 벨기에) 지방 캠브론의 시토 수도원에서 동정녀의 이미지를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유대인들이 처형된 사건을 재현한 대형 팸플릿이다. 16세기 초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인쇄된 이 팸플릿에는 그중 주모자였던 윌리엄이 받은 일련의 시죄(試罪) 광경이 목판화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문과 결투 재판을 거친 끝에, 결국 교수대와 끌려와 거꾸로 매단 채 그 밑에 불을 지피고 양 옆에 개를 매다는 형벌을 받았다(도판 6). 거기에 앞서 등장하는 이미지에는 윌리엄이 칼을 꽂은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피를 흘리는 기적이 묘사되어 있다. 몽(Mons) 시 부근의 한 교회에 있는, 역시 성상을 훼손해 처벌 받는 유대인을 그린 그림도 이 목판화와 놀랄 만큼 유사하다. (지옥불 또는 교회법에 따른 가장 가혹한 형벌 방식을 가리키는) 불의 모티프는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천벌 사이에 매달려 정지한 유대인의 상황을 전달한다. ‘샨트빌더’처럼 이 목판화에서도 희생자의 전도된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 시체를 쪼려고 달려드는 까마귀의 도상을 이용하고 있다. ‘사이에 있음’의 모티프는 앞서 인용한 대로 유대식 형벌에 대한 후대의 법적 정의에도 들어가 있지만, 이 이미지에 덧붙여진 텍스트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이 유대인은 ‘두 커다란 개를 양 옆에 두고, 거꾸로 매달린 채 땅에서 유리되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이 글은 계속해서 이 형벌이 ‘날이면 날마다 혐오스러운 범죄를 저르고 우리의 종교를 욕되게 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처벌하는’ 본보기이자 ‘속죄’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판 4, 5의 ‘샨트빌더’와 유대식 처형의 도상 사이에는 분명한 유사점이 있다. ‘샨트빌더’의 목적은 자살자에게 가해지는 사후 처벌과 유사하게, 현실의 법정에서 실망스럽게도 형벌이 유보된 자를 대상으로 모욕을 주려는 것이다. 유대인 범죄자의 처형처럼, 거꾸로 매다는 형벌은 사회적 지위와 운명이 말 그대로 공중에 높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물론 ‘샨트빌더’는 재현물을 통해 가상의 처벌을 내리는 것이고, 유대식 처형은 실제로 집행된 증거가 있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둘 다 불안정한 정지(매달림)의 논리에 기대고 있다는 점은, ‘샨트빌더’와 반유대주의의 틀이 어떤 차원에서 상호 교감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예컨대 비방 회화를 제작한 사람들이 비유대인을 모욕하기 위한 재현물을 만들면서 사람을 짐승과 동일시하는 반유대주의의 언어를 직접적으로 갖다 썼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유대식 처형이 비방 회화의 도상적 ‘전거’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있지만 그렇게 분명한 계보를 확립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최소한 유대식 처형·짐승 처형의 시각적 재현과 실제 집행은 독일의 ‘샨트빌더’를 해석하는 적절한 틀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즉 유대인이라는 모욕과 거꾸로 매달리는 형벌을 결부시켜 그림에 묘사된 사람의 굴욕을 배가하는 효과를 노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중세 독일에서 거꾸로 매달린 사람의 이미지가 불러일으켰던 심상은 어떤 면에서는 ‘피투레 인파만티’에서 연상된 것과는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 나는 독일의 ‘샨트빌더’를 보았던 사람들이 처벌 받는 유대인의 원형적 이미지를 통해 이 도상을 이해했다고 제시하고자 한다.

[도판 7] 브루더 글라드벡(Bru+der Gladbeck)이 프리드리히 폰 니어하우젠(Friedrich von Niehausen)과 그의 보증인에게 보낸 슈만브리페(Schma+nbrief, ‘비방문’), 1525-6, 독일. 헤센 주립문서보관소, 마르부르크.

