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762535195_1파리의 부엌: 프랑스 가정식 레시피와 이야기 | 데이비드 리보비츠 지음 | 김형석 감수 | 벤치워머스 | 2016년

8쪽: 그래서 인터넷으로 미국과 영국을 뒤졌고 → 인터넷 검색을 하면 미국이나 영국 사이트만 자꾸 나왔고 

34쪽: 나는 최소한 1리터들이의 큰 냄비를 사용할 것을 권한다. → 나는 최소한 6리터들이의 큰 냄비를 사용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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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율? 그리고 의미?/헝클어진 이야기 | 루이스 캐럴 지음 | 박정일 감수 | 워크룸프레스 | 2015년

일러두기 두 번째 줄: and → And

11쪽: 『판타즈마고리아 그리고 다른 시들(Phantasmagorai and Other Poems)』(1869) → 『판타즈마고리아 그리고 다른 시들(Phantasmagoria and Other Poems)』(1869) (트위터에서 @vrai_M_L 님이 지적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7쪽 세 번째 연, 네 번째 줄: 일순위 → 일V순위

목차 첫 페이지, 32쪽: 오계(戒) →오계(戒) (한자가 자동 변환되는 서체 오류라고 합니다.)

156쪽: 그 부드러운 검은 눈 → 그 아련한 검은 눈2
(주석 번호 추가)

157쪽: 주석 삽입. 2. “black eye.” 맞아서 시커멓게 멍든 눈이라는 뜻도 있다.

왜 지금

왜 지금 지리학인가: 수퍼바이러스의 확산, 거대 유럽의 위기, IS의 출현까지 혼돈의 세계정세를 꿰뚫는 공간적 사유의 힘 | 하름 데 블레이 지음 | 사회평론 | 2015년

252쪽 ‘지리 환경과 종교적 극단주의’ 바로 아래: 특히 기후 지도(그림 5-3)과 비교해보자. → 특히 기후 지도(그림 5-4)과 비교해보자.

377쪽 첫 번째 문단 끝: 긴장으로 골치를 앓고 있다(그림9-1). → 긴장으로 골치를 앓고 있다(그림9-3).

* 이하는 7쇄에서 수정된 부분입니다.

10(차례), 85(소제목, 맨 아랫줄), 86, 89쪽: 원거리 감지원격 탐사

18쪽: 헨드릭 빌럼 판 론Hendrik Willem van Loon –> 헨드릭 빌렘 반 룬Hendrik Willem van Loon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헨드릭 빌럼 판 론’이 맞으나 국내에 번역된 그의 책들에 모두 ‘헨드릭 빌렘 반 룬’으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혼동을 피하기 위해 수정합니다.)

44쪽: 2011년 7월 20일자 「월스트리트저널」의 머리기사 제목은 “지리는 잘 몰라요Don’t Know Much About Geography”였다. → 2011년 7월 20일자 「월스트리트저널」의 머리기사 제목은 “지리는 잘 몰라요Don’t Know Much About Geography”였다. [이 신문 기사 제목은 샘 쿡Sam Cooke의 노래, ‘역사는 잘 몰라요Don’t Know Much About History’ 중 한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옮긴이] (역주 추가 :네이버 블로그의 박재항 님이 지적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57쪽, 70쪽: 재현도 → 일반

77쪽: 『지도로 거짓말하는 법 How to Lie with Maps』 →  『지도와 거짓말 How to Lie with Maps』

133쪽: 후배지hinterland → 배후지hinterland

190쪽: 이들이 가장 최근에 퇴적된 지역들이 중국의 황허, 유럽의 다뉴브 강, → 이들이 가장 최근에 퇴적된 지역들이 중국의 황허 강, 유럽의 다뉴브 강,

269쪽: 바로 수니파 시리아에서도 소수파인 알라위Alawite 분파에게 권력을 안겨준 정치 기구, 즉 바트(‘재생’이라는 뜻) 당 덕분이었다. → 바로 수니파가 다수인 시리아에서 소수 종파인 알라위Alawite 분파에게 권력을 안겨준 정치 기구, 즉 바트(‘재생’이라는 뜻) 당 덕분이었다.

320쪽: “역사의 지리적 전환점” →  “역사의 지리적 추축

321쪽: 중추 지역 → 추축 지역

321쪽: N.J. 스크먼 → N.J. 스파이크먼

339쪽: 수도의 직접 관할권에 놓이게 되었다. → 베이징의 직접 관할권에 놓이게 되었다.

352쪽: 그렇다면 창장 강(상류 지역에서는 장강이라고 부른다)의 상류 물줄기를 돌려 → 그렇다면 양쯔 강(상류 지역에서는 창장 강이라고 부른다)의 상류 물줄기를 돌려 (강 이름 표기에 대해서는 네이버 블로그의 박재항 님이 지적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369쪽: 지중해 기후  → 지중해 기후

08889805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진보와 보수, 문제는 프레임이다 (10주년 전면개정판) | 조지 레이코프 지음 | 나익주 (감수) | 북폴리오 | 2015년

133쪽 중간: 차별은 자유의 부인이다. → 차별은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179쪽: 취임 직전 오바마 대통령은 게이 결혼을 대놓고 지지하지 않고 → 재선 취임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게이 결혼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197, 205, 208, 239, 254, 291쪽: 『도덕의 정치』 → 『도덕, 정치를 말하다

237쪽: 증오스러운 자유의자들이 미국의 문화와 가치를 위협하고 있으며 → 증오스러운 자유의자들이 미국의 문화와 가치를 위협하고 있으며

250쪽:‘엄격한 아버지’ 모형에서는 남성 역할과 여성 할이 매우 다르며, →‘엄격한 아버지’ 모형에서는 남성 역할과 여성 할이 매우 다르며,

255쪽 맨 아래: 실제로 로버트 라이(Robert B. Reich)는 그가 최근에 쓴 <이성(Reason)>이라는 책에서, 급진적 보수주의를 지칭하기 위해 ‘래드콘(radc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  실제로 로버트 라이(Robert B. Reich)는 <이성(Reason)>이라는 책에 급진적 보수주의를 지칭하기 위해 ‘래드콘(radc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309쪽 10번 주석: 높은 구입비로 인해 오마바 대통령의 취임 이전에는 → 높은 구입비로 인해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이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하는 8월의 묵상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하는 매일 묵상>의 원본에는 편저자가 묵상을 돕기 위해 교황의 말씀 밑에 짤막한 글들을 붙여 놓았는데요. 번역본에서는 이 부분을 (저작권자의 허락을 얻고) 생략했습니다. 혹시 참고가 될까 해서 편저자가 덧붙인 성찰의 글들을 여기에 올립니다. 8월달부터 올라갑니다.

8월 1일
내 주변에는 기쁨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과 대화를 나눠 보고, 그들이 어떻게 그 기쁨 안에서 성장했는지를 물어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기쁨 안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

8월 2일
나는 어떤 헌신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오늘 나는 책임을 기꺼이 짊어지기 위해 어떤 첫 걸음을 뗄 수 있을까요?

8월 3일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카나의 혼인 잔치 대목(2:1-11)을 읽고, 그 내용을 위의 교황님 말씀과 더불어 묵상하면서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은 내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8월 4일
내 삶을 돌아봅시다. 나는 평화의 사람입니까? 나는 누구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대화의 기회를 찾습니까? 나는 어떻게 내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세계에서 평화를 증진할 수 있을까요?

8월 5일
위에서 교황님이 던지신 세 가지 질문을 곱씹어 보십시오. 지난날 나는 이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앞으로 나는 이를 어떻게 실천하고자 합니까?

8월 6일
성령은 내게 어떤 불편한 일을 시키십니까? 나는 성령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어떻게 억누르려 합니까? 이에 대해 나는 어떻게 더욱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을까요?

8월 7일
교황님은 믿음, 소망,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덕목들 중에서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중에서 오늘 내가 “둘러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8월 8일
우리 문화는 하느님이 필요치 않다거나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는 내 삶에서 하느님의 중요성을 매일매일 상기할 수 있을까요?

8월 9일
지금 나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까, 혹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잇습니까? <가톨릭 교리서>에서 내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다룬 부분을 찾아 보십시오. 교리서가 없다면 온라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지혜를 신뢰하십시오.

8월 10일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예수님을 내 결정과 행동과 말의 중심에 구체적으로, 의식적으로 놓으십시오.

8월 11일
내가 솔직히 대면해야 할 실패와 오류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는 나의 어떤 부분이 성장하길 바라실까요?

8월 12일
나는 삶이라는 이야기에서 스스로를 주요한 인물로 여기고 있습니까? 나는 주연입니까? 내가 자신을 주요한 인물로 여긴다면 이 관점은 내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요?

8월 13일
오직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문화에서는 많은 사람들과 중요한 것들이 소외된 채 버려집니다. 이번 주에 나는 더 큰 이타심을 발휘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나의 스케줄에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추가할 수 있을까요?

8월 14일
오늘 나와 이야기 나누는 상대에게 주의를 완전히 집중하십시오. 경청이라는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겸허함을 지니십시오.

8월 15일
지금 나는 비관론과 싸우고 있습니까? 성인전을 읽으십시오. 내가 그 성인의 관점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8월 16일
나는 어떤 때에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8월 17일
내가 지금 직면한 시련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 시련 때문에 겁을 먹고 있습니까?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내 삶과 내 시련을 예수님께 맡기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이 시련을 당신을 믿고 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 기회로 바꾸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8월 18일
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던지신 질문을 묵상하십시오.

8월 19일
우리 시대는 전쟁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 우리 문화 내부의 전쟁, 우리 마음속의 전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기를 바라실까요? 그분께서는 이런 전쟁을 둘러싼 광기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라고 어떻게 나를 부르고 계실까요?

8월 20일
나는 어떻게 비관적인 상황에서 긍정적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악을 선으로 물리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상황에는 어떤 행동이 필요할까요? 어떤 인내가 요구될까요?

8월 21일
오늘 나는 상황에 거칠게 대응하고픈 유혹을 느꼈다가 잠시 멈추고, 어떻게 그 대신 온유한 태도를 취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복음의 사람, 자비의 사람이 되십시오.

8월 22일
삶에서 중요한 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게끔 나를 몰아치는 일들이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일을 서둘러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 귀 기울이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집시다.

8월 23일
나는 청년과 노인들을 보살필 기회를 찾고 있습니까? 우리 본당이나 이웃에 있는 싱글맘 한 명을 도울 수 있습니까? 양로원에 있는 외로운 노인들을 찾아 뵐 수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부모라면, 이런 분들을 위한 봉사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자녀들을 동반하는 것도 생각해 보십시오.

8월 24일
우리는 어떻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대화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겸손하고 열린 마음을 청하며 기도하십시오.

8월 25일
나의 삶은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하고 새롭게 되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에 놓고 있습니까?

8월 26일
예수님을 내 삶의 문지방 안으로 들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내 삶을 집으로 상상해 보십시오. 나는 하느님을 어떤 방으로 들어오시게 할까요? 어떤 방에 하느님을 들어오시지 못하게 할까요? 내 삶의 문을 주님께 열어 드릴 용기를 가지십시오.

8월 27일
나는 성령께 자신을 “내맡기고” 있습니까?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정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분을 무시하거나 제쳐 놓지 마십시오. 아직 성령을 내 삶에 청하지 않았다면, 내 곁에 있어 주십사 청하십시오.

8월 28일
하느님께 오늘 당신의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 상황으로 나를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예를 들면 대화 중에 누군가에게 말할 기회를 양보한다든지, 모욕을 너그럽게 용서한다든지, 험담을 거부하는 식으로 자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8월 29일
나는 하느님이 아닌 어떤 것에서 위안을 구하고 있습니까? 이들은 내게 어떤 거짓 안도감을 줍니까? 나를 이런 우상들로부터 풀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족쇄에서 풀려나 당신께 희망을 구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십시오.