[도판 7] 브루더 글라드벡이 프리드리히 폰 니어하우젠과 그의 보증인에게 보낸 슈만브리페(‘비방문’), 1525-6, 독일. 헤센 주립문서보관소, 마르부르크.

‘샨트빌더’의 반유대적 배경은 또한 채무자가 자신의 인장을 암컷 짐승의 항문에 찍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셸트브리페‘(도판 7)와, 유대인이 암퇘지의 젖을 빨고 그 배설물을 먹는 광경을 재현한 그림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후자는 13세기부터 독일어 사용권에서 유행한 것으로서, ‘유덴자우[Judensau, ‘유대 암퇘지’라는 뜻─옮긴이]’라는 도상 장르를 구축하고 있다(도판 8). 희생자를 짖어 대는 두 마리 개와 나란히 매달아 놓는 유대식 처형과 유사하게, ‘유덴자우’에서도 유대인은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라 젖 먹는 새끼 돼지처럼 이질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즉 사람을 짐승과 동일시하고 배설물로 더럽히는 언어를 통해 한편으로는 신분이 높은 비유대인의 명예를 더럽히고, 한편으로는 유대인을 가장 혐오스런 짐승과 결부시키려(도판 7의 ‘유덴자우’ 이미지에 쓰인 글귀 중 하나는 “그래서 우리는 구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의도했음을 알 수 있다.

[도판 8] , 15세기 독일의 판목으로 1700년경 제작된 목판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역사박물관.

[도판 8] <유덴사우(Judensau)>, 15세기 독일의 판목으로 1700년경 제작된 목판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역사박물관.

따라서 똑같은 비방용 도상처럼 보이는 것들도 전달하는 메시지는 서로 다르며, 시대적·지역적 특성에 따라 내러티브가 다르게 착색된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비방 초상 간의 가장 명백한 차이는 그 제도적 위상에 있다. 이탈리아에서 ‘피투레 인파만티’는 일반적으로 공권력의 도구였다. 묘사된 개인은 거의 예외 없이 부유한 귀족이었고 그 초상화는 지위나 혈통과 관계된 이슈와 결부되어 있었다. 독일의 ‘샨트빌더’의 ‘희생자’들도 비슷하게 유복한 계층이지만 이탈리아의 경우와 달리 사적 개인과의 분쟁에 휘말린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중세 독일에서 금전적 부채로 야기된 사회적 긴장이 일부분 반유대적 분위기를 띤 불명예스러운 이미지를 통해 표현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유대식 처형을 묘사한 이미지(도판 19)와 비방 초상화 사이의 유사성이 ‘피투레 인파만티’를 보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유효한 해석틀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의 맥락에서 비방 회화는 상류 계층에서 유행한 특정 초상화 장르(‘우오미니 파모시’)의 전도를 암시함으로써 잠재적 효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독일어권의 비방 회화는, 인간성을 박탈하는 반유대적 정서(명예가 훼손된 개인이 유대인들처럼 수성[獸性]을 띠게 된다는 생각)를 불러일으킴으로써 그 효력이 작용하였다. 물론, 독일의 비방 회화 중에서도 그림을 교사한 사람 자신이 유대인인 경우가─한스 주드만을 그린 샨트빌더(도판 5)─하나 있기는 하다. 아마도 이 경우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기독교도가 유대인에게 가하는 모욕을 거꾸로 기독교도에게 되돌려 주는 공격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형세의 이러한 역전은 실로 전복적인 암시를 띠지만, 이러한 전략이 행해진 보다 큰 맥락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전도의 은유는 유대식 처형의 상징적 언어에서 큰 몫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중세 후기의 수많은 신성 모독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요소였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유대인들은 성체를 훼손하면서 성찬식의 관습을 뒤집고 흉내 낸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유대인들을 향한 실제 폭력의 광풍을 선동하기도 했음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중세 유럽이 사람을 매다는 도상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을 매다는 하나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여러 특수한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중세의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 반유대주의의 언어와 모욕의 언어 사이의 상호작용은, 불명예와 유대인의 정체성과 동물성을 서로 결부시켜서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편견의 악순환을 창출했을 수도 있다.