8월 30일
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하신 질문을 성찰해 보십시오. 나는 이를 나의 일상 생활과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8월 31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시는 사랑에 대해 몇 분간 묵상하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증오와 경멸을 드러냈지만 그분은 사랑으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내가 어떠한 악에 대해 선으로 응답할 것을 요구하고 계실까요?

 

남자들이 숨는 곳

옛날에 의뢰받아 작성했지만 출간되지 않은 책의 검토서 하나 더 올립니다.

남자들이 숨는 곳 Where Men Hide

twitchell_where-men-hide지은이: 제임스 트위첼(James B. Twitchell), 켄 로스(Ken Ross, 사진 촬영)
하드커버, 264페이지
출판사: Columbia University Press
출간 연월일: 2006년 2월 24일

목차

1. 사슴 사냥 캠프
2. 권투 링의 치욕과 명예
3. 프리메이슨 지부: 형제단에 입회하다
4. 남자의 취미 공간: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모형 기차
5. 자기만의 방: 남자의 가장 좋은 친구 두 가지(개와 TV, 주로 개)
6. 차고: 자동차와 캘린더 걸
7. 미국의 이발소: “다음 신사분!”
8. 야구장 덕아웃: 씹고 뱉고 싸우자
9. 집 바깥으로: 나의 자동차, 나의 인생
10. 안락의자: 훤히 보이는 곳에 숨기
11. 스트립 클럽: 추파 뒤에 숨기
12. “나는 여기가 좋더라고”: 남자의 식사법
13. 작업장의 해머 타임
14. 일터에서: 사무실에서 숨기
15. 하나님을 위한 남자들의 연대: 초대형 교회와 ‘프라미스 키퍼(아버지 학교)’ 운동

내용 소개 및 의견

이 책은 20세기 미국 문화 속에서 남자들의 공간을 조명한 책이다. 남자 혼자서 틀어박히는 공간(작업장, 차고, 자동차, 취미 공간, 안락의자, 사무 공간)과, 남자 여럿이서 모이는 공간들(사슴 사냥 시즌에 열리는 사슴 캠프, 이발소, 프리메이슨 집회소, 스트립 클럽, 대형 교회)을 문학작품이나 역사적 일화 등 다양한 문화 코드와 이론을 동원하여, 그중에서도 특히 광고나 카탈로그 등 미국의 상업적 물질문화를 통해서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서문과 결론에서 이 책의 제목이 <남자가 숨는 곳(Where Men hide)>이지만 실은 <남자가 숨었던 곳(Where Men hid)>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남자들의 공간’ 중 상당수─이발소, 프리메이슨 집회소, 사슴 사냥 캠프 등─는 미국에서 주로 20세기 초-중반까지 풍미했다가 현재는 거의 과거의 유물로 사라져 가고 있는 공간들이다. 저자는 결론에서 이렇게 ‘남자들만의 분리된 공간’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현상에 대해, 페미니즘의 시각을 채용하여 남녀 및 인종의 차별이 사라져 가는 변화의 부산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 전반에는 성 혁명이 일어난 1960년대 이전 미국의 ‘좋았던 황금기’─안정된 가정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남녀가 유별했으며 ‘우리 아버지 형님들이 핀업 걸을 가슴에 품고 전쟁터에 나갔던 시기’─에 대한 향수가 어쩔 수 없이 뚝뚝 묻어난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을 다시 붙인다면, <남자가 숨는 곳>이 아니라 <미국 남자들이 숨었던 곳을 통해 엿보는 20세기─그중에서도 특히 20세기 초-중반의─미국의 물질문화>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특정 시대 미국의 물질문화(광고 문구, 소비 상품, TV 프로그램, 대중 잡지 등)에 강하게 고착되어 있으며, 그 시대를 직접 살았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공감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문화적 코드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책 자체는 재미있다. 일단 저자가 글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썼으며 흥미로운 일화들(예를 들어 디트로이트의 빅3 자동차 회사에서는 사업상 거래를 우리나라 사람이 룸살롱 가듯 주로 스트립 클럽에서 하며, 세 회사에서 각각 잘 가는 단골 스트립 클럽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등의)도 심심치 않게 소개한다. 또 군데군데 남성들의 문화와 심리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도 엿보인다.

저자인 제임스 트위첼은 플로리다 대학 영문학 및 광고학 교수이다. 낭만주의 문학을 가르쳐 오다 10여 년 전부터 상업문화, 특히 마케팅과 광고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오고 있다. 지은 책으로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 <럭셔리 신드롬> 등이 있다.

발췌 번역

서론

만약 남자들에게 어디에 숨어서 지내느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미친 사람 아니냐는 표정을 지으면서 “뭐, 내가 숨는다고요?” 하고 되물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질문을 여자들에게 던진다면 그들은 바로 그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

내가 애초부터 남자들이 숨는 동굴을 연구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내 주된 본업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낭만주의 시를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업 문화, 그중에서도 광고를 연구하는 것이 내 부업이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이 역설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충분히 말이 된다. 나는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들을 가르치지만, 내가 진짜로 흥미를 느끼는 것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광고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마샬 맥루한이 정신 나간 소리도 많이 했지만, “언젠가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광고야말로 우리 시대 모든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가장 풍부하고도 가장 믿음직하게 반영한 사료임을 발견할 것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정곡을 찔렀다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내가 이 주제로 흘러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1990년대가 끝날 무렵, 광고계에는 작은 공황이 일었다. 젊은 남성들이 별안간 광고를 보지 않게 된 것이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그들은 갑자기 닐슨 리서치[마케팅 조사기관]의 레이더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하워드 스턴[저질스러운 입담으로 유명한 미국의 DJ] 같은 것 말고는 라디오도 듣지 않았으며 <맥심>이나 <디테일스> 같은 남성 잡지를 빼고는 아무 것도 읽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애드버타이징 에이지> 같은 업계 매체만이 아니라 전국 신문과 공중파 TV에서도 머릿기사로 다루어졌다.

남성들은 언제나 광고업자들이 찾아내기가 힘든 소구 대상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수퍼볼에 붙는 광고 단가가 30초당 2백만 달러를 훌쩍 뛰어 넘고, 텔레비전에는 프로레슬링과 배스 낚시 프로그램이 그렇게 넘쳐 나는 것이다. 익스트림 스포츠가 옛날의 게임들을 시야 저편으로 밀어내고, 스노우보드 같은 운동이 올림픽 이벤트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마 그 다음 주자는 페인트볼[서바이벌 게임]이 될 것이다. 그것은 헤비메탈과 랩이 MTV의 주류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면도 크림, 맥주, SUV 따위를 팔아야 하는 입장이라면, 팔기 전에 우선 그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남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 남자들은 찾아내기가 힘들고, 광고를 전하는 동안 한 곳에 붙들어 두기란 더더욱 힘들다. 아들 가진 부모들에게 가서 물어보라.

젊은 남자들이 광고업자의 시야에서는 숨어 버리더라도, 나는 그들을 수업 시간에─적어도 잠시 동안은─확실히 붙잡아 놓을 수 있다. 나는 남학생들에게 수업 시간이 아닐 때는 주로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리고 그중 많은 이들이 고속 인터넷이 설치된 기숙사 방이나 동아리방이나 게임방으로 돌아가서 복잡한 비디오게임을 한다는 것을 알고 흥미가 돋았다. 물론 이 세대는 오락실용 아케이드 게임을 하면서 컸지만, 오늘날의 게임도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으며 또한 전 세계에 게이머들이 있다. 온라인 포커 게임이 젊은 아이들 사이에서 큰 유행이어서 그들은 나보다도 도박 하는 것을 더 잘 안다. 그들은 또 인터넷 속으로도 숨는다. 음악을 다운로드하거나 눈요기꺼리 포르노를 보기도 하고 인터넷 메신저 같은 새로운 방식으로 친구들과 의사소통하기도 한다. 많은 아이들은 휴대 전화를 가지고 다니면서 한쪽은 귀에 꽂고 손가락으로는 항상 문자를 보낸다. 결국 그들은 그곳에 잘 있었다. 다만 1980년대처럼 타임워너와 비아컴과 뉴스 코퍼레이션[셋 다 거대 미디어 그룹임]의 교차 지점에 있지 않을 뿐이다. ESPN, <필드 앤 스트림[Field and Stream, 사냥 및 낚시 잡지]>, ‘아웃도어 라이프 네트워크[Outdoor Life Network, 역시 사냥과 낚시를 주로 다루는 케이블 채널]’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며 다시 데리고 올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했다.

사라지는 남자들의 역사(상업 문화를 이끌어 온 프로그래머들은 남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때가 1960년대부터라고 보고 있다)에 대해서 한창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머리를 자를 일이 생겼다. 내가 간 곳은 집 근처의 작은 대학촌에 자리한 ‘콜린스’라는 유니섹스 미용실이었다. 그 창문에는 ‘남녀 모두를 위한 헤어스타일링’이라는 문구를 써 붙여 놓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너덜너덜해진 <에스콰이어> 1999년 3월호를 집어 들었다. 잡지를 뒤적이는데, 뉴저지의 한 사진작가가 ‘남자들의 방[Men’s Roon─남자화장실이라는 뜻도 있음]’이라는 제목으로 찍어 게재한 화보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우리는 어디에 머무는가: 남자들이 여자 없이 서식하는 곳들의 초상”이라는 헤드라인이 붙어 있었다(Montali, 52p.). 나는 그 이미지들과 거기에 붙은 복잡한 설명에 이끌렸다.

나는 그 사진들이 사람을 끌어당긴다는 것을 곧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머리를 자를 때는 안경을 벗기 때문에, 글씨가 잘 안 보여서 잡지를 코앞에까지 끌어당겨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러고 있자니, 항상 내 머리를 잘라 주는 데이빗도 자르던 것을 멈추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도 흥미가 동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우리는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우리 바로 옆 자리에서 한 여자가 머리를 염색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본 것은 아쉽게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수영복 화보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고에서 모형 자동차들이 경주하는 모습, 텅 빈 권투 링, 모형 기차 세트 따위에 불과했지만, 우리 둘은 그러한 이미지가 너무나 익숙했고 기묘하게도 공범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발소 문화는 나의 세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변화를 겼었다. 내가 아직 꼬마였을 때, 버몬트 주 벌링턴 읍내의 뱅크 스트리트 이발소는 항상 잡담 소리로 시끄러웠다. 이발사들은 자기들끼리나 손님들하고나 편안하고도 친숙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발소에서 대기하다가 내 차례가 와도 건너뛰고 제리 머롤라 씨가 일을 다 끝마칠 때까지 기다릴라 치면, 다른 이발사들의 악의 없는 놀림을 감수해야만 한다. 다른 이발사들은 “아 그래, 네 머리는 제리만 잘라 줄 수 있지.” 하고 나를 놀려 먹으면서 모두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예약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이발소에는 집에서는 구경도 못할 잡지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다 1960년대부터 여자들이 이발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어고시[Argosy, 대중소설 잡지, SF작가들의 등단 무대이기도 했음.]>와 <폴리스 가제트[The Police Gazette, 싸구려 소설 잡지로, 속옷 차림을 한 여성들의 그림을 실었는데 이것이 핀업 걸의 원조가 되었다.]>는 자취를 감추었다. 머리를 자르는 것은 사적인 일이 되었다. 가위 대신에 플라스틱 날이 달린 전동 클리퍼가 등장했다. 그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여자가 머리를 잘라 줄 확률이 높아졌으니 잘 된 거 아냐.

그래서, 현대적인 방식에 따라 데이빗과 나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이 사진에서 본 것이 남자들이 가는 곳에 대한, 그리고 그들이 가진 물건들에 대한 일종의 로드맵임을 깨달았다. 이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평화로움을 느꼈다. 나는 이 공간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 자신이 그 일부라고 느꼈다. 나는 궁금했다. 이 이미지들을 면밀히 읽어 냄으로써 남자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이 이미지들 속에서 남성성의 내러티브를 형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텍스트(윽, 이건 영문학 선생 말투인 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또는 요즘 학계의 유행어를 써서, 남성성이 구성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형성하는 것 중 일부를 이 사진들 속에서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사진작가인 켄 로스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남자들의 방’이라고 이름 붙인 남자들의 공간을 찍은 사진들을 좀 더 볼 수 있겠느냐고 부탁하였다. 그는 내게 그중 몇 장을 보내 주고 나중에 다시 몇 장을 더 보내 주었는데, 그것을 보고 나는 그가 많은 물건들을 한데 아우르는 공간의 위상학을 창조해 내었음을 깨달았다. 한 공간에서 보이는 모티프와 상징들이 다른 이미지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냈고, 특정한 종류의 시각적 이미지들이 다양한 내러티브를 관통하며, 말하자면 화성[<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그 화성]을 관통하면서 자리를 바꿔가며 등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를 다 보고 나자, 나는 일종의 황량함을, 어두컴컴하고 심지어는 불길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헤밍웨이와 맥주 광고가 뭐라고 뇌까리건 간에, 남자의 공간은 확실히 해피밀은 아니다. 화성은 정말로 외롭고 기묘하게 삭막한 곳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를 휴식의 순간으로, 남자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기 위해 찾아들어가는 구석으로, 죽치고 앉아 뭘 만지작거리거나 빈둥거리는 장소로, (여자들을 공공연히 적대해서가 아니라 남자들에게는 그저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여자들에게 불친절한 휴게실로 본다면, 그곳은 충분히 즐거운 공간이 된다.

7. 미국의 이발소: “다음 신사분!”

우리 부모님 대에서부터 내려온 이발소 농담이 있는데 이런 것이다. 한 농부가 머리를 자르러 읍내에 나갔다. 그는 참을성 있게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이발사가 “다음 신사분!” 하자, 농부는 펄쩍 뛰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빨리? 내가 다음인 줄 알았는데?”

이 농담을 음미하려면 이발소의 평등주의적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발소는 모든 남자들이─거의 모든 남자라고 하자─동등하게 대우받는 곳이다. 물론 어느 특정한 이발사를 원한다면 차례를 건너뛰고 더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이발소에서 취하는 표준적인 행동은 이렇다(아니 이러했다). 이발소에 간다. 차례를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잡담도 좀 한다. 머리를 자른다. 돈을 내고 나온다. 불평할 일이 없다. 남자들이 숨는 다른 많은 공간들과 마찬가지로, 이발소에도 이 과정을 확립하는 입문 의례가 있다. 소년이 처음으로 머리를 자르는 것은 엄마에게서 분리되는 중요한 순간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중요한 행사이다. 스페인어 문화권에서는 이 행사를 가리키는 숙어─“이발소에서는 울면 안 된다(En la barberia no se llora)”─까지 있다.

요즘에는 이발소에서 보내는 시간이 기다리는 데 15분, 머리 자르는 데 15분 정도면 되지만, 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곳에서 족히 한 시간은 넘게 보냈다. 이발과 면도라는 두 가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면도는 이발소에 가는 중요한 이유였다. 지금은 에이즈라는 유령 때문에 면도가 이발소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이발소라는 공간 전체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것은 (시가 바처럼) 남자들이 방치해서도 아니고 (프리메이슨처럼) 여자들이 개입해서도 아니다. 이발소가 사라진 것은 주로 일회용 면도기 때문이다. 1880년대의 남성 인구가 5천만 명에 이발사의 수는 약 4만 5천 명이었는데, 오늘날에 소비자의 수는 그 6배가 증가한 반면 이발사의 수는 제자리걸음이다. 이러한 쇠퇴는 특히 2차 대전 이후로 더더욱 급격해 졌다. 1950년대에는 총 28만 천 개의 이발소가 있었던 반면, 현재 그 수는 5만 5천 개로 줄었다(Steten, p.42).

옆 페이지의 이미지는 이발소가 역사적으로 쇠락의 일로를 걷고 있는 와중에 찍은 것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흔적과 그것이 현재 쇠퇴하게 된 이유를 둘 다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남자들이 머리를 자르는 장소라는 의미로서 ‘이발소’라고 부르는 것은, 한때는 시가, 위스키, 도색 잡지,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술이 소비되는 시끌벅적한 소굴이었다. 사진 속 정면에 걸린 거울 옆에 이발사가 써 붙여 놓은 메모를 읽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현대성으로의 변화를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업자와 고객 양자는 서비스가 수행되는 동안 흡연이 금지되어 있음.”이라고 쓰여 있다. 간단한 메모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공식적인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이는 이발소들의 과거 모습을 희화화한 것이기도 하다. 남자들은 집에서 시가를 피울 수 없으면(혹은 술을 마실 수 없으면) 그것을 이발소로 들고 왔다.

이발소와 선술집(saloon)의 공통점은 바로 ‘병’이었다. 금주법 시대에 이발소는 가끔씩 무허가 술집 역할도 했다. 그때에는 알코올을 주 원료로 한 모발용 약품을 (이발사 자리 앞쪽 찬장에 쌓아 놓고) 색깔 있는 병에 담아 팔았는데, 규제 대상이었던 에틸알코올을 뒷방에 통으로 쌓아 두고 거기서 병에 덜어다 몰래 팔기도 했다. 실제로 요즘에 애프터 셰이브로 쓰이는 ‘베이 럼’에는 그 시대의 밀주 진과 비슷한 마개가 달려 있는데, 이는 머리에 바르는 토닉과 몸속에 부어 넣는 토닉과의 연관성을 상기시킨다. 금주법 시대는 처방전 없이 매매하는 특허 의약품, 이른바 만병통치약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진통제라는 명목으로 알코올과 아편제를 운반하는 주된 수단이었다. ‘시폼(Sea Foam)’, ‘브릴리언타인(Brilliantine)’, ‘타이거 럽(Tiger Rub)’ 같이 이발사가 조제한 약품들 덕분에 남자들은 알콜 음료의 유통과 판매를 금지한 수정헌법 18조를 교묘히 피해 갈 수 있었다. 실제로 이발소 모발용 토닉의 알코올 도수는 특허 의약품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서 여자들이 ‘부인병에 효험이 있는’ 리디아 E. 핑크햄의 ‘식물 복합제’를 사는 동안에, 남편들은 이발소에서 ‘플로리다 워터’를 보충하고 있었다.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갱단 조직원들이 면도를 하던 도중에 살해당했는지 의문을 품어 보아야 한다. 그건 그곳이 그들의 비즈니스 장소였기 때문이다. 뒷방은 술병 공장이고 앞방은 남자들이 득시글한 이발소라니 이 얼마나 찰떡궁합인가.

 

리처드 호프스태터–미국의 반지성주의

이 책이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오래 전에 제안했다가 빠꾸 먹은 검토서 올립니다. 2009년에 쓴 것입니다.

untitled미국의 반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

지은이: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
출간연도: 1962년
분량: 434쪽
출판사: Vintage Books

목차

1부 서론
    1장 우리 시대의 반지성주의
    2장 지식인을 백안시하는 경향에 대해
2부 가슴의 종교
    3장 복음주의의 기풍
    4장 복음주의와 신앙 부흥 운동
    5장 모더니티에 대한 반감
3부 민주주의의 정치
    6장 젠틀맨 계층의 쇠퇴
    7장 개혁 세력의 운명
    8장 전문가 집단의 부상
4부 실용 중심의 문화
    9장 기업가와 지식인
    10장 자기 계발 및 영성 개발 서적
    11장 반지성주의 테마의 변종들
5부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
    12장 학교와 교사
    13장 ‘생활 적응(Life Adjustment)’ 운동
    14장 어린이와 세계
6부 결론
    15장 소외와 순응의 지식인
감사의 말
찾아보기

내용 요약

이 책에서 말하는 ‘반지성주의’란 지식인과 지적 활동을 백안시·적대시하는 사회적 경향을 말한다. 저자는 먼저 이 주제를 다루게 된 계기인 1950년대의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고, 여러 가지 맥락에서 반지성주의적 태도가 드러난 연설문, 의사록, 인터뷰, 기사 등 1차 자료들을 차례로 소개한다.(1장) 이들 사례를 종합하며 저자는, 미국에는 지식인이 허세에 차 있고 대중을 기만하며 남성적이지 못한데다 속물적이고, 나아가 비도덕적이고 위험하다는 고정관념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고정관념에 따르면 평범한 사람이 살면서 몸으로 체득한 상식과 윤리야말로 전문가나 식자들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즉 분석적이고 보편적인 ‘지성(intellect)’을 배격하고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슬기(intelligence)’를 중시하는 것이 미국의 풍토이다. (이를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이 바로 미국의 영웅으로 받들어진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다.)

미국 건국 초기만 해도 청교도 성직자와 헌법 제정자(Founding Fathers)라는 두 지식인 집단의 연합이 사회적 권력을 행사하며 지적·정치적 전통의 기초를 세웠다. 그러나 1820년대 이후부터 서부 개척, 산업 발전, 평등주의 부상 등의 사회 경제적 변화로 인해 건국 초기의 공화 질서가 해체되었다. 전통적 명문 계층은 세련된 문화를 영위하며 명맥을 유지했지만 그 사회적 영향력은 대폭 축소되었고, 그와 더불어 비판적이거나 창조적인 정신도 잃었다.(15장)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들이 시대를 호령하고 비즈니스 논리가 거침없이 통용된 19세기의 도금 시대(Gilded Age)는 ‘나약한’ 지식인과 ‘쓰잘데기 없는’ 학교 교육에 대한 경멸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사회가 복잡해지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공식 교육을 받은 전문가의 지식을 여러 분야에서 필요로 하게 되자(특히 뉴딜 정책이 시행되면서, 지식인들은 전문가 집단으로서 정부 정책에 참여하여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지식인에 대한 비웃음은 두려움과 분노로 바뀌게 된다. 또 이데올로그로서 지식인의 비판적, 진보적 특성 때문에 우익들은 전통적으로 지식인을 적대시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미국 반지성주의의 깊숙한 곳에는 모더니티 자체에 대한 반동이 숨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5장) 즉 1차대전 이후 미국에 몰아닥친 변화–세계시민주의와 다윈 진화론의 유입, 미국 고립주의의 종말, 전통적 자본주의의 (대공황으로) 붕괴와 중앙 집중화된 복지 국가로의 전환, 막대한 전쟁 부담 등–를 거부하고, 대륙으로 떨어져 고립된 채 촌락 사회가 온존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뒷받침하며 산업 자본주의가 제재 없이 활개 쳤던 19세기의 미국으로 회귀하려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 사회에서 반지성주의의 모태가 되거나 희생양이 된 분야를 하나씩 역사적으로 검토한다. 우선 18세기 중후반~19세기에 미국을 휩쓸었고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은 반지성주의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3-4장) 초창기의 청교도 성직자들은 지식인 계층이었지만, 18세기 중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청교도 시대가 끝나고 복음주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운동을 주도한 전도사들은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았었으며, 기존 성직자들을 ‘교활하고 냉혈한 위선자 집단’으로 매도하고 “성경 외에는 책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호전적인 반지성주의 운동을 벌였다. 문명과 교육에서 소외된 남서부 벽촌의 주민들을 최대한 많이, 빨리 전도하려면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고 요란한 통성기도에 의존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던 것도 있다. 남북전쟁 이후에는 도시 인구가 폭발하면서 드와이트 무디, 빌리 선데이, 빌리 그레이엄 등 대도시를 무대로 전국적 성공을 거둔 스타 전도사들이 출현하는데, 이들은 신문에 광고를 내고 교회가 아닌 대형 강당에서 집회를 여는 식으로 복음주의에 비즈니스 마인드를 결합했고, 서커스에 나오는 거인을 도어맨으로 고용하고 설교 중에 옷을 벗어젖히거나 비속어를 내뱉는 등 쇼와 비슷한 요소를 가미했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에는 앞서 말한 모더니즘 유입의 반작용으로 종교적 근본주의가 오히려 더더욱 전투적이고 완고해지며(1920년대에는 학교에서의 진화론 교육을 반대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진다.), 다양성을 용납지 않고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파악하는 미국 우익 세계관의 기저를 이루게 된다. 개신교 근본주의와 연합하여 모더니티에 반기를 들었다는 면에서 가톨릭도 예외는 아니었다. 복음주의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정신적 전통은, 학습된 인공적 이성보다도 신이 주신 직관적 “지혜”를 선호하는 원시주의(primitivism)다. 이는 애초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련되었지만 타락한’ 유럽 문명과 스스로를 구분하면서 세워졌다는 데서도 기인한다.