정지된 생명: 중세 문화의 고통, 쾌락, 형벌(1)

suspended<정지된 생명: 중세 문화의 고통, 쾌락, 형벌(Suspended Animation: Pain, Pleasure and Punishment in Medieval Culture, 2006)>은 런던 킹스 칼리지 교수인 로버트 밀스(Robert Mills)가 중세의 고문과 형벌 이미지를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해석한 책입니다.

suspended(매달려 정지한)는 사전적으로 허공에 매달려 정지한 채 이도저도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suspended animation(정지된 생명)’은 원래 생명 활동이 정지된 동면 혹은 가사 상태를 가리키는 의학 용어이지만, 이 책에서는 삶과 죽음 사이, 혹은 죽음과 죽음 사이의 경계 공간에 (중세 재현물 속의 고통 받는) 육체가 상징적으로 매달려 정지한 상태를 의미하며, 이 책 전체를 관통하여 저자가 내세우는 핵심 개념입니다.

이 책은 몇 년 전 어느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번역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출판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출간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작업한 책이기 때문에 이렇게 묻히는 게 아쉬워서 여기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책의 전문을 올리는 일은 저작권 문제도 있고 또 이 책의 이론적인 부분은 다소 난해하기 때문에, 이 중 몇몇 부분을 도판을 중심으로–주로 재미있는 부분들 위주로–발췌해서 나누어 올릴 것입니다.

서론: 다른 중세를 들여다보는 검사경[1]

‘그때는 빵 한 조각 훔쳤다고 목매달아 죽였잖아. 그러지 않았어?’라고 21세기의 문명화된 서구인은 대꾸한다. 이 말투에는 분명히 안도의 감정이 배어 있다. 우리는 이 진술이 시사하는 바 무섭고도 매혹적인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부터 편안하게 멀찍이 떨어져 있다. 감사하게도 현대 서구 세계에서는 죄와 벌이 그렇게까지 명백히 불합치하지 않는다. 이제 범죄자가 처벌받을 때 그 형벌의 혹독함은 최소한 그가 저지른 범죄의 무게에 보다 근접해 있다. 어떻게 옛날 사람들은 서로에게 그토록 부당하고 야만적인 행위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그러니 현대 세계는 얼마나 큰 진보를 이룩한 것인가!

그러나 앞의 문장을 끝맺는 ‘그러지 않았어?’라는 말은, 화자의 선언 속에 취약한 부분이 있다는 표시이며, 자기 자신의 정의가 위협받고 있음을 희미하게 인정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죽음과 차이(difference)에 대한 공포, 나아가 관음증적인 매혹, 심지어는 그에 대한 동일시─타자에 대한 매혹─이 이 표현을 둘러싸고 있다. […]

우리는 형벌의 공포가 어떤 부침을 겪으며 변화해 왔는가를 사색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비체성(abjection, 脾體性)’[2]의 개념과 맞닥뜨린다. 브로츠와프(과거의 독일 브레슬라우로 현재는 폴란드에 속해 있음)의 성체 축일 교회에 있는, 14세기 후반에 제작된 십자가상(도판 3)을 보자. 이는 대단히 도발적이고 감정에 호소하는 이미지이다. 이 조각은 그뤼네발트의 그림(도판1)이나 홀바인의 <죽은 그리스도(Dead Christ)> (도판2)같은 작품보다도 더욱 즉각적인 반응을 요한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1512-16년경, 콜마르 운티린덴 박물관

[도판1]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이젠하임 제단화> 1512-16년경, 콜마르 운티린덴 박물관