복음주의와 원시주의가 미국인의 의식에서 반지성주의의 뿌리를 이룬다면, 반지성주의가 미국인 의식의 전면으로 떠오른 것은 미국이 비즈니스 패권이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9장) 비즈니스와 지식인은 근본적으로 서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을 뿐더러, 개척지에서 맨손으로 사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거칠고 공격적인 남성적 마인드와 과감한 의사결정, 기회를 놓치지 않는 순발력이 미덕이 되고, 지적이고 문화적인 것은 ‘유약하고 여성적’이라고 배척하는 풍토가 심화된 것이다.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문화를 애호하는 부유한 (특히 동부 해안 지역) 상인 계층이 지식인을 후원하는 전통이 이어졌지만, 비즈니스가 서부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새로 유입된 신흥 자본가들은 반지성, 반문화 운동에 가장 큰 동력을 제공한 세력이 되었다. 이들 중 다수는 공식 교육 없이 맨손으로 자수성가하여 성공 신화를 양산한 장본인들이었는데, 이들의 이상을 잘 반영한 문헌이 19세기부터 출현한, 강한 종교색을 띤 자기계발(self-help) 서적들이다.(10장) 원래 비즈니스에 열심히 임하는 것이야말로 신을 섬기는 방법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청교도 논리인데, 19세기 말부터는 미국 중산층 기질의 세속화와 더불어 이 관계가 역전되어 신앙이 세속적 성공의 도구가 된다. 이런 부류의 ‘종교 실용서’에는, 타고난 재능보다 인성을 강조하고, 사업 경영에 쓸모없는 고등 교육보다 현장에서 부딪치며 배우는 경험을 중시하며, “내향적 기질보다는 외향적 기질이, 비판적 지성보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기업가들의 마인드가 담겨 있다. 20세기에 들어 비즈니스 규모가 커지면서 기업도 전문적인 관리·기술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고, 대학도 이에 부응하여 경영대학원(business school)을 설립하는 등 좀 더 실용적인 직업 교육을 도입하게 된다. 하지만 기업 경영 현장의 변화와는 별도로 지성과 재능보다 인성과 순응을 선호하는 기업가들의 마인드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지식인과 그들의 전문 지식을 적대시하는 경향은 비단 기업가들뿐만이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심지어 노동 운동) 사이에서도 보편적이었다.(11장) 미국 농민들은 계급감정과 실용주의의 영향으로 젠틀맨 계층의 부농과 전문가들이 개발한 새로운 농법을 불신하고 이를 받아들이기를 오랫동안 꺼렸다. 또 지식인들은 초창기 노동 운동의 태동과 노동자들의 의식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면서도 이후 노조와 사회주의 정당 내에서 소외되었다. 이는 지식인들이 노동 운동을 통해 사회주의나 개혁 등 더 큰 목표를 추구했던 반면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기업가와 유사한 자수성가형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 서로 지향점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먹물에 찌들지 않은 순수하고 강인한 노동자’의 이상이나 조직 내의 잭슨식 평등주의 이상과 충돌을 빚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잭슨식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로 대표되는, 미국 사회 특유의 평등주의적 풍토는 미국 정치에서 반지성주의를 규정한 주된 힘이었다.(6장) 처음 미국을 건국한 지도자들은 부유한 지식인(젠틀맨) 계층이었지만, 평등주의적 욕구는 아주 초창기부터 지식인 내지 전문 정치인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잭슨식 민주주의’란 1824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앤드류 잭슨(지지자들은 그를 책이 아니라 숲과 들판에서 배운 지혜를 지닌 농부의 아들, 보통 사람들의 영웅으로 찬양했다)으로부터 유래한 정치 이념으로, 중앙 집권과 상류층을 배격하며, 정부 활동은 기본적으로 특별히 교육받은 전문가가 아니라 상식을 지닌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이후로 전통적 젠틀맨 계층은 정치 무대에서 소외되었고, 공직은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하게 되었으며, 의회에서는 위스키와 단검이 난무하게 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젠틀맨 가문의 지식인 개혁가들이 공무원을 시험을 통해 뽑으려는 공직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정치 기득권과 충돌을 빚게 된다(7장). 개혁가들은 기존 정치인들이 무식하고 천박하며 부패했다고 비난한 데 비해, 정치는 남성의 전유물이므로 유약하고 여성적인 지식인들은 거칠고 힘든 정치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기존 정치인들의 주장이었다. 이런 고정관념을 쇄신한 사람이 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그는 부유한 집안 태생에 하버드 출신이었지만 개인적인 남성적 매력과 서부에서의 경험을 내세워 강하고 결단력 있는 인상을 줌으로써 1890년대에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미국은 혁신주의(progressivism) 시대로 들어섰고, 급속한 경제 사회 발전에 부응하여 정부 기능도 복잡해지면서 지식인 전문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8장) 그 최초의 사례가 1892년 위스콘신 대학과 주 정부가 서로 긴밀한 정책 협력 관계를 맺은 ‘위스콘신 모델’이었고, 이 모델은 기득권의 거센 저항을 받았지만 이후 뉴딜 정책을 추진한 두뇌 집단(brain trust)의 원형이 되었다. 지식인이 드디어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서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는 다른 종류의 ‘실용적’ 전문 지식으로 무장한 지식인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대중의 선망과 동시에 경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추세는 전쟁 수행을 위해 고급 두뇌 수요가 더더욱 높아진 2차대전기에 절정에 이르렀다가, 전쟁 이후 대대적인 역풍을 맞게 된다. 지식인들의 유례없는 지지를 한 몸에 받았던 대통령 후보 애들레이 스티븐슨을 대상으로 지식인을 급진주의, 국가 반역, 여성적 유약함 등과 연관시키는 반지성주의적 공격이 행해졌고, 그가 결국 참패한 것이다. 반면 존 F. 케네디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후 최초로, 지성과 문화에 대한 존중을 진취적이고 실용적인 미덕과 결합시키는 데 성공한 대통령이었다.

반지성주의적 신념이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겨진 분야가 바로 미국의 교육이다. 미국 학교 교육의 실패–교사의 저임금과 낮은 사회적 지위, 노후하고 게토화된 학교, 운동선수에 대한 과도한 숭배, 학업 성취도의 전반적 저하, 성적이 뛰어난 학생의 방치–가 대부분 여기에 기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미국에서 교사는 애초부터 존경받는 직업이 못 되었다.(12장) 마을에서는 교사 월급을 충분히 줄 여력이 없었고, 공직자의 봉급이 너무 높으면 안 된다는 평등주의적 의식이 작용해서 대우도 변변치 않았다. 그래서 교사는 다른 (남자다운) 직업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잠시 거쳐 가거나 어쩔 수 없이 눌러앉는 자리로 여겨졌고, 자격 미달인 자들이 교사가 되어 학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여성 교사가 대규모로 충원되면서 이런 악순환은 해결되는 듯했지만, 교직의 여초 현상 때문에 교사의 지위가 더욱 하락하는 부작용이 생겼고 20세기 들어 학교와 학생 수가 크게 증가하면서 인력이 부족해지자 교사의 질을 담보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예로부터도 지식 그 자체의 추구나 지적 능력의 개발은 미국 교육의 목표가 아니었지만, 특히 1870년대 이후 중등 의무 교육이 시행되고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의 자녀들까지 가세해 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공부에 관심 없는 대다수 평균 이하의 학생들에게 고교 교육의 포커스를 맞추어 대학 진학보다는 시민 의식 함양과 실용적 직업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신념이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이 신념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예가 1940-1950년대에 시행된 ‘Life Adjustment’ 운동으로, 이를테면 외국어나 수학, 고전 같은 학구적 과목이 대거 폐지되고 운전이나 가사처럼 학생들의 흥미와 필요에 부응하는 실용적인 과목이 개설되었다.(13장) 이 운동은 너그럽고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이상을 추구했지만, 매스미디어가 부추기는 소비문화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간을 길러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기도 했다. 존 듀이의 교육 철학은 이런 새로운 교육 운동을 떠받친 지적 기둥 중 하나였으나,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듀이의 의도와 달리 단순화되고 왜곡되었다.(14장)

 

발췌 번역

1. 우리 시대의 반지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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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미국 역사에서 좀 더 오래된 과거의 특정 측면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실은 1950년대의 정치적·지적 상황에 대응하여 착상하게 된 것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웬만해서 듣기 힘들었던 ‘반지성주의’라는 말이, 이 시기를 거치면서 비방을 되받아치고 서로를 매도하는 익숙한 단어로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과거에도 미국의 지식인들은 지성을 경시하는 국가적 경향 때문에 좌절과 쓰라림을 감내해야 했지만, 지식인 공동체 외부에서 이런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이 이토록 많았거나, 이런 식의 자기비판이 전국 규모의 운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시기를 상기하기란 힘들다.

이 나라에서 비판적 지성의 가치가 폭락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킨 주범은 대체로 매카시즘이었다. 물론 매카시의 부단한 공격은 지식인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지만–그는 더 큰 사냥감을 쫓고 있었다–지식인들은 그의 총구가 향하는 방향에 서 있었고, 그의 추종자들은 지식인이 쓰러질 때에 더더욱 환호하는 듯했다. 지식인과 대학을 향한 그의 돌격을 본받아, 하급 종교재판관들이 전국에서 비슷한 행태를 벌였다. 이윽고 매카시의 비난 공세로 인해 극심한 악의와 재미없는 머저리짓이 횡행하는 분위기에서 1952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각각 지성과 무지를 대표하는 후보가 서로 극명한 대조를 이룬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한 쪽은 비범한 지성과 스타일을 갖춘 정치인 애들레이 스티븐슨으로, 역사상 지식인에게 그만큼 어필한 사람이 드물었다. 한편 그 반대쪽은 진부한 수준의 지성에 자기 의견이 그다지 분명치 않으며 닉슨이라는 입맛 안 맞는 러닝메이트에게 끌려 다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었다. 그의 선거 운동 분위기는 아이젠하워 자신보다는 그의 러닝메이트와 당 내 매카시 파벌의 손에 좌지우지되었다.

지식인들 자신과 그 비판 세력 모두는, 아이젠하워의 압도적 승리를 미국이 지식인을 거부했다는 지표로서 받아들였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아이젠하워의 승리로 “오랫동안 의심해 왔던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의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 넓고도 불건전한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면서 짐짓 우려하는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서 슐레진저 주니어는 선거 직후 발표한 신랄한 글에서, 지식인이 “지난 한 세대 동안 몰랐던 생소한 상황”에 놓였다고 말했다. 지식인이 대체로 이해와 존경을 누렸던 20년간의 민주당 집권기가 끝나고, 친기업 세력이 권좌로 복귀하면서 “기업 패권의 거의 정해진 수순”으로 “천박화”를 끌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제 ‘달걀머리(egghead)’, 별종으로 취급되어 쫓겨난 지식인들은 자신들을 거의 필요로 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당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고, 소득세부터 진주만 공격에 이르는 모든 문제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기업가들 사이에서 반지성주의는 오래 전부터 반유대주의와 같은 것이었다…오늘날 미국 사회에서….지식인은 쫓겨나고 있다.”고 슐레진저는 말했다.

새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이 모든 우려는 충분히 이유 있는 것이 되었다. 이미 트루먼 재임기에도 지식인들은 지방 정치인들의 그늘에 가려졌지만, 스티븐슨의 말마따나 카 딜러(Car Dealer)가 뉴딜러(New Dealer)를 몰아냄으로써 지식인과 그들의 가치에 대한 거부에 결정타를 먹인 듯했다. 이제는 순수 학문에 대한 찰스 E. 윌슨의 공격, 아이젠하워의 서부 소설 취향, 지식인은 말 많고 허세 부리는 사람이라는 아이젠하워의 관념 등이 나라를 논하는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에 이런 사회 분위기는 전환점에 이르렀다. 매카시 광풍이 공화당 대통령과 마찰을 빚다가 드디어 수명을 다해 사그라진 것이다.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 매카시는 고립되고 비난받고 결국 쪼그라들었다. 마침내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하면서, 국가 위신을 의식적으로 재검토하는 물결에 주기적으로 휩쓸리는 미국 대중의 경향이 다시금 꿈틀거리기에 이르렀다. 스푸트니크는 미국의 국가적 자부심에 충격 그 이상이었다. 이로써 학교 시스템과 미국 사회 전체에 퍼진 반지성주의의 결과에 엄청난 이목이 쏠리게 되었다. 지식인에 대한 국가적 혐오는 단순한 망신거리가 아니라 졸지에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국가에 불충하는 교사들을 염려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낮은 월급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날로 심해지는 안보 강박관념 때문에 연구 사기가 저하된다고 우려해 온 과학자들의 말에 갑자기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 교육의 느슨함을 질타하는 목소리는 그전까지 소수 교육 비평가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는 텔레비전 대중 잡지, 기업가, 과학자, 정치가, 장성, 대학 총장들까지 나서서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고, 이는 곧 국가적 자성의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물론 이런 소동으로 곧바로 자경단 기질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미국 사회의 한 흐름으로 존재해 온 반지성주의가 말끔히 걷힌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가장 직접적인 영향권인 교육 분야에서도, 사람들의 열정은 좀 더 많은 지식인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스푸트니크를 생산해 내는 쪽으로 주로 쏠리는 듯했고, 우수한 아이들을 냉전의 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식의 수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확연히 변했다. 1952년만 해도 반지성주의라는 유령에게 괴롭힘 당하는 사람은 지식인들뿐이었지만, 1958년에는 이것이 중요하고 심지어 위험한 국가적 약점이라는 인식이 대다수의 생각 있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오늘날[케네디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1962년–옮긴이]에는 1950년대의 정치 문화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매카시즘과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지식인이 공적 영역에서 몰락했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면, 이제 정부가 하버드 교수들과 로즈 장학생 출신 학자들을 다시금 그렇게 적대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식인이 정치나 정부의 성공을 가로막는 장해물이 되었다는 의혹이 있기는 하지만, 새 대통령이 사상에 관심을 갖고 지식인을 존중하며, 국정 운영에서 이런 존중을 의례적 제스처를 통해 드러내고, 지식인을 가까이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듣기를 즐기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 기간 신중히 가려 뽑은 출중한 인재들을 데리고 행정부를 출범시켰기에 이런 의혹은 곧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한편 행정부가 이런 인재를 영입함으로써 국정을 완전히 쇄신할 수 있다는 과도한 자만심에 부풀어 있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현실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현재 우리는 지식인이 과장된 당파주의나 자기 연민 없이 반지성주의를 논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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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교육 논쟁이 정치적으로 끓어오르면서,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는 미국에 대한 자기 평가의 중심을 이루는 어구가 되었다. 이 말은 뚜렷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어느새 우리의 일상 언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고, 달갑잖은 여러 현상을 가리키는 데 흔히 쓰이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말을 듣게 된 사람들은 반지성주의가 삶의 이런 저런 영역에 새롭게 출현한 현상 혹은 최근에 만들어진 환경의 산물일 것이라고 짐작하곤 한다.(이는 미국 지식인들의 역사 관념이 한숨이 나올 정도로 얄팍한 데다, 현대인이 일종의 묵시록의 그늘 밑에서 너무 오래 살아온 탓에 지식인들이 사회 변화의 조그만 소용돌이도 마치 커다란 격동인 양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문헌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1950년대를 강타한 반지성주의라는 흐름은 전혀 새롭지 않고 익히 친숙한 것이었다. 이 나라에서 반지성주의는 1950년대에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의 반지성주의는 우리의 국가 정체성보다도 더 오래되었고, 긴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 배경을 검토해 보면 미국에서 지식인에 대한 인식이 꾸준히 하락한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땅에 떨어진 것도 아니며, 주기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우리 시대 지식인들에게 쏟아진 분노는 지식인의 지위가 낮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현저히 상승한 증거임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체계적으로 알지 못하며, 이 주제에 대해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한 고찰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국의 지식인과 이 나라 사이의 오랜 불화에 대해 많은 문헌이 쓰였지만, 이런 문헌들은 지식인의 눈으로 본 미국에 대해 주로 다루고 있으며 미국의 눈으로 본 지성과 지식인에 대해서는 가끔씩 어렴풋이만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의견

내가 이 책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2003-2004년쯤이었는데, 출판평론가 표정훈의 홈페이지(현재 궁리닷컴 홈페이지)를 통해서였다. 여기서 그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소개했다. “호프스태터의 1963년 저작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 (퓰리쳐상 수상작)는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국 사회, 미국 지성의 풍토, 미국적인 것, 미국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첩경이다. 반지성주의야말로 미국 문화,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지식인에 대한 비합리적일 정도의 경멸과 반감이 미국 사회의 저류에 흐르고 있다.”

마침 부시 행정부에서 한창 흘러나오던 비이성적인 언행에 질리고–저런 웃기지도 않는 사고방식이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 세계 최강대국을 지배하게 된 것인지–의아했던 차라, 이 책이 그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읽어본 다음에는 정말 그 의문이 상당히 풀렸다.)

이 책의 내용은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했고, (지식인을 변호하려다 보니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이 엿보이긴 하지만)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니만큼 가치도 충분히 공인되어 있다.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장밋빛 기대나 비트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이 책이 쓰인 시대를 짐작케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놀랍게도 거의 낡아 보이지 않는다.

시장성에 대해서는 요즘 상황이 어려운 만큼 자신 있게 말하기 힘들다. 조선 왕조 이래로 엘리트 문관이 패권을 쥐어 온 한국 사회에서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는 다소 낯선 것이기도 하다. 부시 행정부 시기에 번역본이 나왔다면 아마 좀 더 시의성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한 마디 보태자면, 비전문가인 독자 입장에서도 생각보다 읽기에 지루하지 않은 책이었다. 미국사에서 우리에게 덜 알려졌던 새롭고 흥미로운 사실과 통찰이 가득 들어있고, 영화나 책에서 단편적으로 봤던 미국 사회 단면(예를 들어 미국 틴에이저 영화 속의 학교에서는 왜 운동선수와 치어걸이 짱이고 우등생이 찐따 취급을 받는지, 왜 배관공 같은 육체노동자들이 심심찮게 섹시 아이콘으로 묘사되는지, ‘라떼 리버럴’이라는 말이 왜 욕이 되는지, 스테로이드를 맞은 조증 환자가 쓴 것 같은 미국산 자기 계발 서적이라든지, 왜 아직까지도 지구가 6천 년 전에 창조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무시 못 할 세력을 떨치고 있는지, 한국 교회 풍경과 겹쳐져 왠지 낯설지 않은 미국의 대형 부흥 집회 장면이라든지)의 배경이 이해되면서 마치 퍼즐을 맞추는 듯한 재미가 있다. 문장은 호흡이 긴 만연체지만 난삽하지 않고 위트와 격조가 있다.

오토 노이라트라는 인간(3)

“나는 빈의 학구적인 집안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이미 책이 가득 찬 선반과 찬장을 바라보며 자랐고, 거기서 받은 인상은 이후 평생 동안 내 곁에 머물렀다. 우리 집의 현관에는 책과 팸플릿이 꽉 들어차 있고 유리문이 달린 엄청나게 큰 책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천장까지 닿은 책 선반들은 거실과 아버지 서재의 사면 벽을 빼곡히 채웠다. 나중에는 나와 동생 방의 선반도 책으로 채워졌다.
나는 그 서재 안에 있는 책의 권수를 헤아리면서 어림수 구하는 법을 처음 익혔던 것 같다. 나는 선반의 개수와 선반 하나에—대부분 두 줄 깊이로—배열된 책의 권수를 세어, 합계가 총 1만 3천 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책들 전부가 다 내 차지였다. 나는 서재 전체를 마음껏 헤집고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제대로 글을 읽을 수 있게 되기 전에, 나는 그림과 사진이 있는 책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책들을 좋아하게 된 것은 서재의 배치 때문이기도 했다. 주로 그림과 지도가 수록된 커다란 책들은 손이 닿기 쉬운 책장 맨 아래칸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선반에서 그 책들을 꺼내어 펼치고, 아이들이 곧잘 그러듯이 바닥에 엎드려서 그림들을 구경했다.
나는 색채가 선명하고 모호하지 않게 그려진 그림들을 좋아했다. 직공들이 공구를 가지고 일하는 모습을 묘사한 책들이 있었는데, 나는 곧 그 주요 도판 속에 나오는 공구들이 실제 작업장에서 쓰이는 도구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부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거나 아무 것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는 그림들을 마주칠 때면 더더욱 신경이 거슬렸다. 나는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그림책들이 오류투성이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어떤 그림이 특별히 유익하다거나 모호하다거나 짜증난다는 말을 아버지한테 한 기억은 없다. 도판들은 의사소통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미적이거나 역사적인 관점에서만 논의되었다…아마 시각적 디테일에 대해 논하는 전통이 당시에는 부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오로지 책에만 파묻혀 생활했다고 여기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바깥 활동도 많이 했다. 우리 가족은 매년 몇 달씩을 시골에서—때로는 산간 지방에서—보냈기 때문에 나는 나무와 꽃, 나비와 애벌레, 소와 말, 손으로 만드는 갖가지 도구들, 시내와 연못에 익숙해졌다. 나는 작은 물레방아들을 직접 만들어 개울에 놓기도 했고, 한번은 역사책에 실린 그림을 보고 라인 강에 카이사르가 놓았던 것과 똑같은 다리를 짓기도 했다. 이 작은 구조물은 대단히 튼튼해서 (마른 땅 위에 놓은 다리이긴 했지만) 내가 그 위에 올라가도 끄떡없었다. 빈의 박물관들 역시 나의 시각적 성장 환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토 노이라트의 자전적 노트에서 발췌한 그의 어린 시절’, Otto Neurath, Empiricism and Sociology, 1973, 4-5p.)