한스 홀바인, , 1520-22, 바젤미술관

[도판2] 한스 홀바인, <무덤에 누운 그리스도>, 1520-22, 바젤미술관

우선 전체 구도를 보면, 이 이미지는 부단히 아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힘줄이 돋고 뼈가 앙상한 그리스도의 팔은 굽은 십자가에 못 박혀 꼼짝달싹 못한 채 잔뜩 켕기어 뻗쳐 있다.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왼팔은 몸의 무게 때문에 팽팽히 당겨 있다. (말 그대로) 목재처럼 뻣뻣하여 금방이라도 어딘가가 툭 끊길 듯한 인상을 준다. 이 브로츠와프 조각에서 십자가에 아래로 늘어뜨려져 부자연스럽게 늘여진 몸의 골격은 ‘카데바[cadaver: 해부용 시체─옮긴이]’라는 단어의 어원─‘아래로 떨어지다’라는 뜻의 라틴어 ‘카데레(cadere)’─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리스도의 두 다리는 애처롭게도 한데 묶인 채, 아래로 가라앉는 상체의 무게를 지탱하려 몸부림치고 있다. 피투성이 속눈썹을 단 감긴 눈꺼풀을 따라 아래쪽으로 눈길을 향하다 보면, 이 이미지에서 가장 매혹적인 부분─그리스도의 옆구리에 난 상처─에 시선이 가 닿는다.

실레시안의 장인, , 1370-80년경, 나무 조각에 채색, 브로츠와프 성체 축일 교회. 현재는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 소장.

[도판3] 실레시안의 장인, <십자가상>, 1370-80년경, 나무 조각에 채색, 브로츠와프 성체 축일 교회. 현재는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 소장.

(그럴 수 있다면) 여기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그러면 우리는 상처에서 나온 피가 잔뜩 응고된 채 방울져 맺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관례적인 십자가 수난 이미지에서 상처의 피가 비교적 적게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이 깊은 상처에는 핏방울이 마치 번쩍이는 진주나 성체성사에 쓰일 포도송이라도 되는 양 나란히 열을 지어 맺혀 있으며, 그리스도의 손에 난 깊은 상처에서도 거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핏덩어리가 스며 나온다. 끊임없이 흐르는 핏물을 따라 옆구리를 두른 옷의 주름도 함께 흘러내리며, 몸 전체는 피부에 띄엄띄엄 리드미컬하게 흩뿌려진 작은 채찍 자국들로 뒤덮여 있다. 갈비뼈는 손풍금처럼 벌어져 있고, 피부는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홀쭉하게 꺼진 배에 잡힌 주름은 갈비뼈에 깊고 날카롭게 파인 홈과 서로 반향한다. 그리스도의 머리카락마저도 피투성이에 끈적이고 헝클어져, 옆구리의 상처에서 나오는 분비물과 구분하기 힘들 지경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를 그 중심에 놓는 문화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과잉의 상상력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1. 여기서 검사경(檢査鏡, speculum)은 뤼스 이리가레가 처음 도입한 개념으로 자가 검진용 질경(膣鏡)을 가리키며, 이 책에서 저자가 중세를 바라보는 방식을 은유하고 있다. “이는 플라톤식의 평평한 거울이 아니라, 자가 진단용 굽은 거울―접히는 거울―이다. 이 검사경은 단순히 역사를 초월한 정체성이나 일정한 거리를 둔 타자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접촉하는 함축적 지식의 장소이다.”
  2. 이는 프랑스 비평가인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제시한 개념이다. 비체(脾體), 이물질 등으로 번역되는 아브젝트(abject)는 오줌, 똥, 토사물, 시체, 썩은 음식물, 감염과 오염 같은 더럽고 혐오스럽고 역겨운 대상을 가리키며, ‘아브젝시옹(abjection)’은 주체가 아브젝트에 대해 갖는 느낌을 말한다.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를 문명화 과정에서 억압된 어머니의 몸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원시와 문명의 경계를 표상하며, 자신의 신체와 주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지만 결코 완벽하게 제거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 계속 남아 있으면서 끊임없이 주체를 위협하고 체제와 정체성을 어지럽힌다.―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