오토 노이라트의 아버지 빌헬름 노이라트는 당대의 저명한 정치경제학자이자 사회 개혁가였고, 오토는 아버지가 지녔던 백과사전적 박식함과 개혁 의지를 고스란히 물려 받았습니다. 빌헬름 노이라트는 과잉 생산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산업을 (바로 국유화하지 않고) 정부 통제 하에 두거나 오너/경영자의 관리를 노동자 평의회의 관리로 대체한 범기업연합(pan-cartelism)을 제안한 바 있는데, 이는 훗날 그 아들이 구상한 ‘연합 사회주의(associational socialism)’ 모델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노이라트는 빈에서 철학, 수학, 물리학을, 베를린에서 역사학, 경제학, 철학을 공부하고 1906년 베를린에서 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데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키케로의 <의무론>과 고대 이집트의 비화폐 경제에 대한 것이었음을 보면 그의 경제/사회학적 상상력의 뿌리가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현물 경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 사상으로부터 자신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경제 모델을, 이집트의 상형 문자로부터 보편적인 시각 언어를 착안하게 된 것이죠.

1910년경 그는 빈에서 수학자 한스 한, 물리학자 필립 프랑크 등과 함께 에른스트 마흐, 피에르 뒤엠, 앙리 푸앵카레의 과학 사상을 주로 논하는 철학 토론 그룹을 만듭니다. 이 모임은 1929년 정식 출범하게 된 빈 학단(Vienna Circle)의 전신이 되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이 모임을 ‘제1 빈 학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1 빈 학단에 대한 설명은 <과학철학> 13-1호(2010)에 실린 고인석 선생의 논문 ‘빈 학단의 과학 사상’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이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마흐의 과학사상이 지배력을 행사하던 빈 대학에서 공부한 공통의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이들은 유태계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었다…한과 노이라트, 프랑크 등은 빈의 카페하우스에 모여서 학문과 사회를 논했다. 학문적 차원에서는 특히 당시 이론물리학과 수학, 논리학의 새로운 성과들이 이들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요 관심사에 실천적 의미의 사회주의 계몽운동이 있었던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63-64쪽)…제 1 빈 학단의 시기에는 ‘학문의 존재의미는 인간의 생존과 번영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마흐의 관념이 ‘정제된 학문을 통한 계몽, 혹은 사회적 삶의 고양’이라는 실천적 지향성의 원천으로 뚜렷이 남아 있었다.(71-72쪽)”

1910년대 초에 노이라트는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당시 전쟁 중이던 발칸 반도를 여행하며 전시 경제에 대한 여러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또 1차 대전 중에는 빈 중앙정부의 전쟁부 내에 전시경제와 관련된 부서를 만들 것을 건의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고, 이어 라이프치히에서 ‘독일전시경제박물관’의 관장을 지내며 나중에 빈 사회경제박물관에서 완성될 시각화 작업의 초기 단계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전시의 배급 경제에 대한 이런 연구와 경험은 그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대비되는) 사회주의적 ‘관리 경제(Verwaltungswirtschaft)’ 혹은 (화폐 경제와 대비되는) ‘현물 경제(Naturalwirtschaft)’ 모델을 완성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전시 경제를 통해 현물 경제로’라는 제목의 논문집 서문(1919)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글들은 자유 교환 경제의 시대가 끝나고 관리 경제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으며, 화폐 경제는 해체되어 철저히 조직된 현물 경제에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의거하고 있다. 아버지의 지적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나는 위기와 도탄에 빠진 전통적 경제 질서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자라났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듯한 모든 흐름에 주의를 집중했다…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세계 대전이 미래의 관리 경제를 창출할 것이라는 견해로 나를 이끌었다. 여기서는 모든 노동력과 물자가 전쟁 수행을 위해 중앙에서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질서로부터 (정치 권력을 요하는)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모든 인민을 위한 관리 경제에 다다를 수 있을 듯 보인다.” (Otto Neurath, Empiricism and Sociology, 1973, 1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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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 1867-1922)

흥미로운 부분은 그의 이러한 급진적 계획 경제 구상이 아에게(AEG)의 2세 경영자였던 발터 라테나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라테나우는 1차 대전 중 정부 전시물자국의 책임자로서 독일의 전시 경제를 지휘하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의 관리•분배 체계를 확립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라테나우가 지휘했던 전시 경제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유시장가격을 폐지하여 물가를 고정시키고 물자를 분배하는 한편, 합성질소흡착법, 인조견, 합성고무, (달팽이로 만든) 합성수지, (도토리로 만든) 커피 등 혁신적인 대체상품을 개발했습니다. 전시물자국은 원자재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24개 기업을 감독했고, 식량공급을 규제하고 분배하기 위한 특수 행정부서인 전시식량청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1]

사실 라테나우는 단순한 자본가로 치부될 수 없는 개혁적 사상가이자 문필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기에 바이트를 할애하여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제가 보기에는 노이라트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인 것 같습니다).[2] 그는 전시물자의 생산과 분배를 지휘했던 경험을 토대로,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산업의 국유화 대신) 경영주의 참여하에 산업을 국가가 통제하는 ‘산업자치제’를 제안했습니다. 피터 드러커는 라테나우가 1차 대전 초기 국가의 설계자로서 기적적인 일을 해냈다고 평가하면서도 ‘전체주의 경제학을 설교하고 다닌 최초의 인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3] 라테나우가 제안한 ‘산업자치제’는 빌헬름 노이라트가 제안했던 범기업연합과도 일맥상통하며 이 두 가지는 오토 노이라트의 계획 경제 모델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사실 독일은 비스마르크 이래로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정부가 경제에 깊숙이 간섭해 온 유구한 전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산업을 통제하고 물자를 분배하는 이런 식의 계획 경제는 우리도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에 대해 정승일 선생이 쓰신 은혜로운 프레시안 서평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서평은 제가 그때까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노이라트라는 인물의 관점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한국 역시 30년 동안이나 ‘계획-계산 경제’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즉 1962년부터 1992년까지 우리나라는 6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실행했다. 그 계획경제는 광범위한 ‘계산’과 예측을 동반했는데, 그러한 계획경제의 수립 과정에는 수학으로 무장한 경제학자들만이 아니라 중화학공업화의 현장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공과대학 출신의 엔지니어들 역시 테크노크라트로서 다수 참가하였다. 왜냐하면 철강과 자동차, 전자, 화학의 전략 산업 육성에 필요한 대규모 설비투자의 양적•수학적 규모 탐색과 그에 필요한 (경제적) 비용 계산 등을 위해서는 경제학자와 공학자의 양 축이 모두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이라트가 주목하는 점이 바로 이 점이다. 즉 계획경제의 계산 가능성은 교환가치(화폐가치로 측정된)를 단지 노동가치(가상적 화폐(virtual money)로 측정된)로 대체하는 것(랑에와 그 이후 후계자들이 주장한)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며, 실물가치(사용가치) 그 자체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1973년에 시작된 중화학공업화가 노이라트와 비슷한 관점에서, 즉 신고전파 경제학의 시장가격 계산, 화폐적 계산보다는 공학도 출신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주도하는 실물적 계산에 더욱 의존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추진했던 계획 경제는 그가 대동아전쟁기에 경험한 일제의 전시 경제 체제를 모델로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일제와 나치 독일이 채택한 전시 경제의 모델이 된 것은 바로 1928년경부터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경제 계획’이었죠. 또 부하린,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스탈린은 1차대전기 독일의 전시경제—국가자본주의—모델을 분명히 참조했습니다.

당시에도 노이라트가 주변 사람들에게 때로는 ‘사회주의자’로, 때로는 ‘자본가들의 친구’로 불리며 딱히 규정하기 힘든 인물로 평가되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과거의 계획 경제와 전시 경제 경험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새겨져 있는데요. 과연 여기서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실패로 판명 났거나 시대착오적인 전망이 아닐까요? 하지만 노이라트가 생각했던 계획 모델은,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계획을 격렬히 거부하고 모든 사회 단위의 수평적이고 느슨한 연합을 지향했다는 데 결정적 차이점이 있음을 지적해야 합니다(여기에 대해서는 <화폐 없는 사회는 가능하다>의 4장에 나와 있습니다.) 1918년 독일혁명이 터진 뒤, 그는 바이에른 지역에 세워진 혁명 정부에 합류하여 자신의 이런 사회화 구상을 현실에 옮기고자 시도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번 업데이트 때 다루게 될 것입니다.

(다음 업데이트는 아마도 몇 달 뒤가 될 듯합니다.)

 

  1. 이반 버렌드 지음, 이헌대/김흥종 옮김, <20세기 유럽경제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8, 76쪽.
  2. 그는 일명 ‘예술가 기업주’로서 산업 디자인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1907년 당시 “확실히 중앙집중적인 통제 하에 있고 중앙집중적인 조직을 갖고 있는 유럽 최대의 산업단위 결합체”였던 AEG는 디자인 컨설턴트로 페터 베렌스를 고용해서 공장 건물부터 기업 로고, 서식류, 제품, 광고 포스터까지 기업의 모든 활동과 관련된 디자인을 의뢰했고, 미스 반 데어 로에, 발터 그로피우스와도 협업하여 AEG의 디자인 정체성을 수립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라테나우는 외무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1922년 우익 광신자들에게 암살당했고 이는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3. 피터 드러커, <경제인의 종말> 이재규 옮김, 한국경제신문사, 2008, 424쪽.

 

‘번역과 말’: 토머스 드 퀸시와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cc* 워크룸 총서 ‘제안들’ 출간 기념으로 2014년 2월 26일 북소사이어티에서 열린 ‘번역과 말’, 세 번째 행사 때 발표한 원고를 여기 올립니다.

8994207368_1안녕하세요. 토머스 드 퀸시의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을 번역한 유나영입니다. 먼저 바쁘신 중에 귀한 시간 내어, 미세 먼지를 뚫고…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중에는 이 책을 읽으신 분도 있고 아직 못 읽으신 분도 계실 텐데, 편의상 읽지 않으셨다고 가정하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버벅거릴 게 분명해서 원고를 적어왔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 소개를 잠깐 드리면, 저는 원래 사회과학 출판사 편집자 출신으로 정치/사회 분야 책을 주로 번역해 왔습니다. 문학 번역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책을 의뢰 받고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토머스 드 퀸시 전공자도 아니고 또 영문학 전공자도 아니며, 그전까지 제가 드 퀸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보르헤스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19세기 작가죠. 그중에서도 드 퀸시는 당대의 손꼽히는 스타일리스트로 이 사람의 문장은 현란한 장광설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글은 흔히 소용돌이나 미로에 비유되곤 하죠.6744508

그래서 저에게는 뛰어넘어야 할 높은 벽, 큰 도전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작품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번역하는 과정은, 물론 힘들었지만, 일체의 다른 오락거리가 머리에 전혀 안 떠오를 정도로 흥미진진했습니다. 일하다가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솟아서 잠깐 머리 좀 식혀야지 하고 텔레비전 보다가도, ‘아니 내가 재밌는 걸 놔두고 이 지루한 걸 왜 보고 있지?’ 하고 그냥 꺼버리고선 다시 일하고.. 그랬습니다.

토머스 드 퀸시는 19세기 전반기에 영국에서 활동한 작가로, 소설도 몇 편 썼지만 그보다 에세이스트로 유명합니다. 국내에는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혹은 <어느 영국인 아편중독자의 고백>)을 통해서 소개되어 있는데요. 실제로 토머스 드 퀸시가 당대에 문필가로 명성을 얻은 것도 이 <아편쟁이의 고백>을 통해서였고, 영미권에서도 주로 ‘아편쟁이(Opium-eater)’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드 퀸시는 다양한 정기 간행물에 기고하는 필자로서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고—말년에 편집한 저작 선집이 14권짜리였으니까요.—또 대단히 광범위한 소재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아편쟁이의 고백> 같은 자서전적인 글도 많이 썼지만, 아주 많은 정치 평론과 시사 평론을 썼고, 콜리지와 워즈워스에 대한 그의 평론은 영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철학 특히 칸트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역사, 종교, 그리스와 라틴 고전에 대한 해박한 글들도 썼고, 외국 문학 작품의 번역도 했고, 폭력적이고 어두컴컴한 고딕 로맨스 소설도 몇 편 썼고, 심지어 리카도의 가치 이론에 대해 다룬 정치경제학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백과사전적인 방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고요. 이 책만 해도 고전 인용이 굉장히 많이 나오죠.18332180

당대의 살인 사건에 대한 관심은 토머스 드 퀸시의 이런 여러 관심사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이 책의 테마가 된 존 윌리엄스의 연쇄 살인 사건은 드 퀸시가 거의 병적으로 집착했던 소재였습니다. 이는 1811년, 아일랜드인 선원 존 윌리엄스가 런던 이스트엔드의 래트클리프 하이웨이에서 12일 간격으로 두 일가족을 잔혹하게 몰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잭 더 리퍼가 출현하기 이전에 영국에서 일어난 가장 기억할 만한 연쇄 살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피해자가 매춘부나 부랑자가 아니라 평범한 서민이었고, 길거리 뒷골목이 아닌 자기 집안에서 살해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영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영국인의 집은 그의 성이다’라는 격언이 있죠. 이는 그 굳건한 믿음을 완전히 깨부순 사건이었습니다. 살인범인 존 윌리엄스는 범행 현장에 흘리고 달아난 흉기가 증거가 되어 검거되었고, 판결이 나기 전에 감방 안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법에 따라 가슴에 말뚝이 박힌 채 도심의 사거리 밑에 매장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1811년 당시 드 퀸시는 스물 여섯 살 청년이었습니다. 드 퀸시의 글 중에서 윌리엄스 사건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바로 이 책에 첫 번째로 실린 ‘맥베스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이 글이 발표된 때가 윌리엄스 사건이 있은 지 12년이 흐른 1823년, 드 퀸시가 서른 여덟 살 때입니다. 자, 그 다음으로 나오는 글이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이죠. 이 글을 <블랙우즈 매거진>이라는 잡지에 처음 발표한 게 1827년, 드 퀸시가 마흔 두 살 때입니다. 이 글은 살인 사건을 예술적으로 감상하는 이른바 ‘살인 감상 협회’라는 가상의 협회에서 주최한 가상의 강연문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요. 이 강연의 제목이 ‘예술로서의 살인에 대한 윌리엄스 기념 강연’입니다. 하지만 윌리엄스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짤막하게만 들어가고요, 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살인 사건들을 풍자를 섞어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으로 1839년, 드 퀸시가 쉰 네 살 때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에 대한 두 번째 글’을 <블랙우즈 매거진>에 발표합니다. 이 글은 앞 글의 강연자였던 이 ‘살인 감상 협회’의 회장이 <블랙우즈 매거진> 편집장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요. 인도에서 ‘서그 암살단’이라는 대규모 강도 집단이 검거되어서 그 정체를 드러낸 것을 경축하여 ‘살인 감상 협회’에서 열었던 기념 만찬을 회고하는 내용입니다.16038383

자, 그 다음에 나오는 가장 긴 글,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에 대한 후기’, 이것을 쓴 것이 1854년, 드 퀸시가 예순 아홉 살 때입니다. 죽음을 불과 5년 남겨 놓고 있을 때죠. 이때야 비로소 드 퀸시는 윌리엄스 살인 사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깁니다. 이 글에서 그는, 그로부터 43년 전 살인범 윌리엄스가 밟았던 길을 마치 르포 작가처럼, 혹은 스릴러 소설 작가처럼 한 발 한 발 숨가쁘게 뒤쫓아 갑니다. 마지막으로, 생전에 발표되지 않은 세 편의 짧은 수고는, 각각 드 퀸시가 1825년(마흔 살) 1828년(마흔 세 살) 1844년(쉰 아홉 살) 때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드 퀸시가 청년 시절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평생에 걸쳐 써 나간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읽으면, 이 모든 글들이 마치 일주일 간격으로 연재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건 정말 집요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이 잔혹한 살인 사건에 집착했을까요? 우선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들 수 있습니다. 19세기 당시의 영국에는 이미 잔혹한 살인 사건에 열광하는 대중들이 있었고 이들의 수요에 맞춘 옐로 저널리즘과 선정적인 범죄 소설과 연극들이 존재했습니다. 어떤 소설은 시리즈로 매주 연재해 가며 출간되었는데 주마다 4만 부씩이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13607141드 퀸시 자신도 이런 시류에 한몫 했습니다. 드 퀸시는 <웨스트몰랜드 가제트>라는 신문의 편집장을 잠시 지낸 적이 있는데요. 이때 신문 지면을 살인 사건의 재판 보고서, 자살, 강간, 아편, 이상하고 기이한 사건 소식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예를 들면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발표하고 불과 몇 달 뒤에, ‘살인범의 시체를 전기 충격으로 되살리는 실험’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싣기도 했습니다. 한 글에서 드 퀸시는 그것을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살인 사건을 다루는 이유는) 첫 번째는 이것들이 흥미롭기 때문이고, 둘째는 교육받지 못한 계층에게 사회적 의무를 가르치기 위해서이고, 셋째는 이것이 우리 사회의 윤리적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별로 설득력 있는 변명은 아니죠.

드 퀸시의 살인 에세이 또한 고급 문학(high literature)의 탈을 쓰고 있지만 현학적인 고전 인용과 젠체하는 문체를 걷어 내고 보면 당시의 이런 싸구려 범죄 소설이나 선정적 신문 보도와 공통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유행했던 범죄 소설의 조류는 범죄자를 사회 모순의 희생양이자 전복적 영웅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정치적 알레고리를 띠고 있었고, 한 발 더 나아가 사법 개혁을 촉구하기 위해 집필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 퀸시는 살인범의 동기에 대한 합리적 분석이나, 살인범의 개인사와 내면이나, 그를 범죄자로 만든 사회 구조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11369911

그러면 드 퀸시가 관심 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살인 그 자체의 순수한 미적 가치였죠. 드 퀸시가 찬미한 윌리엄스의 예술성은 바로 “과잉과 낭비”에 있었습니다. 또 19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도래한 가차 없는 시간 규율 속에서, 한 순간을 낚아채어 공포의 순간으로 영구히 박제하는 능력에 있었습니다. 한 글에서 드 퀸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 비극을 주재하는 힘은 죽음이다. 위대한 죽음의 한 순간을 그 순간에 영구히 얼어붙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 조각과 그리스 비극의 미학적 특성이다.” 그것을 생생히 보여주는 한 예가 라오콘 상입니다. 아폴로 신전의 사제 라오콘이 커다란 뱀에 물려 죽는 순간을 장엄하게 묘사한 조각이죠. 여기에는 그리스 비극의 미적 이상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 이는 드 퀸시가 심취해 있었던 칸트 철학의 숭고미(sublime) 개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감동받지만 무섭고 두려운 것을 보고도 감동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깎아지른 듯한 절벽, 뜨거운 용암이 분출하는 화산, 바닥이 없을 것 같은 검푸른 바다와 광막한 우주…. 이런 압도적이고 무시무시한 것들에도 우리는 매료됩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 두려운 대상이 우리에게 직접 해를 끼치지 않을 만큼 멀찍이 있어야만 합니다.) 드 퀸시는 살인이라는 무시무시한 행위도 안전한 거리에서 멀찍이 놓고 봤을 때는 우리 마음에 미적 감흥을 일으킨다고 한 것입니다. (자, 폭풍우 치는 밤 난롯가 소파에 푹 파묻혀서 책을 읽는다고 할 때 여러분은 무슨 책을 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오싹한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추리 소설을 읽습니다. 이보다 더 안락하면서 짜릿한 쾌락이 있을까요?)

17974594그럼 그런 미적 감흥을 드 퀸시는 어떻게 글로 재현했는가? 살인의 위협에 압도되어 모든 것이 정지한 공포의 순간과, 그 순간이 끝나고 정지한 모든 것들이 갑자기 움직이며 일상이 되돌아오는 순간을 극적으로 대비시킵니다. 살인범이 집안에서 살인을 막 끝냈을 때 심부름 나간 하녀가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는 순간, 비명 소리를 듣고 계단을 내려온 직공이 일가족을 몰살한 살인범의 뒷모습을 목격하고 몸이 얼어붙는 순간—이 공포의 순간에 모든 사고와 움직임은 정지됩니다. 드 퀸시는 의도적으로 이 시간을 길~게 늘려서 자세히 묘사해 놓았습니다. 그 뒤, 하녀의 절규로 이웃 사람들이 달려옵니다. 직공이 극적으로 탈출하여 위급을 소리쳐 알리자 성난 군중들이 살인범을 잡으러 밀물처럼 몰려옵니다. 공포의 시간이 끝나고 일상의 시간이 역류하는 것입니다. 이 두 상황의 극적 대비가 내는 시적 효과에 대해서는 <맥베스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에 압축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는 드 퀸시의 다른 글(영국의 우편 마차)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나는 모티프입니다. 이는 아편 중독의 부작용으로 극단적 흥분과 극단적 무기력 상태를 오갔던 드 퀸시의 체험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살인범 존 윌리엄스가 실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 그다지 흥미로운 인물은 못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성향이 있는 아일랜드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드 퀸시의 글에서 윌리엄스는 불가해하고 순수한 악마로 묘사됩니다. 그는 오렌지색 머리에 창백한 가면 같은 얼굴을 하고 있고, 인도에서 체류한 경력 탓에 신비하면서도 불길한 동양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습니다. 심지어 드 퀸시는 그를 지진에 빗대며 자연의 힘에 비견하기도 합니다. 그 뒤 살인범은 가슴에 말뚝이 박혀 묻힘으로써 희생 의례의 제물이 됩니다. 공동체는 그를 단죄하고 축출, 희생시킴으로써 단결되고 정화됩니다. 드 퀸시는 범죄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연행되어야 할 의례로서 다루고 있는 것이죠. 이는 문제에 대한 매우 보수주의적인 접근 방식입니다. 드 퀸시는 뿌리 깊은 보수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고 이는 그가 살인을 다루는 방식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3698553

드 퀸시가 편집장을 맡았던 <웨스트몰랜드 가제트>는 보수당의 전신인 토리당 계열의 신문으로 모든 종류의 개혁을 거세게 비판하고 현 상태를 옹호하는 논조를 띠었습니다. 또 드 퀸시가 주로 기고한 문예지 <블랙우즈 매거진>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를 예술적으로는 급진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죠. 이 잡지에는 대단히 공격적이고 방종하기까지 한 풍자글들이 많이 실렸습니다. 이런 태도에는 순수한 미적 쾌락, 자유롭고 무책임한 쾌락의 영역을 일상 정치와 분리된 자율적인 공간으로 보존하고 봉인하려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말이 길어졌는데 다시 드 퀸시가 죽음과 살인에 집착하게 된 배경으로 돌아와서…. 이번에는 드 퀸시의 자전적 배경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드 퀸시는 7살 때 당시 9살이던 친한 누이를 병으로 잃었고 또 10살 때는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특히 누이의 죽음은 드 퀸시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드 퀸시는 이때의 충격으로 평생 동안 죽음에 집착하게 되었고, 기괴한 환영을 보기 시작했고,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아편을 복용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성공한 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고, 교육도 잘 받았고 우등생으로 옥스퍼드까지 진학했지만 어려서 죽어 버린 누이 외에는 그 어떤 가족과도 마음을 나눌 수 없었기에 외롭고 조숙한 어린 시절을 보냈죠. 아버지는 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데다 일찍 세상을 떴고, 그의 어머니는 대단히 완고한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로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하고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드 퀸시는 다른 글에서 자기가 어머니와의 소통이 불가능했으며, 어머니 앞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이 절망적인 무력감을 느꼈다고 쓰고 있습니다. <아편쟁이의 고백>에도 나오지만 드 퀸시는 청소년기에 어머니와 후견인들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학교를 때려치우고 집을 뛰쳐나와 런던을 방황하며 굶주려 죽을 뻔합니다.

15778846여기까지 말하면 짐작하시겠지만 드 퀸시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아편 중독자였고, 살인과 죽음에 병적으로 집착했고, 외국인과 하층 계급에 대한 편견에 가득 찬 완고한 보수주의자였고, 무엇 하나 제대로 끝을 맺질 못했고—대학도 중도에 뛰쳐나왔고, 심지어 기고하는 연재물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했죠—금전 관리에는 완전히 빵점이라 평생을 빚쟁이한테서 도망다녔죠. 기벽도 많았는데요. 일례로 아주 작은 메모 조각 하나까지 버리지 못하고, 정리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책상, 의자, 침대, 바닥까지 책과 종이로 꽉 차서 운신을 못할 정도가 되면, 그 집의 문을 그냥 잠가 버리고 다른 숙소를 구해 나가는 식으로 숙소를 전전했죠. 드 퀸시가 죽고 난 뒤 최소한 여섯 군데의 숙소가 이런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벽, 개인적 트라우마, 빈곤, 중독 성향, 지극히 예민한 성정과 번득이는 두뇌,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 받지 못한 괴팍한 천재’의 이미지는 그를 대단히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에드거 앨런 포가 드 퀸시를 동경하고 그를 모델로 최초의 탐정 오귀스트 뒤팽을 창조한 것도 무리가 아니죠.[1] 그의 이러한 개성은 오귀스트 뒤팽과 셜록 홈즈에게로 이어지는 고전적 탐정 캐릭터의 원형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또 살인 사건을 그 사회적/윤리적 맥락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서 순수한 미적 구조물 혹은 지적 구조물로 취급하는 태도는 모든 추리소설의 전제가 된다는 면에서, 그의 글은 현대적 추리소설이 탄생할 기본 조건을 마련해 주었습니다.8206501

수많은 후대 작가들이 그의 글과 캐릭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드 퀸시의 글에서 직접 영향을 받은 유명 작가들의 목록은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 찰스 디킨스, 코난 도일, G.K. 체스터턴, 버지니아 울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보르헤스, 영화작가로는 앨프리드 히치콕, 나아가 연쇄 살인마와 범죄가 등장하는 오늘날의 모든 소설과 영상 작품에까지 이어집니다.

에드거 앨런 포와 조지 오웰이 드 퀸시의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을 오마주해서 쓴 짤막한 글이 있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가 쓴 것은 <정밀 과학의 한 분과로서의 사기치기(Diddling Considered as one of the exact Sciences)>라는 건데, 사기를 치기 위해 갖춰야 할 미덕을 열거하고 사기 치는 수법을 종류별로 정밀하게 분류하는 내용이고요, 조지 오웰의 글은 <영국 살인의 쇠락(Decline of the English Murder)>이라는 건데 당시 그러니까 1940년대 영국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들이 별로 볼 만한 게 없다고 불평하는 내용입니다. 둘 다 풍자적이고 익살이 섞인 글입니다. 편집자님이 평범한 번역 후기는 안 된다고 하셔서 고민하다가, 이 책에서 드 퀸시도 발랄하게 갔으니 후기도 발랄하게 가 보자, 해서 이 두 글을 번역해서 그냥 후기로 대신하면 어떨까요 하고 나름 꼼수를 써봤는데요, 편집자님께서 말씀하시길,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그 두 편의 글에 덧붙여, 에드거 앨런 포와 조지 오웰이 했듯이 드 퀸시의 <살인> 에세이를 오마주한 글을 한 편 더 써 주시면 어떨까요’ 하시는 바람에 그만 독박을 뒤집어 쓰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여기 실린 후기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드 퀸시의 화법을 패러디한 히치콕의 짧은 연설문을 찾아서, 포와 오웰의 글은 따로 안 실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책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독자 질문]
1. 특정 장르/분야의 글을 번역할 때 그 장르 언어에 익숙하기 위해 따로 뭔가를 하시는지요?
: 그 분야의 언어에 익숙해지려면 일단 번역을 시작하기 전에 책을 완독하여 그 책의 전체 맥락과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일이 필수입니다. 작업하는 도중에 배경 지식을 얻기 위한 독서를 병행하는 일도 많습니다. 저자의 다른 책들도 찾아서 읽고, 특히 번역서에 인용된 책들을 찾아 앞뒤 맥락을 확인하는 일은 반드시 합니다. <007 제임스 본드의 과학>이라는 책을 번역할 때는 그때까지 나온 모든 제임스 본드 영화들을 보았습니다. 이건 그 책을 번역하는 데 필수였습니다.

97649012. 책을 번역할 때 가장 곤란했던 점과 가장 신경을 썼던 점은? 저자 특유의 문장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떤 점에 주의했고 어떤 점이 특히 어려웠는지 궁금합니다.
: 곤란했던 점은 역시 드 퀸시 특유의 길고 난한 문장들이었죠. 단어들도 요즘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 문어투나 고어체 용법으로 쓰인 것들이 많고요… 만약 적당한 풀이를 영한사전에서 찾을 수 없을 때는 OED(Oxford English Dictionary)를 뒤졌습니다. OED는 그 영어 단어가 처음 문헌에 등장한 시기부터의 의미 변천사를 다 볼 수 있게 해 놓았죠. 영어사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OED의 예문 검색창에서 저자 이름 ‘Thomas de Quincey’를 치면 예문이 1천 개가 넘게 나옵니다. 그걸 다시 연도순으로 정렬하면 지금 내가 번역하는 바로 그 글에 수록된 예문들을 최소한 수십 개는 건질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드 퀸시 자신이 만들어낸 단어, 혹은 최초로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 단어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드 퀸시는 ‘subconscious’ 즉 ‘잠재의식’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나오기 반세기 이전에 말이죠. 또 ‘clue’라는 단어를 현대 추리소설에서 쓰는 대로 미스터리를 푸는 ‘단서’라는 의미로 사용한 최초의 범죄 소설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선대와 동시대의 여러 편집자들이 달아놓은 상세한 주석도 있고, 또 일역본과 불역본도 나와 있어서 이것들을 참고하여 대부분의 난관을 헤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3. 드 퀸시의 책은 국내에서 2번 번역되어 나왔는데요, 이번 번역에서 중점을 둔 부분 혹은 차별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6940803
: 드 퀸시의 대표작이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시공사)과 <어느 영국인 아편중독자의 고백>(펭귄북스)의 두 가지 번역본으로 나와 있죠. 이것과 특별히 차별점을 둬야겠다고 의식하고 작업하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이 <살인>과 <고백>은 서로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저는 <살인> 번역을 시작하기 전에 <고백>을 읽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약간 지루했습니다. 젊은 시절 런던에서 떠돌며 메리와 만나는 부분이나 뒤에 가서 기괴한 환상이 펼쳐지는 부분은 좋은데, 아편에 대해 이야기한 모든 부분들, 아편을 몇 온스 먹었고 끊으려고 뭘 했고… 자기가 왜 아편을 복용했는지 구구절절 변명하는 부분이 제겐 좀 구차하게 들렸어요… 드 퀸시의 캐릭터와 문체에 익숙해진 지금 다시 읽으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살인>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작업 시작할 때부터 완전 신나고 재밌었어요. 작업 기간이 얼마나 걸리나 재보려고 첫 글 <맥베스>를 시험 삼아 해봤는데 그때부터 벌써 머릿속에서 둥! 하고 종이 울리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작업 끝날 때까지 그렇게 하이한 상태로 쭉 갔습니다. 아마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소재에 드 퀸시 특유의 장광설과 비틀린 유머 감각이 결합해서, 또 그것이 저 자신의 취향과 궁합이 잘 맞아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4. 번역 작업을 할 때 출발어에 대한 ‘충실함’과 도착어의 창조적 독립 사이에서 많이 갈등하는 편인지, 그렇다면/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1583083: 여기서 ‘충실함’의 정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것 같은데요. 여기서 단어 하나하나를 품사 그대로 옮기고 문장 구조와 어순을 보존하는 것이 ‘충실한’ 번역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음… 번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거칠게 말해, 저는 한 문장 단위에서 저자가 전달하려는 의미가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오롯이 옮겨졌다면 충실한 번역이라고 봅니다. (생각은 이렇게 하지만, 제가 번역할 때 정말로 문장을 막 해체해서 재조립하는 일은 드뭅니다. 사실 그건 굉장히 품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또 이번 드 퀸시 책처럼 문학 작품의 경우는 문체가 주는 느낌까지—물론 100퍼센트 전달은 힘들겠지만–전달해 주어야겠죠. 그런 의미의 충실함을 전제한다면, 저는 창조적 독립보다는 충실함 쪽으로 확실히 더 기웁니다. 이건 전적으로 번역자 개인의 성향에 따라 갈리는 문젠데요. 제 경우는 아직 저 자신에게 번역’가’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낯간지럽습니다. 진짜 번역가는 배수아, 성귀수 선생님 같은 분들이죠. 그분들은 번역가이기 이전에 이미 작가, 즉 창작자셨으니까요. 저는 애초에 편집자로 출발했기 때문에 아직도 편집자로서의 마인드가 기본으로 장착돼 있고, ‘나는 편집자와 협업하여 책을 만드는 스태프의 일원으로서의 번역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번역도 제 개성을 최소한으로 드러내고 저자의 개성을 최대한 살려 주는 쪽으로 작업하려고 노력합니다.

끝으로, 저는 특히 범죄-추리-스릴러 장르 독자분들이 이 책을 많이 읽어 주시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읽으시다가 오역이나 표기 오류 등을 발견하신 독자분은, 제 홈페이지에 정오표 란을 마련해 놓았으니 댓글로 신고해 주시면 추첨을 통해 사은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제 홈페이지 주소는 역자 소개글 맨 뒤에 쓰여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 드 퀸시의 캐릭터와 뒤팽의 공통점: “저명한 집안 출신이지만 잇따른 불운으로 가난하게” 됨. “책이 그의 유일한 사치품”이며 “광범위한 독서가”로 대단히 박식하고, “공상벽”과 몽상가 기질이 있음. 밤마다 나와서 거리를 산책하는 습관이 있음. 논리적이지만 직관이 뛰어남. 살인과 죽음에 대해 비상한 흥미를 품고 있음. 프로를 능가하는 아마추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변덕과 기벽의 소유자. 어떤 평자는 포의 <도둑맞은 편지>가, 드 퀸시가 콜리지의 표절 혐의를 조사하여 폭로한 일화와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함. 실제로 드 퀸시는 당시 신문에 보도된 살인 사건들의 기사를 보고 추리하여 범인을 찾아내는 게임을 즐겼고, 때로는 경찰보다 먼저 범인을 맞추기도 했음.